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5천만 독자를 뒤흔든 초대형 베스트셀러. 미국에서 매일 5만 부씩 팔리는 책, 덴마크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은 책, 스웨덴 인구의 1/3 이상과 노르웨이 인구의 1/5 이상이 읽은 책. 소설 시리즈 앞에 붙은 엄청난 수식어는 압도적인 플롯, 매력적인 캐릭터, 치밀한 현실 반영으로 구성된 대단한 원작을 영화로 만드는 이들의 어깨를 무겁게 했음이 자명하다. 2시간 반, 비슷한 러닝타임 속에 원작을 담아낸 스웨덴판 (이하 스웨덴판)과 할리우드판 (이하 할리우드판)은 각자의 방식으로 에피소드를 취사선택했다. 할리우드판은 원작을 충실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데이빗 핀처 감독 특유의 세련되고 정제된 연출에 힘입은 바가 크다. 스웨덴판은 원작을 일부 각색했지만, 오히려 핵심 사건의 무게감이나 특유의 음울하고 서늘한 정서는 더 밀도 있게 담아내 원작에의 존경심을 오롯이 드러낸다. 같은 원작으로 다른 나라에서 다른 배우와 제작진이 만들어낸 두 편의 의 닮은꼴과 다른 점을 살펴본 건 어느 쪽의 우월을 이야기하기 위함이 아니다. 더 강렬하거나 더 유려한, 원작 못지않은 매력을 지닌 두 영화를 즐기고자 하는 팬들을 위한 작은 팁이다.
*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밀레니엄>│비교체험! 스웨덴판 vs 할리우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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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판과 할리우드판은 영화의 첫 장을 여는 순간부터 확연히 다른 방식을 취한다. 이렇다 할 오프닝 타이틀 없이 단출한 크레딧에 이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스웨덴판과 달리 할리우드판은 데이빗 핀처 감독 특유의 오프닝 타이틀을 기대하는 관객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이미 , 등으로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압축하거나 순도 높게 증류해서 보여주는 것에 능한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장기를 발휘한다. 귀를 찢는 듯한 음악(원작에서 미카엘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주의 끝에서부터 온 흡혈귀들”이 내는듯한 사운드)에 악덕으로 짜낸 타르를 뒤집어쓴 듯한 리스베트와 미카엘의 강렬한 이미지는 새삼 그가 큰 반향을 일으킬만한 비주얼에 능했던 CF와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시작부터 강풍으로 휘몰아치는 할리우드판과 다르게 스웨덴판은 연쇄살인사건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도 극적 긴장감을 강조하기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자세를 취한다. 자세한 사건일지나 재현을 선택적으로 생략하는 할리우드판보다 살육의 현장을 충실하게 보여주면서도 건조한 시각을 유지한다. 역설적으로 시종일관 담담하게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게 현미경을 들이댄 스웨덴판이 한층 더 서늘하고, 데이빗 핀처의 깔때기를 통과한 할리우드판은 감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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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마시는 것이 국가적인 여가활동’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전 세계 커피 소비량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북유럽 국가들. 그 중에서도 2위를 차지한 스웨덴은 국민당 연간 평균 커피 소비량이 1117잔(2011년 기준)에 이른다. 이쯤 되면 물보다 더 자주 커피를 마신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텐데, 이것은 시리즈에서도 증명된다. 미카엘과 리스베트를 비롯해 원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손에서 커피를 놓지 않는다. 혈관 속에 커피가 흐를 것 같은 이들의 카페인 중독은 외부인인 데이빗 핀처 감독에 의해 더 부각된다. 스웨덴판에 비해 거의 2배에 이르는 빈도수로 등장하는 커피는 미카엘과 리스베트 사이에서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스웨덴이라는 공간적 배경 또한 손쉽게 대변한다. 모든 사건의 출발점인 헤데스타드 섬을 드러내는 방식 또한 차이를 보이는데 할리우드판에서는 “북극”으로 일컬어지면서 북유럽의 기후적인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눈보라에 휩싸인 방예르 가문의 대저택은 그곳이 미스터리를 감추고 있는 복마전임을 극적으로 암시한다. 반면 북유럽 출신의 닐스 아르덴 오플레브 감독이 묘사한 섬은 좀 더 현실적인 공간으로 다가온다. 비교적 맑은 날에 촬영된 섬 곳곳은 일반적으로 외부인이 상상하는 드라마틱한 북구의 백색 이미지라기보다는 특별히 공간적 배경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일상적이다. 결과적으로 외부인들이 원작을 읽으며 상상했던 춥고 무시무시하고 비밀스러운 스웨덴은 데이빗 핀처라는 외부인의 시선으로 엮은 할리우드판과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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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용을 비롯한 몸 곳곳의 문신과 얼굴의 피어싱, 사람을 벽처럼 대하는 반항적인 태도는 리스베트의 시그니처다. 화려하다 못해 파괴적이기까지 한 외양을 한 리스베트지만 그녀 안에는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한 연약함도 존재한다. 스웨덴판과 할리우드판 모두 이런 리스베트의 복잡 미묘함을 충분히 표현했다. 차이가 있다면 스웨덴판 리스베트가 더 공격적이고 이른바 ‘포스’가 강한 육식 동물의 느낌이라면, 할리우드판 리스베트는 그녀 안에 웅크리고 있는 불안한 소녀가 좀 더 부각된 초식동물 같다는 점. 