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 “먼저 일어난 새는 조금 외로운 걸 영화보다 더한 사건들도 매일 진짜로 일어나 내 주위 친구들보다 먼저 어른이 돼야 하지만 누구보다 어린 걸 나중에야 알게 돼”
– 보아, ‘Copy & Paste’
보아
보아
성영자: 보아의 어머니. 보아가 다섯 살 때부터 노래방 기계로 노래를 부르고, 빔 프로젝트를 통해 큰 화면으로 가수들의 영상을 보게 했고, 춤을 좋아하는 둘째 아들 권순훤이 방에서 헤드스핀을 해도 그대로 놔두었다. 현재 권순욱은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첫째 권순훤은 서울대 졸업 후 피아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자식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너의 능동적인 마음과 자세”라고 말하던 교육 방식이 좋은 결과를 낳은 셈. 보아의 부모는 아이들이 음악을 좋아하자 마음껏 노래하고 연주할 수 있도록 남양주로 집을 옮기기도 했고, 보아는 노래, 춤, 가야금 연주 등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복했던 집은 갑자기 가세가 기울었고, 그는 머리를 감으면 곧 머리카락이 얼만큼 난방이 안 되는 집에서 살아야 했다.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가 백화점 축제에서 춤을 추던 보아를 보고 오디션을 제안, 연습생으로 선발한 것은 그 이후다. 부모는 보아가 어린 나이에 연예인이 되는 것을 반대했지만, 그는 “내 선택을 믿어줘. 실망시키지 않을게”라는 말을 하고 SM에 들어간다.

이수만: SM의 오너. 보아를 10대 초반의 나이에 한국과 일본에 데뷔 시켰다. 보아가 일본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언어, 노래, 춤 등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이 때문에 데뷔 초 보아의 성공이 그 자신보다 SM의 역량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보아는 매일 남양주와 서울 강남에 있는 SM 사옥을 오가며 평일 5시간, 휴일 10시간 연습을 했다. 학교 숙제는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하기 일쑤였고, 일본 데뷔 후에는 한국과 일본을 1년에 60여회 오갔으며, “노래 연습을 하며 방송국에서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연습실에서 매일 울었다. 보아에게 투자를 한 것은 SM이었지만, 10대 초반의 나이에 “부모님을 만나고 싶다고 울어봤자 다음 날 눈이 붓는 것 뿐 아무 것도 바뀌지 않으니까”라며 의지를 다지던 보아의 정신력이 없었다면 성공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보아가 일본에서 가장 먼저 외운 한자는 ‘루(淚, 눈물)’였다.

m-flo: 프로듀서 타쿠와 래퍼 버발로 구성된 팀. 보아와 ‘Love bug’, ‘Bump Bump!’ 등을 만들었다. ‘Love bug’은 보아가 ‘Listen to my heart’‘Valenti’ 등으로 일본 정상에 섰던 시절 발표, 보아의 장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린 나이와 귀여운 외모는 아이돌에 어울리지만, 격렬한 춤과 노래를 라이브로 소화하는 능력과 타고난 박자 감각은 뮤지션으로도 완성됐었다. 에이벡스의 요다 다츠미 당시 회장이 보아의 데뷔 당시 “카리스마와 댄스동작, 가창력을 지녀 J-POP의 여왕 아무로 나미에를 능가할 것”이라 말한 대로 보아는 ‘Listen to my heart’ 이후 2집 < Valenti >로 100만장 이상을 판매했다. 오리콘 사의 부사장 슈코우 코이케가 “일본 음악 역사상 J-POP을 불러 가장 성공한 외국인 아티스트”라 말하고, 일본 언론에서 “가창력, 댄스, 센스, 미모 등 무한대의 가능성을 지닌 가희(歌姬)”라고 극찬한 소녀의 탄생. 그러나 보아는 자신에 대해 “걸어 다니는 중소기업”이라는 식으로 경제적 가치만 강조하자 “나는 가수인데, 음악적인 것은 잘 안 묻는다. 돈 벌려고 시작한 건 아니었는데….”라고 말했다.

