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진│생각 날 때면 편하게 다시 꺼내본 영화들
이정진│생각 날 때면 편하게 다시 꺼내본 영화들
“아직까지도 대표작이 인 이정진입니다.” 이정진은 최근 영화 의 언론시사에 앞서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물론 이후에도 그는 다양한 작품들에서 제 몫을 했다. 에서는 할머니들의 몸빼를 입고 모델 출신의 비주얼을 배반하는 웃음을 줬고, 드라마 에서도 겉보기엔 완벽한 매력남, 알고 보면 허술한 ‘똥모양’ 변형태로 반전의 재미를 줬다. 같이 사는 여자친구의 악행을 일일이 메모하고, 여자와 육탄전도 불사하는 형태는 ‘찌질이’가 될 수도 있었지만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어깨를 가졌기에 많은 여성들의 ‘바람직한 녀석’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의 우식은 배우 이정진을 말할 때 누구보다 중요한 이름이었다. 싸우기도 전에 말만으로 상대방의 기를 꺾어놓는 내공의 우식은 거침이 없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때도, 라이벌과의 대결에서 패해 학교를 떠났을 때도. 그래서 두 남자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던 은주(한가인)가 다감한 모범생 현수(권상우) 대신 카리스마 넘치는 우식을 택했던 것처럼 이정진을 떠올릴 때 정문고 짱의 아우라가 늘 앞섰다.

하지만 이정진은 더 이상 비스듬히 쓴 교모 너머로 세상을 노려보는 치기 어린 수컷이 아니다. “앞으로 를 대체하는 대표작이 될” 에서 그는 나팔바지 교복으로 서열 1위의 위엄을 과시했던 우식처럼 여전히 쭉 뻗은 다리를 살려주는 멋들어진 수트 차림이다. 그러나 자신이 설계해둔 상황 안에서 태식(설경구)이 고군분투 할 동안 우아하게 전화로 지시를 내리고, 모두에게 친절한 가면을 쓴 필호의 미소는 이정진에게서 보지 못했던 종류의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악인의 얼굴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필호 또한 흥미로운 악역이다. “이미 세계적인 수준의 할리우드 영화와 미드를 접한 관객들의 눈은 굉장히 높아요. 게다가 수없이 다양한 악역들이 있었고, 센 걸로 치자면 거의 다 나왔다고 봐요. 그래서 다른 쪽, 더 착하고 친절하고 절제된 인물로 가보려고 했죠.” 실제로 이정진 역시 1300여장에 달하는 DVD를 모을 정도로 영화라면 가리지 않고 보는 열혈 관객이다. DVD 서플먼트를 통해 영화의 제작 과정을 알게 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좋아하는 영화에는 감독이나 배우의 싸인을 직접 받아 간직하는 그가 생각 날 때면 언제든 편하게 다시 꺼내본 영화들을 소개한다.
이정진│생각 날 때면 편하게 다시 꺼내본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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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fernal Affairs)
2002년 | 맥조휘, 유위강
“일단 비주얼적으로 유덕화의 수트 포스가 대단했어요. 실제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정말 멋있었고, 거기에 양조위의 연기까지!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스타 배우들이 로 리메이크하기도 했죠. 물론 스케일은 할리우드의 것이 더 크고 화려할 순 있어도 말하지 않고 검은 눈동자로 모든 것을 보여주는 건 의 양조위가 훨씬 더 뛰어난 것 같아요.”

유덕화와 양조위만으로도 를 봐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페트병에 담긴 홍차조차 기품 있게 마시고, 자신이 입고 있는 수트처럼 빈틈없는 경찰 유건명(유덕화). 늘 정체가 탄로 날까 두렵고, 단 한 번도 마음 편히 잠든 적이 없는 조직원 진영인(양조위). 원래 각각 조직원과 경찰이었던 이들의 잠입 임무는 두 사람의 운명 자체를 바꾸어 놓는다.
이정진│생각 날 때면 편하게 다시 꺼내본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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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e Notebook)
2004년 | 닉 카사베츠
“멜로 영화를 좋아하는 게 의외라고요? 저 평소에 멜로 영화도 많이 보고, 처럼 감동적인 영화도 좋아해요. 특히 은 정말로 많이 본 영화예요. 물론 보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죠. (웃음) 죽을 때까지 서로를 잊지 못하는 두 사람의 사랑이… 슬프지 않나요?”

