읽는 순간 머릿속에 장면이 그려진다는 점은 소설 의 큰 장점 중 하나다. 그리고 영화 은 그러한 장면을 실제화시키고 싶은 제작자들의 욕망과 이것을 자신의 상상과 비교하고 싶은 독자들의 욕구가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한 결과물이다. 각각의 상상은 누구의 것과도 일치할 수 없고, 그래서 한편으로 영화 은 일종의 타협일 수밖에 없다. 특히 소설 속의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에 대한 평가는 저마다의 취향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인데, 실제로 ‘리스베트’의 캐스팅은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래서 의 한국 독자들을 위해 마련한 다음의 가상 캐스팅도 모두에게 완벽한 리스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시너지만큼은 어떤 캐스팅보다도 강력하다는 것을 자부한다.

<밀레니엄>│한국판 <밀레니엄> 가상캐스팅
│한국판 <밀레니엄> 가상캐스팅" />리스베트 살렌데르 – 안영미
“완전 밀레니~엄해요. 범인, 넌… 진짜… 이런 씨지브이… 완전… 지옥 같아!”

리스베트를 이해하는 것은 거대한 모순과 직면하는 일이다. 아동 정신병원 입원 기록이 있는 그녀는 병원과 사회로부터 약물 남용의 위험이 있으며, 자기 보존 능력이 결여 되어 있고, 사회성과 공감능력이 부족한 인물로 판단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법적으로 혼자 살아갈 수 없는 불안한 성인인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완전한 고독이다. 그리고 누구와도 연대하지 않는 그녀는 오직 자신의 힘으로 기업의 약점을 이용하고, 개인의 안일함을 파고들어 정보를 얻고 사실에 접근하는 힘을 가졌다. 아무도 그녀의 진심을 알아보지 않지만, 그녀는 모두의 진실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겨우 154cm의 키에 42kg의 몸무게, 누가 봐도 약자의 육체를 가진 그녀는 시각적 측정을 뛰어넘는 신체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보이는 것은 전부가 아니며, 숨겨진 것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리고 그 이면의 것에 접근하지 못하면 진실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천재 해커이자 뛰어난 정보 조사원, 엄청난 실전 전투 능력을 갖춘 철벽녀인 리스베트는 그래서 의 뮤즈이자 마스코트일 수밖에 없다.

미카엘은 리스베트를 통해 ‘삐삐 롱스타킹’을 떠올린다. 투박하게 자르고 아무렇게나 염색된 머리카락, 검은 화장, 얼굴에 주렁주렁 달린 피어싱과 몸을 뒤덮은 문신은 말괄량이와 다소 거리가 멀지만 자신만의 세상에서 스스로 리더가 되는 그녀의 상상력만큼은 동화 속의 주인공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영미가 만들어낸 김꽃뚜두레라면 정신은 물론 외모까지도 완벽히 리스베트의 현신이라 할 수 있다. ‘입은 넓은 편이고 코는 작은데 광대뼈가 솟아 있어, 어찌 보면 동양여자처럼 보이는’ 그녀의 외모에 대한 묘사는 마치 김꽃뚜레의 초상과 같으며, 거의 웃지 않고 가끔 건조한 유머를 던질 때면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떠오른다는 관찰 사항 역시 영락없는 김꽃뚜레다. 결정적으로 원작 소설의 2부에서 평소 가와사키를 즐겨 타던 그녀가 괴한들을 물리친 후 발견한 모터사이클을 보고 “할리 데이비슨 아냐? 이거 쿨 한데!”라고 말하는 간디 작살의 장면에서는 환청이 들려 올 지경이다. 할리라예!
<밀레니엄>│한국판 <밀레니엄> 가상캐스팅
│한국판 <밀레니엄> 가상캐스팅" />미카엘 블롬크비스트 – 주진우
“범인은 보면요,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누님들은 범인 말고 저만 만나줍니다.”