윤상: 보아와 ‘The show must go on’, ‘그럴 수 있겠지’, ‘안개’ 등을 함께 작업한 뮤지션. 이 곡들은 우울하다 싶을 만큼 가라앉은 감정으로 노래하는 보아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보아는 데뷔 전부터 안티팬과 끊임없는 언론의 관심에 시달렸다. 보아의 첫 일본어 작사 곡인 ‘Moon & sunrise’는 ” 크리스마스이브에 일본에서 아무도 만날 사람이 없을 때” 탄생했고, 그가 “미국에 가서도 일본에 있을 때도 한국에 있을 때도 늘 외롭다”고 말하는 이유. 이 때문인지 보아는 시간이 지날수록 ‘Winter love’, ‘Everlasting’, ‘Jewel song’, ‘메리크리’ 등 발라드 곡에서 강점을 발휘했다. 또한 춤을 추지 않은 채 목소리에만 집중한 공연 < Boa The Live >를 열만큼 보컬리스트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 소녀의 가녀린 음색으로 슬픔을 담담하게 넘기는 듯한 특유의 감정처리는 언제 들어도 애잔함을 전달한다. 개인의 슬픔과 고통이 좋은 음악을 만들어내는 아이러니. 정말, Show must go on.

켄지: 보아의 ‘My name’의 작곡가. 보아는 이수만에게 직접 이메일을 보내 ‘My name’을 타이틀로 해야 할 이유를 적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No.1’에 끊임없는 노력과 고통을 견뎌내는 정신력으로 성공한 소녀의 절실함이 담겨 있었다면 ‘My name’은 10대의 나이에 정상에 오른 소녀가 찾아야 할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줬다. 전에 없이 격렬한 퍼포먼스와 가사마다 창법을 달리하고, 리듬을 절묘하게 가지고 노는 보아의 노래는 그를 ‘걸어 다니는 중소기업’이 아니라 뛰어난 보컬리스트이자 퍼포머로 공인받게 만드는 시작점이 됐다. ‘My name’ 이후 보아의 인기는 한국과 일본에서 예전만큼 뜨겁지는 않았다. 또한 보아는 데뷔 후 10년 간 리믹스 버전 포함 400여곡을 발표했다. 누구라도 지치고, 목표를 잃을 법한 시기. 보아가 그래도 계속 버틸 수 있었던 건 결국 노래와 춤에 대한 열망 때문은 아니었을까.

션 가렛: 프로듀서. 보아의 미국 진출 곡인 ‘I did it for love’를 함께 작업했다. 보아의 첫 미국 앨범은 빌보드 앨범차트 127위를 기록했다. 한일 양국에서 최고였던 보아에게 만족스럽지는 않을 성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아는 몇 년째 공연과 녹음이 이어지는 스케줄에 지쳐 “마냥 놀기 위해” 유학을 고려할 정도였다. 그 때 미국 진출은 보아에게 새로운 돌파구가 됐다. 미국의 작은 클럽을 돌아다니며 홍보를 하는 것은 새로운 자극이 됐고, 미국 안무가와의 작업은 스스로 “스텝으로 놀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춤에 새롭게 눈뜨게 했다. 보아는 미국 작업 이후 사람들이 자신을 “아이돌을 바라보는 느낌”에서 “음악이 더 좋다고 더 많이 봐주게 됐다”고 느꼈고, “음악 하는 즐거움”을 되찾았다. 20대 초반에, 보아는 대중의 인기가 아닌 자신의 이상적인 무대를 위해 전력을 다할 육체적, 정신적 기반을 마련했다.