문신도 스웨덴판에서는 리스베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요소인데 비해 할리우드판 리스베트에게는 패션 혹은 보호색 같은 느낌도 든다. 무엇보다 스웨덴판 리스베트는 ‘하리에트 사건’의 핵심 열쇠 중 하나인 암호를 먼저 풀어 미카엘에게 알려주며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주도적인 활약을 한다. 반면 할리우드판의 리스베트는 조력자에 가깝다. 눈을 치켜 뜬 리스베트가 혼자서도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내는 스웨덴판과 미카엘 뒤에 선 리스베트의 옆모습이 보이는 할리우드판의 포스터가 상징하듯이. 또한 스웨덴판에서는 리스베트의 과거와 그로 인한 트라우마가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이번에 개봉한 스웨덴판이 이미 원작 3부작이 모두 영화화된 시리즈의 1부로, 이어질 이야기의 도입부 성격을 띠는 것과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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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에서 미카엘은 리스베트와 비슷하거나 좀 더 주도적인 역할로 그려지는 1부와 달리 시리즈 후반으로 갈수록 리스베트의 조력자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1부를 충실히 옮긴 할리우드판이 미카엘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반면 스웨덴판에서는 미카엘의 캐릭터가 리스베트만큼 선명하지 않다. 물론 여기에는 할리우드판 미카엘을 맡은 다니엘 크레이그의 이름값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을 것이다. 할리우드판에서는 미카엘의 명성에 치명타를 입힌 ‘베네르스트룀 사건’과 이로 인해 그가 느끼는 치욕과 불안함에 대한 암시, 동료 에리카나 딸 같은 주변 인물과의 관계가 더 자세히 그려진다. 다만 두 영화 모두 강한 신념을 가진 정의로운 경제 기자로서의 얼굴 못지않게 여자를 좋아하고 자유로운 성관계에 거부감이 없는, 일견 바람둥이의 면모를 가진 미카엘을 충실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특히 에리카와 미카엘의 육체관계를 비교적 직접적으로 드러낸 할리우드판에 비해 스웨덴판의 미카엘은 사건 해결과 리스베트 외에는 특별히 욕망을 가진 존재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스웨덴판이 리스베트 쪽에 무게중심을 놓으며 미카엘의 의중을 충분히 드러내지 않은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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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판에서 리스베트를 연기한 노미 라파스는 할리우드판에서도 러브콜을 받을 만큼 리스베트 그 자체였다. 육식동물처럼 구현된 스웨덴판의 리스베트를 위해 온몸이 근육인데다 포효하는 목소리마저 위협적인 그녀 말고 누구를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에 비해 원작의 미카엘과 다소 거리가 있는 모습의 미카엘 뉘키비스트는 미카엘의 남성적인 매력을 강조하기보다는 기자로서의 풍모를 부각시킨다. 이성과 함께 있을 때보다 기사 쓰는 뒷모습이 훨씬 멋진 스웨덴 버전의 미카엘은 퇴근길의 아버지 같은 친근한 실루엣, 기사 쓰느라 며칠 밤을 샌 것 같은 혈색으로 ‘슈퍼 블롬크비스트’의 현실적인 버전이라 할 만하다. 할리우드판의 리스베트, 루니 마라는 노미의 리스베트와는 다른 매력으로 무장했다. 손에 쥐면 부서질 것 같은 초식동물적인 연약함은 가짜 신분인 이레네 네세르를 연기하는 리스베트 또한 매력적으로 연출했다. ‘여장’에 가까운 노미의 위장과 달리 루니의 위장은 그녀가 ‘화장’ 수준으로도 전형적인 북구의 금발 미녀 또한 자연스럽게 소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다니엘 크레이그의 미카엘은 어쩔 수 없이 종종 제임스 본드와 겹쳐보였다. 위기의 순간마다 악당 한두 명 정도는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은 액션배우의 아우라는 미카엘과 쉽게 연결되지 않지만 다니엘 크레이그 덕분에 할리우드판의 미카엘은 좀 더 잦은 노출로 눈을 즐겁게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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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의 캐릭터가 선명하지 않았던 스웨덴판과 리스베트가 비교적 연약하게 그려진 할리우드판의 차이는 두 사람의 역학관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리스베트와 미카엘은 사건을 해결하는 파트너인 동시에 육체관계도 가지는 사이다. 특히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에 서툴고 그다지 필요성도 느끼지 않던 리스베트에게 미카엘은 특별한 존재다. 사랑 혹은 연애 감정이라고 명확하게 얘기할 수 없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은 의 서브플롯이기도 한데 두 영화가 이를 다루는 방식은 다르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먼저 유혹하는 사람은 리스베트지만 스웨덴판에서 관계의 주도권을 리스베트가 쥐고 있는 반면, 할리우드판에서는 미카엘을 향한 리스베트의 마음이 좀 더 선명하게 그려진다. 스웨덴판에서 미카엘로 인해 과거의 트라우마를 떠올린 리스베트가 자신의 욕망을 위해 미카엘의 침실에 들어간다면, 할리우드판에서는 총상을 입고 괴로워하는 미카엘을 위해 리스베트가 다가가는 느낌을 준다. 첫 섹스를 한 뒤에도 스웨덴판에서는 미카엘이, 할리우드판에서는 리스베트가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그리고 스웨덴판 미카엘이 갑자기 사라진 리스베트를 적극적으로 기다리는 반면, 할리우드판에서는 에리카를 비롯한 일상으로 돌아간 미카엘의 뒷모습을 리스베트가 바라본다. 굳이 따지자면 스웨덴판에서는 미카엘이 할리우드판에서는 리스베트가 차인 셈이다.

글. 이지혜 seven@
글. 김희주 기자 fift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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