흔히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서 더 아름답다고들 한다. 이루어지지 않는 대신 영원히 흠결 없는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여자를 평생 현재 진행형으로 사랑한 남자가 있다. 설사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영화는 지고지순한 순애보로 관객들의 눈물샘을 효과적으로 공격한다.
이정진│생각 날 때면 편하게 다시 꺼내본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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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Flash Point)
2007년 | 엽위신
“최근엔 액션 영화를 많이 찾아 봤어요. 지금 찍고 있는 드라마 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특히 은 , 같은 영화들과 함께 인상이 깊었어요. 물론 예전에도 봤지만 에서의 역할이 경찰이고 마카오나 중국 등지에서 촬영을 하다 보니까 좀 더 와 닿는 느낌이죠. 아, 견자단을 만났을 때는 DVD에 싸인을 받기도 했어요. (웃음)”

오랫동안 침체기에 빠져있던 홍콩 영화계에 활력을 불어넣은 은 철저히 홍콩 영화의 정석을 따른다. 정의로운 형사가 악랄한 악당 형제들을 벌하는 스토리는 새롭지 않지만 성룡, 주성치와 함께 홍콩 영화를 거론할 때 빠질 수 없는 액션스타 견자단의 매력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이정진│생각 날 때면 편하게 다시 꺼내본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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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On Golden Pond)
1981년 | 마크 라이델
“일단 DVD 케이스가 너무 예뻐요. (웃음) 아버지와 자식 간의 트러블을 다룬, 가족영화의 모범답안 같은 영화예요. 예전에는 정말 대단했지만 이제는 늙어버린 아버지와 그럼에도 여전히 고집붙통인 아버지가 못마땅한 딸이 결국엔 서로의 진심을 알아간다는, 어떻게 보면 뻔할 수도 있는 내용인데 참 좋았어요.”

아버지와 딸은 아버지와 아들만큼이나 가깝지만 먼 관계다. 특히나 첼시(제인 폰다)처럼 엄한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반감으로 커진 경우라면 더더욱. 그러나 세월은 이들에게 서로를 한 인간으로 이해하게 되는 순간을 선물한다. 실제 부녀지간인 헨리 폰다와 제인 폰다가 열연했고, 제 5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나란히 남녀주연상을 수상했다.
이정진│생각 날 때면 편하게 다시 꺼내본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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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he Patriot)
2000년 | 롤랜드 에머리히
“멜 깁슨의 영화중에서 상도 많이 받고 가장 유명한 를 많이 말씀하시는데 저는 가 더 좋았어요. 멜 깁슨이 가장 멋있게 보이기도 했구요. 절대로 싸우지 않겠다던 남자가 자식들이 위험에 처하니까 도끼를 꺼내잖아요. 그 부성애가 정말 대단했죠.”

때로는 허망한 대의보다도 가족을 지켜내는 것 자체가 더 숭고하다. 의 벤자민(멜 깁슨)처럼. 전쟁에서 두려울 것이 없던 영웅을 움직인 것은 혁명도 명예도 아니었다. 그저 내 아이들을 지켜내겠다는 부성이었다. 영화에서 벤자민의 아들로 등장하는 히스 레저의 풋풋했던 시절도 볼 수 있다.
이정진│생각 날 때면 편하게 다시 꺼내본 영화들
이정진│생각 날 때면 편하게 다시 꺼내본 영화들
이정진은 현재 마카오와 중국을 오가며 드라마 촬영에 한창이다. “중국은 한 낮에 촬영하다보면 기온이 42도까지 올라가요. 그러다 보니까 배우들은 전부 다 새까맣게 타고. 최근에 (정)지훈이랑 곽정환 감독님의 전작 를 다시 봤는데 시청자 입장에서 볼 때랑 다른 게 보이더라구요. 전에는 ‘와, (장)혁이 형 몸 정말 잘 만들었네’ 이랬다면 이제는 ‘어우 저 어깨 좀 봐, 얼마나 땡볕에서 찍었으면 저렇게 시뻘게’ 이러면서 동병상련이 되더라구요. (웃음) 물론 그만큼 이번에도 눈이 즐거울 것 같아요. 에 비해 무겁지도 않고 코믹한 요소도 많구요. 기대가 큽니다.”

이정진은 마카오에서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일을 시작했고, 의 홍보 활동이 끝나자마자 예능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 촬영도 해야한다. 그는 “오히려 집이 낯설 정도”로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일할 때는 뭔지 모르는 에너지가 나온다”고 한다. 설사 끝내고 쓰러질 지언정. 피곤에 지친 얼굴이다가도 새로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금세 활기를 되찾는 그를 보면 그 정체 모를 에너지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10년을 해도 잘 몰라서 더 매력적인” 배우의 길을 걷는데 지치지 않게 할 피로회복제가 될 것이다.

글. 이지혜 seven@
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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