마이클 잭슨: 보아가 “내 영웅”이라고 말한 인류 최고의 팝 퍼포머. 보아는 단지 마이클 잭슨을 존경할 뿐만 아니라 마이클 잭슨이 보여주던 정교한 움직임, 댄서들과 함께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내는 군무 등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다. 특히 2008년 일본 < Face tour >의 ‘Bad drive’ 무대는 보아가 에만 집중했을 때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보여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테크닉 적으로 어려운 동작들을 정확하고 깔끔하게 소화해낼 뿐만 아니라, 그 동작들이 결국 전체적인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뮤직비디오 감독 조셉 칸은 “세계적인 어떤 스타들과 비교해도 보아만큼 퍼포먼스를 잘 해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했고,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마티 프리드먼은 일본에서 쓴 칼럼을 통해 보아의 곡 ‘Lose your mind’에 대해 “전성기의 마이클 잭슨이 떠오른다. 흑인도 무색할 정도로 펑키의 느낌이 살아있다”고 했다. 모두가 아이돌 스타인줄 알았던 소녀가 알고 보니 춤과 노래에 정진하는 예술가였음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김희철: 보아가 가장 친하게 지내는 연예인 중 한 명. 보아는 한국에서 5년 만에 발표한 ‘허리케인 비너스’ 이후 김희철을 비롯, 많은 연예인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 미, 일을 오가며 늘 혼자인 것 같았던 그가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준 셈.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와 활동한 보아는 중 3 때 데뷔한 샤이니의 태민을 “왜 이렇게 어리지”라고 생각했다. 또한 보아를 롤모델 삼던 효연이 소속된 소녀시대는 보아에 이어 일본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그리고 보아는 그 시간동안 악플에도 “내가 싫은데 리플 남겨주실 필요까지야”라고 웃게 됐고, “한 때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버릇”도 있었지만 이제는 “너무 사람을 쪼이면 피곤하다”는 마음도 갖게 됐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사춘기를 노래와 맞바꿔도 좋았을 만큼” 치열하게 살았고, 자신의 위치가 “평생 영원한 건 아니”라는 걸 자각하며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도전”하길 바란다. 보아는 다른 이들이 평생 얻기 어려운 성공을 10대 시절 경험했고, 그 과정 속에서 한 분야에서 치열한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철학과 인생관을 얻었다. ‘허리케인 비너스’가 수록된 6집 앨범에서 보아의 보컬은 애써 지르지도, 듣는 이를 의도적으로 슬픔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대신 힘을 빼고 자신만이 가진, 애잔함이 담겨 있는 여성의 목소리로 적당히 리듬을 타면서 모든 감정들을 표현한다. 10년의 활동 속에서 더 깊게 나아가는 뮤지션. 그리고 보아는 올해 스물여섯이다.

양현석/박진영: SBS 의 ‘K팝 스타’의 심사위원들. 보아는 ‘K팝 스타’의 가장 어리고, 유일한 여자 심사위원이다. 하지만 때론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두 남자들과 달리 보아는 늘 침착하게 출연자들의 장단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원포인트 레슨을 해주며, 무대 위에서의 자세에 대해 조언하는 동시에 출연자들의 무대를 적극적으로 즐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출연자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특유의 미소는 도저히 그 나이대에서는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여유가 담겨 있다. 그건 소속사의 트레이닝을 받으며 스타가 됐고, 성공 후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하나씩 깨달아간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표정이다. 그리고 ‘K팝 스타’가 방송될수록 증명되는 건 그 뛰어난 재능을 가진 출연자들 중 누구도 보아처럼 춤, 노래, 외모를 모두 가진 경우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설사 그런 출연자가 나온다 해도 보아처럼 “자기 이름을 내걸고 일한다는 것”이 곧 어른이 된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 자신의 일에 대해 고민할지는 미지수다. 기획사의 트레이닝과 마케팅을 통해 탄생한 스타가 춤과 노래에 대한 정진을 통해 정신과 몸 모두 어느 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었다. 가족은 모두 각자의 길에서 행복을 찾고 있고, 부와 명예는 누릴 만큼 누려봤으며, 퍼포머로서의 능력은 이제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그리고 데뷔 20년째에도 보아의 나이는 30대 중반일 것이다. 이 어린 장인이 정말로 빛나는 시절은 지난 10년이 아니라 앞으로의 10년은 아닐까.

Who is next
보아와 같은 소속사인 동방신기의 유노윤호와 의 ‘키스 앤 크라이’에 함께 출연한 김병만

글. 강명석 기자 two@

10 Line list
김정은윤종신김종국최지우휘성박찬호이효리장서희최양락다니엘 헤니이수근권상우소지섭이민호최명길정형돈김남주박진영손담비김태원신해철송강호김아중김옥빈이경규김혜자고현정원빈이승기닉쿤지진희박명수김혜수신동엽현빈윤은혜G드래곤하지원타블로김C유승호양현석강호동김태희김연아장동건장근석김병욱 감독정준하손석희정보석고수이병헌이수만김현중김신영장혁김수로이선균신정환김태호 PD강동원송일국노홍철조권김제동문근영손예진김수현 작가하하이미숙전도연유영진강지환김구라박지성탁재훈오연수최민수유재석유진크리스토퍼 놀란이하늘신민아장미희이휘재믹키유천조영남송승헌엄태웅안내상이승철김성근 감독유아인토니 안류승범싸이윤상현김희철심형래정우성하정우진중권박신양배용준임성한 작가MC몽나탈리 포트만김희애이소라염정아김건모유세윤양준혁임재범이지아차승원박정현김수미성유리윤계상정재형김범수김여진에릭김선아테디최강희김영철인순이박영규박원순[iLine] 스티브 잡스한석규수애유희열윤미래신하균김어준주병진오다기리 죠 – 보아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