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의 1부를 영화화한 이 개봉한다. 데이빗 핀처라는 거장이 붙은 이 거대 프로젝트는, 하지만 태생적으로 커다란 핸디캡을 지니고 있다.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며 신드롬을 일으킨 원작과 끊임없이 비교되어야 한다는. 그만큼 시리즈는 정말 오랜만에 등장한 소설계의 블록버스터다. 과연 무엇이 이 소설을 여타의 추리소설과는 급이 다른 영광의 아레나에 오르게 했는가. 는 이미 국내에서도 상당수의 팬을 확보한 이 소설의 매력을 살펴보는 동시에, 한 주 차이로 개봉한 스웨덴 버전과 할리우드 버전 영화 중 둘 중 하나를 골라 보고 싶은 독자를 위해 두 작품을 비교체험 했다. 여기에 영화 가상 캐스팅과 의 설정이 현재의 한국에서라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낼지 질문해본 픽션은 원작 팬들의 즐거운 유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추리소설로 분류된다. 독일의 은 위대한 사회소설이라 했다. 하지만 구조로만 따진다면, 은 연애소설이다. 3부작 내내 계속되는 남자 주인공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의 화려한 여성 편력에 대한 이야기도, 1부 말미, 여주인공 리스베트 살란데르가 미카엘에 대해 느꼈던 연정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수수께끼를 푸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두 파트너가 경찰보다 몇 걸음 앞서 사건의 본질에 다가선다는 점에서는 추리소설에, 그들이 대결하는 것들이 종종 사회적 부조리라는 점에서는 사회소설에 가깝지만 적어도 출간된 3부까지의 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갈등은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쉽게 합치될 수 없는 가치관이 대립하고 일종의 ‘밀당’을 통해 화해하는 과정이다.

리스베트와 미카엘, 서로에게 너무 다른 짝패
<밀레니엄>│이것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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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에 대한 추천사를 쓴 바르가스 요사는 두 주인공을 기사문학의 주인공 아마디스나 돈키호테와 비견하며 ‘살란데르의 반항하는 얼굴은 부드러운 마음과 도덕심, 정의감을 감추고 있다’고 했다. 그가 에 불의와 악만 있다던 소설가 도나 레온의 칼럼에 대해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하겠다. 헛소리다. 그 둘은 아름다운 무훈을 남기고 칭송받는 기사문학의 전통과는 거리가 멀며, 리스베트는 더더욱 아니다. 리스베트는 오히려 사적인 분노로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실현하는 의 안티히어로 마브에 가깝다. 미카엘의 경우 분명 돈키호테지만 레이먼드 챈들러 소설 속 필립 말로 같은 고독한 기사로서가 아니라 선한 신념이 정의로운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의 소유자로서 그렇다. 하여 리스베트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뒷골 땅길 정도로 착한 인간이라 미카엘을 폄하하고, 미카엘은 리스베트의 정의를 동의할 수 없는 방식이라 말한다.

최근 영화로도 개봉한 은 두 세계관이 처음으로 부딪히는 순간이다. 주인공은 미카엘이고 리스베트는 사건 해결을 위한 조력자다. 소설의 처음은 부덕한 자본가 베네르스트룀의 음모에 빠진 미카엘을, 마지막은 베네르스트룀의 온갖 비리를 낱낱이 공개하며 승리하는 미카엘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해결한 가장 큰 사건이라 할, 마르틴 방예르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살인행각은 정작 은폐된다. 자신의 고용인이었던 헨리크 방예르의 부탁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것은 그의 고발을 통해 개선 가능한 종류의 사건이 아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자본가는 말하자면 규칙을 위반한 존재이자 시스템의 오류다. 그들이 규칙을 어겼다는 것만 밝혀낸다면 오류는 고쳐지고, 사회는 개선될 수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카엘과 잡지 의 믿음이다. 하지만 개선될 수 없는, 악마성 앞에서 이러한 낙관주의는 침몰한다. 미카엘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마르틴조차 나치 아버지의 희생양으로 해석하려 하지만 리스베트는 단언한다. ‘다 엿 같은 소리’이며 ‘모든 건 그의 선택이었을 뿐’이었노라고. ‘그저 여자들을 증오하는 쎄고 쎈 쓰레기일 뿐’이라고.