리스베트가 진실이라면, 미카엘은 정의의 상징이다. 프리랜서 범죄 리포터 출신인 그는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 경제 권력의 비리를 폭로하기 위해 잡지 을 창간했다. 기계 설치사인 노동자 아버지를 둔 그는 학창시절 밴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연주했으며, 신문 방송학을 전공하는 동안 지하철 경비원으로 일하거나 보병 부대에 자원하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생활의 경험을 쌓았다. 그의 신랄한 글이 풍자적이면서도 강한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밑바탕 된 것이다. 미카엘은 다만 냉철한 수재일 뿐 아니라 다수의 대중이 원하는 진실을 선별하는 감각을 가졌으며,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희생해야 할 것을 결정하는 판단력을 갖춘 인물이다. 잡지 을 두고 어떤 이들은 ‘좌익지’라고 부르지만, 정작 좌파 진영에서는 적당히 보수적인 중산층을 위한 매체라고 평가한다는 대목은 그래서 눈여겨볼 부분이다. 미카엘은 결코 계급이나 집단을 대표하지 않으며 그의 정의는 순간순간 상대적인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에 절대적인 균형 감각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그가 믿는 것은, 그리고 자부하는 것은 자신의 정직이다. 나아가 정직에 대한 스스로의 확신이다.

리스베트는 미카엘에 대해 “자신이 경제기자로 불리는 것조차 부끄러울 때가 있는데, 그것은 전혀 기자로 볼 수 없는 인간들과 자신이 혼동될 위험이 있는 까닭”이라는 내용을 보고 한 바 있다. 누구보다 열심히 분야를 취재하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기사를 쓴다. 그러나 그것은 본분에 충실한 것뿐이라고 겸손을 부린다. 여지없이 미카엘은 강직하기에 위태로운 기자, 정통 시사 주간지 시사IN의 주진우를 떠올리게 한다. 진실에 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것을 결국 출판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품은 더더욱 그러하다. 어떤 소송과 탄압으로도 그의 입을 막을 수는 없다. 자신의 방향에 대한 확신이 있는 한, 이 남자는 폭로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가 도전하는 세상은 복잡하기 짝이 없지만, ‘어쩔 수 없어서’ 자신의 일을 계속한다는 그의 동기는 심플하기 그지없다. 말하자면, 미카엘과 주진우가 닮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고군분투 하고 있는 스웨덴과 한국의 현실이 같은 그늘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꽤 미남으로 다수의 누님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설정은 부끄럽지만, 보너스다.
<밀레니엄>│한국판 <밀레니엄> 가상캐스팅
│한국판 <밀레니엄> 가상캐스팅" />에리카 베르예르 – 고현정
“기자는 실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내 기자는 안 돼!”

어떤 자동차도 엔진만으로 움직일 수는 없는 법이다. 잡지 을 달리게 하는 힘이 미카엘의 취재력이라면, 편집장이자 선임주주인 에리카는 핸들을 담당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회사를 운영하고, 조직을 관리하며, 미카엘의 판단에 대한 판단을 한다. 물론 에리카의 의도대로 미카엘이 의지를 변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녀의 결정은 미카엘이 만들어내는 파문으로부터 을 보호함으로써 오히려 미카엘을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자신 역시 미카엘의 행보에 매몰되지 않고, 업계에서의 성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안정된 가정을 가진 유부녀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동창이자 동료인 미카엘과 공공연한 애정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특유의 단호한 자신감 덕분이라 할 수 있겠다. 미모의 언론인, 담백한 야심가, 몸과 마음, 일과 사랑을 분리할 수 있는 매혹적인 철의 여인이라면 아무래도 고현정이 가장 어울린다. 사무실의 집기를 온통 이케아로 구비하면서 손님에게 보여지는 안락의자와 탁자만큼은 고급스러운 것을 고집하는 에리카의 실리주의와 융통성은 노골적으로 화려하지 않으면서 충분히 지적이고 그러면서도 아름다움과 섹시함을 놓치지 않는 고현정의 분위기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MBC 과 SBS 에서 그녀가 보여준 ‘여성인 동시에 장부’인 캐릭터는 그에 대한 근거다. 차선으로는 누님계의 ‘뉴클리어 밤’, 우리들의 에리카를 고려해 볼 수도 있겠다.
<밀레니엄>│한국판 <밀레니엄> 가상캐스팅
│한국판 <밀레니엄> 가상캐스팅" />드라간 아르만스키 – 신현준
“보안요원으로서 무인도에 내가 가져갈 것은 기린, 금연껌, 정준호면 충분하다.”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리스베트가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보안 업체 밀턴 시큐리티의 사장 드라간이 그녀의 영혼을 신뢰한 덕분이었다. 단순한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던 그녀의 진짜 능력을 간파한 드라간은 관습과 전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직관에 따른다. 그리고 그녀의 실력을 확인할수록 드라간은 욕망과 우정, 동경이 뒤섞인 감정에 사로잡히지만 좀처럼 이것을 규정하지 못한다. 본인은 알지 못하지만, 이것은 궁극적으로 모순된 존재간의 동질 의식이다. 고객들의 안전과 평안을 보장하면서 정작 본인은 ‘미국 갱 영화에 나오는 중간보스’처럼 생긴 그는 다양한 인종이 혼재된 사람이며, 말단에서 출발해 업체의 CEO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자신의 뿌리를 명쾌하게 정리할 수 없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에 부딪혀 온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예리하게 리스베트를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복잡한 심정을 숨기고 묵직한 카리스마로 금욕적인 표정을 만들어내는 드라간은 그런 점에서 신현준의 잠재력을 폭발시킬 수 있는 캐릭터다. 와 에서 보여준 그의 표정이 아직 남아 있다면 말이다. 게다가 이민자의 아들인 드라간은 스웨덴으로 편입되던 무렵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슬람계 문화에 속해 있었으며, 아랍계 혈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아랍인으로 인식되었다. 가짜 아랍인이라니, 더 이상 누구를 고려할 것인가.
<밀레니엄>│한국판 <밀레니엄> 가상캐스팅
│한국판 <밀레니엄> 가상캐스팅" />홀예르 팔름그렌 – 김태원
“그대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아름다움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런데, 혼자 왔냐?”

