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꽃비│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남긴 영화들
김꽃비│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남긴 영화들
김꽃비를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 하나. 영화 에서 용역 깡패 상훈(양익준)에게 따귀를 맞으면서도 절대 시선을 피하지 않던 여고생 연희(김꽃비)의 날선 눈빛이 그것이다. 그저 어른에게 반항하는 사춘기의 치기가 아닌, 자기 앞에 놓인 부조리에 당당히 맞서는 강단이 그 눈빛에는 있었다. 그리고 날 서진 않았지만 그 못지않은 강단을 우리는 작년 제 16회 부산국제영화제의 레드카펫 위에 한진중공업 작업복을 걸치고 등장한 그에게서 다시 한 번 발견했다. “대단한 일이 아니었어요.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었거든요.” 열혈 투사의 씩씩한 목소리보다는 겸연쩍어하는 말투. 개개인이 느끼는 추위나 더위와는 상관없이 “동복이나 하복을 입는 기간까지 교칙으로 정해놓아야 하는” 걸 이해할 수 없어 학교 측에 문제제기를 했던 “조용했지만 자기주장이 강했던” 학생의 허세 없는 굳은 심지가 배우로서의 그에게도 깊게 뿌리박혔음을 알 수 있다.

작품을 고를 때도 스스로 납득할 수 있어야만 할 수 있다는 태도도 그렇다. “같이 일하는 회사가 있지만 의사결정이나 작품 결정은 거의 제 마음이에요. 항상 가능성을 열어놓고 여러 가지 작업을 제가 많이 주도하는 편이죠.” 로 스페인, 프랑스에서 열린 국제영화제를 다니며 만난 영화계 사람들과 친분을 이어갔고, 그렇게 만난 세계 각지의 감독들이 직접 시나리오를 보내왔다. 현재 그는 “아직 한국어로 된 시나리오도 받지 못”했지만 일본 감독에게 받은 범죄스릴러 시나리오가 맘에 들어 작품을 준비 중이다. 또 다른 일본 영화와 프랑스 영화 두 작품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곧게 자리 잡은 심지를 기준으로 자신이 할 일을 스크린에서 레드카펫으로 넓혀가던 그는 이런 작업에 대해서도 “해외로 나가는”게 아니라 “서 있고 있는 땅을 조금 넓힌 것”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이 배우는 본인이 행동하는 것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잘 여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녀가 말하는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남기는 영화 다섯 편.
김꽃비│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남긴 영화들
김꽃비│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남긴 영화들
1. (Dancer in the Dark)
2000년 | 라스 폰 트리에
“엔딩이 너무 강렬하고, 충격적이잖아요. 중학교 때 비디오를 빌려서 안방에서 혼자 봤어요. 아직까지 기억이 나는 게 셀마(비요크)가 마지막을 맞이하는 순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 순간에 온 우주의 고독과 외로움이 너무 크게 느껴지면서 괴로웠어요. 그 외로움을 혼자 감당할 수가 없어서 막 눈물이 나더라고요. 지금도 너무 좋아하는 영화라 가끔씩 보는데 OST도 비요크가 노래하는 목소리며 표정이며 그냥 다 좋았던 것 같아요.”

셀마가 겪는 비극의 끝은 어디일까. 셀마는 시력을 잃어가는 아들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공장에서 밤낮없이 일하지만, 그녀의 돈을 훔쳐간 이웃남자 빌과의 다툼 끝에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순간, 재판장을 스케치 하는 연필 소리, 감옥 독방의 환풍구에서 나는 바람소리가 반주로 변하고, 셀마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뮤지컬이 된다. 셀마는 그 속에서 누구보다 아름답고, 또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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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Josee, The Tiger And The Fish)
2003년 | 이누도 잇신
“할머니가 주워온 은색 가발을 쓰고 책을 읽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보통은 장애가 있는 캐릭터를 표현할 때는 그 장애 때문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을 다루잖아요. 근데 이 영화에서 조제(이케와츠 치츠루)는 그냥 한 인격체로서 다리가 불편한 정도로만 표현되는 게 좋았어요. 또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도 각자 매력이 있고 개성이 있다는 걸 보여준 현실적인 캐릭터인 것 같아요. 특히 이케와츠 치즈루가 연기를 정말 잘했잖아요. 그래도 저도 조제 같은 캐릭터를 너무 해보고 싶어요.”