폭력의 악마성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밀레니엄>│이것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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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하게 반복되는 모티브가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라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민주주의와 복지가 잘 정착된 나라로 알려진 스웨덴 안에서도 존경받는 기업인 마르틴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여성들을 고문하고 죽이고, 리스베트의 아버지 살라첸코는 리스베트의 어머니를 시시때때로 학대했고, 리스베트의 후견인 닐스 비우르만 변호사는 그를 강간했으며, 미카엘의 동료 에리카 베르예르는 동창인 남자의 스토킹을 가장한 폭력 때문에 전전긍긍한다. 아버지 살라첸코의 행동을 ‘모든 악’이라 표현하는 리스베트의 규정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베네르스트룀의 비리가 어쨌든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싶다는 합리적 욕심에서 비롯된 비윤리적 행동이었다면, 소설에서 묘사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은 그 근원을 설명하기 어려운 악의 심연이다. 물론 그것만이 모든 악은 아닐 것이다. 다만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미워하고 깔보며 완력을 포함한 권력으로 억압하려는 폭력성이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분야인 건 사실이다. 의 챕터 사이 다음과 같은 문구는 그 폭력성 앞에서 잠재적 피해자로 살아야 하는 공포와 피곤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스웨덴 여성 중 46퍼센트가 남성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법적 무능력자 판정을 받은 리스베트도, 명문가 출신 언론인 에리카도. 나 영화 에서 그러하듯, 어떤 종류의 폭력은 오직 사적인 차원에서의 폭력을 통해서만 응징할 수 있다. 자신을 강간했던 비우르만의 몸에 치욕적 문신을 새겨 보복했던 리스베트는 2부 에서 아예 ‘모든 악’의 근원인 살라첸코를 없애기 위해 전면전을 벌인다. 여기서 1부의 주인공이었던 미카엘은 무기력한 조력자로 전락한다. 두 사람의 파트너십이 빛나던 1부에 비해 2부가 최종병기 리스베트의 원맨쇼로 진행되며 극의 재미가 반감된 건 그 때문이다.

3부이자 저자 스티그 라르손의 죽음으로 마지막 시리즈가 된 는 법정 드라마의 방식으로 두 사람의 윤리관이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지, 더 정확히는 이토록 매력적인 리스베트를 보편적인 법과 윤리의 틀 안에서 품을 수 없는지 모색한다. 살라첸코와 연관이 있는 국가 비밀조직이 주축이 되어 리스베트를 정신병원에 가둘 목적으로 진행된 재판에서 미카엘은 헌법수호부의 사람들과 함께 상대방의 비리에 대한 증거를 모으는 동시에 형사 전문 변호사 대신 여성 인권 변호사인 동생 안니카를 부른다. 그들은 국가가 방조한 남성들의 폭력이 얼마나 리스베트의 천부적 인권을 짓밟아왔는지 이야기하고, 따라서 리스베트가 행하려던 심판은 정상참작 가능한 잘못이 아니라 실천적 정의였노라 항변한다. 말하자면 사적 복수를 사법 시스템 안에서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재판이 끝난 후 미카엘은 안니카에게 말한다. ‘이 이야기의 중심주제는 어떤 스파이나 비밀 조직, 그런 것이 아니야. 이건 여성에게 자행되는 일상적인 폭력,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남자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이것은 또한 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수시로 자행되는 일상적 폭력의 악마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론 치안과 계몽으로 그 근원을 뿌리 뽑는 건 불가능할지 모른다. 대신 리스베트가 미카엘에게 자기 집 문을 열어주는 3부 마지막 장면처럼, 선량한 진심들이 구애하듯 피해자의 마음에 노크를 하고 네가 틀린 게 아니니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답을 찾아보자고 요청하는 것만이 폭력 없이 폭력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과연, 이것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무엇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겠는가.

글. 위근우 기자 eight@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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