희망은 섬광처럼 오는 것이 아니다. 아동 정신병원에서 십대 시절을 내내 보낼 뻔한 리스베트가 만난 특별 관리인 홀예르는 처음으로 믿음의 대상이 된다. 그는 변호인으로서 유려한 언변으로 병원 억류에 관련한 리스베트의 재판을 승리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후견인으로서 리스베트의 법적 권리를 대리하며 보호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진심으로 리스베트를 걱정해 주었으며, 결국 그녀의 완전한 자유를 도와주고자 했다. 환갑이 넘어 뇌출혈로 쓰러지기 전까지 그는 리스베트와 매년 크리스마스 전야를 함께 보내는 사이였으며, 그녀와 세상을 무탈하게 이어주던 창구였다. 그리고 11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고서야 그들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고 신뢰하게 되었으며, 불가능할 줄 알았던 소통은 비로소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편견 없는 시선으로 희망의 싹이 자라는 시간을 기다려 줄 수 있는 인물로는 아무래도 김태원이 제격이다. MBC 으로 멘토의 자격을 입증한 그는 겉모습에 가려진 실체를 발견하는 연륜과 이것을 믿어주는 너른 품의 소유자다. 게다가 캐릭터에 비해 훨씬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늘 아슬아슬한 체력은 후에 요양원에 입원하게 되는 홀예르의 상태와도 맞아떨어진다. 좀 더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 리스베트를 이해해주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할머니 후견인’으로의 재해석을 시도해 보는 것도 가능하겠다.
<밀레니엄>│한국판 <밀레니엄> 가상캐스팅
│한국판 <밀레니엄> 가상캐스팅" />플레이그 – 최민식
“……” “어, 민식이냐?” “……” “민식아. 나의 우정 본드 민식이 아니야?”

온라인에서 리스베트는 자유롭다. 예절이나 관습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때, 그녀는 자신의 재량껏 원하는 정보를 탐닉한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가장 잘 알고 있는 플레이그는 그런 점에서 리스베트와 같은 종족의 인물이다. 세상이 사회적 무능력자로 판단한 그는 정부가 제공한 임대 아파트에서 장애인 연금으로 생활하지만,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는 상당한 능력자다. 그리고 리스베트는 물리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종종 플레이그를 개인적으로 고용한다. 주로 암호화된 메일로 연락을 취하고 리스베트가 일방적으로 찾아가는 방식이며, 개인적인 대화는 거의 나누지 않지만 그런 사무적인 태도 덕분에 두 사람은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189cm, 152kg에 육박하는 거구로 설정되어 있지만, 어두운 집에서 컴퓨터 모니터의 불빛만을 바라보며 생활하는 플레이그의 모습은 의 최민식을 연상시킨다. 무뚝뚝하고 경계심이 많으며 메일 주소에 XYZ이나 666을 삽입할 정도로 어두운 취향의 소유자라면 부스스한 헤어스타일과 덥수룩한 수염, 퀭한 눈의 최민식과 충분히 어울릴 것 같다. 무엇보다도 플레이그의 핵심은 리스베트의 유일한 친구라는 점. 모름지기 친구 이름은 입에 착 붙어야 하는 법인데, “민식이” 이상의 이름은 상상할 수 없다.

글. 윤희성 nine@
편집. 장경진 three@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