할머니가 주워온 누군가의 교과서, 헌책들 속의 세상이 전부였던 조제가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를 만나 세상 밖으로 걸음을 떼는 성장 이야기. 누구에게도 도움받길 원하지 않았던 조제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가장 무서운 걸 보고 싶었다”며 츠네오의 손을 잡고 동물원의 호랑이를 본다. 물고기가 처음 바다를 만난 듯 세상을 유영하던 조제는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굴러다니”더라도 괜찮다는 말로 이별의 순간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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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년 | 미셸 공드리
“꿈속에 누군가 나오는데 미완성인 상태일 때, 시각적이 아니라 감각적인 어떤 캐릭터가 있다고 느낄 때 있잖아요. 얼굴이 뭉개지고 잘 안 보이기도 하는 환상적인 장면을 영화로 표현해냈다는 게 충격이었어요. 그리고 조엘(짐 캐리)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이 서로의 기억을 지운다고 해도 결국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잖아요. 결국 내가 사랑에 빠지는 타입의 사람이 서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에 공감이 갔어요. 참,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침대에서 깼는데, 바다 위 모래사장이었던 장면! 너무 좋았어요.”

첫 눈에 반했고, 서로 사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같은 점보다는 다른 점을 먼저 생각하게 된 조엘과 클레멘타인. 그들은 다툼 끝에 헤어지고, 서로에 대한 기억이 자신을 아프게 할 때 즈음 서로의 기억을 뇌에서 삭제하기로 한다. 조엘은 그녀와의 기억을 떠올릴수록 그것이 단순한 ‘기억’이 아닌 소중한 감정이 담긴 ‘추억’임을 깨닫는다. 소중한 추억을 함께 한 누군가를 꼭 껴안아 주고 싶게 만드는 영화.
김꽃비│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남긴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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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秒速 5センチメ-トル)
2007년 | 신카이 마코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요. 는 좀 순수한 느낌이에요. 추천한 다른 영화들과는 색깔이 조금 다른데 로 시작해 시간이 흘러서 으로 가는 건 아닐까요? 에서 이 됐다가 이 되는 지점인 것 같기도 하고요.”

‘첫사랑은 이뤄질 수 없다’는 문장은 구태의연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순수하던 한 시절의 봄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첫사랑은 서툴고, 아련하다.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인 초속 5cm만큼 아카리와 타카키는 서로에게 다가가지만, 이사를 가면서 도달해야 할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고 결국 이뤄지지 못한 사랑으로 남는다. 아카리와 타카키가 흐드러진 벚꽃 나무 밑을 걸어가는 장면은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김꽃비│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남긴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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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Rocky Horror Picture Show)
1975년 | 짐 셔먼
“‘타임워프’에 맞춰 춤추는 장면이 가장 재밌어요. 뮤지컬도 봤고, 영국에 있을 때 단체 상영을 한다고 해서 갔는데, 거기 온 사람들이 다 코스튬을 입고 온 거예요. 저도 나름 있는 대로 은색 가발 쓰고 컬러풀하게 화장 하고 갔는데 다들 정말 똑같이 입고 왔더라고요. 큰 극장에서 영화 보면서 노래도 같이 따라 부르고 프랭크 박사(팀 커리)가 고무장갑을 끼면 똑같이 끼고. 영화 사운드랑 맞춰서 고무장갑을 끼면서 ‘탁!’소리를 내고 같이 즐기는데 너무 재밌었어요.”

정체불명의 괴수들처럼 미친 듯이 놀아보고 싶다면, 다른 선택은 필요 없다. 그저 ‘타임워프’ 노래에 맞춰 허리에 손을 얹고, 무릎을 붙인 채 앞뒤로 흔들면 그게 일탈 아닐까. 프랭크 박사(팀 커리)와 자네트(수잔 서랜든), 브래드(베리 보스트윅)가 하나의 에너지를 갖고 노래하는 순간, 기괴하고 특이한 성에 초대 받은 관객들은 영화 속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된다. “꿈만 꾸지 말고 실행하라, 네 심장이 춤추고 피가 노래하리! 다함께 춤추자.”
김꽃비│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남긴 영화들
김꽃비│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남긴 영화들
김꽃비는 연기를 신체 조직의 움직임과 비교했다. “우리의 신진대사가 모두 자신의 의지로 수축시킬 수 있는 근육인 ‘수의근’이 아니잖아요. 연기도 그런 것 같아요.” 하여 ‘어떻게 연기를 했는지’를 묻는 것 자체가 의지로는 움직일 수 없는 ‘불수의근’을 움직여 보라는 것과 같다. 다만 뜻대로 변신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영역 안에서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김꽃비라는 잘 여문 개인의 모습이 어떻게 캐릭터 안에 스미는지 확인하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느껴지는 걸 바로 연기한” 의 강지우 캐릭터처럼. “낯선 느낌이 너한테는 없다”며 만나던 남자를 떠나 동성인 윤지우(김효진)으로 향하는 그 태도에서 주위의 시선보단 스스로의 기준이 중요한 김꽃비를 느끼기란 어렵지 않다. 그래서 그의 좋은 연기를 보고 싶은 만큼 그가 지금 같은 강단을 지키길 바라게 된다. 아마 그건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일 테니까.

글. 박소정 기자 nineteen@
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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