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선 보러 나온 동네 노총각 같은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 성동일이 나타났다. “지지난 주에 촬영 마친 때문에 머리가 요렇습니다. 심혜진 씨랑 연인 관계로 나오는데, 심혜진 씨는 예전에 코카콜라 모델도 하신 그런 분이라 나는 조오타고 찍었지만 영화 다 찍을 때까지 손 한 번 못 잡아봤어요. 푸흐-” 그리 특별할 것 없는 몇 마디 말과 슬쩍 비추는 미소만으로도 그는 상대를 웃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사람이다. 낯가림이 있는 배우라면 그보다 더 곤욕이 없을 영화 제작발표회에서 카메라 플래시 세례만 퍼부어대는 기자들을 향해 “정 질문이 없으시면 몇 년생이냐 던지 이 영화를 통해 얼마를 벌고 싶으냐 던지 등을 물으셔도 좋겠습니다. 거, 계속 카메라로 눈을 용접하고 있으니까 죽겠네요-”라며 천연덕스레 분위기를 녹이는 배짱은 좌중을 압도한다.

4회 단역을 신 스틸러로 만든 그만의 노력
성동일│고맙다. 덕분에 웃고 산다. 덕분에, 울고 산다
성동일│고맙다. 덕분에 웃고 산다. 덕분에, 울고 산다


그래서 가까이 들여다 본 성동일의 얼굴이 어딘가 나이 든 호랑이를 연상케 하는 것은 반쯤 놀랍고 반쯤은 기대대로다. 올해 나이 마흔 넷, 그러나 그것을 기준으로 젊다고도 늙었다고도 평가할 수 없는 독특한 생김의 근육과 주름들은 눈빛과 표정에 따라 그를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다. 인천 출신이지만 각 지방 사투리가 ‘이짝서 한 마디, 저짝서 한 마디’ 섞여 나오는 말투로 “저희 영화랑 비슷한 때에 몇 백억 짜리 영화도 개봉합니다. 사실 우리 영화는 거기서 흘린 돈만 주워서도 찍을 수 있었겠지만, 아무쪼록 좋게 봐 주십쇼” 라고 진지하게 ‘피알’하길 포기하지 않는 목소리는 볼륨을 한껏 낮춰도 우렁우렁한 장수의 그것이다.

이 야생의 배우가 연기를 시작한 것은 85년 대학로 극단에서였다. 어렵게 자란 만큼 배가 고파 91년 SBS 공채 1기 탤런트로 들어갔지만 월급은 세금 떼고 29만 8천원, 드라마 출연료는 주인공과 단역을 불문하고 일당 만 원이었다. 차비가 겁나 수원 세트장이나 지방 촬영은 안 가려 들던 무명의 단역 시절도 짧지는 않았다. “배우가 뭣 좀 할려고 하면” 어떤 감독들은 “인마, 니가 주인공이냐? 그냥 니 역할대로 해. 왜 주인공보다 폼을 잡고 지랄이야?”라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주인공도 아닌 놈이 왜 자꾸 천천히 걸어가냐고 혼난 적도 있어요. 그러믄 주인공만 천천히 걸어가고 단역이나 조연들은 빨리 걸어가야 되나? 그런 게 되게 웃기다고 생각”하던 중 98년 SBS 의 ‘빨간 양말’ 양동팔을 만났다. 대사라곤“아따, 형님 그요?” “아따, 근갑소” 정도뿐인 4회짜리 단역이었지만 대본에도 없던 애드리브와 성동일의 코믹한 표정 연기는 ‘빨간 양말’을 의 간판급 배역으로 끌어올렸다.

국민적 스타였던 ‘빨간 양말’ 시절 번 돈을 사기로 날리고 빚을 갚기 위해 시작했던 예능 프로그램과 토크쇼에서도 성동일은 사연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기에 더했다. “리허설 할 때는 애드리브를 안 하고 습관적으로 상대방 대사를 들어요. 드라마를 하면 남의 얘기는 읽지 않지요. 현실에서 우리가 옆 집 사정을 미리 알고 사는 건 아니잖아요?” 타이밍이 생명인지라 같은 걸 두 번은 하지 않는다는 그의 애드리브는 영화 에서 특기인 전라도 사투리와 결합한 “아아따, 참말로 답다반(답답한) 거. 봐바, 요것이 사과로 보잉가…보쇼잉, 봐봐! 보쇼! 사과여?…사과잖아…”를 비롯해 감칠맛 나는 장면들을 무수히 남겼다. 어설프고 간 작은 독립투사를 연기한 과 ‘스키점프(Ski Jump)’의 스펠링도 모르는 국가대표팀 코치로 등장한 에서도 그는 확실한 ‘한 방’을 보여주었다.

‘생활연기자’의 진득한 진심
성동일│고맙다. 덕분에 웃고 산다. 덕분에, 울고 산다
성동일│고맙다. 덕분에 웃고 산다. 덕분에, 울고 산다
그리고 한동안 다소곳하게 모은 손, 다급히 끔벅이는 눈, 당황해 일그러지는 표정의 절묘한 배합으로 ‘코미디 보증수표’가 되었던 성동일은 KBS 에서 ‘빨간 양말’을 능가할 캐릭터와 다시 만났다. 도망 노비를 쫓는 추노꾼, 그러나 그보다 저자거리 밑바닥의 무뢰한에 가까운 천지호는 꺽꺽대는 웃음과 눈의 번뜩임, 대사 사이의 씨근대는 숨과 어미를 늘이는 특유의 말투로 그 야생짐승 같은 천성을 날것인 채 보여 준 캐릭터였다. “사실 에서 오지호와 이다해가 뭔 멜로를 하는지는 나랑 아무런 상관이 없었어요. 그건 천지호가 모르는 일이니까요. 난 오로지 대길이(장혁)만 괴롭히면 되고, 마지막에 어떻게 천지호답게 죽을까만 생각했지요.” 그래서 저승 가는 노잣돈을 제 손으로 입 안에 넣은 채 숨이 끊어진 천지호의 최후 역시 의 무수한 줄기 가운데 가장 굵은 가지로 남았다.

그리고 성동일은 개봉을 앞둔 영화 를 비롯해 이해영 감독의 섹시 코미디 , 대구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을 다룬 영화 , ‘홍자매’의 신작인 SBS , 의 제작진이 다시 만난 KBS 등 주목할 만한 작품 다수의 촬영을 마쳤거나 준비하고 있다. 언제나 자신은 ‘생활연기자’일 뿐이라고 말하는 그는 올해 초 한 영화 시상식에서 네티즌이 뽑은 최고의 남자 조연배우 상을 수상한 뒤 이렇게 말했다. “제가 초대하고 공짜로 영화 보신 분들도 소주 한 잔 안 사주셨는데, 자기 시간을 내고 만원 돈을 내서 직접 보신 분들이 뽑아주신 상이라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여전히 ‘원 탑’에는 욕심 없고 큰 배역보다 큰 사람들과 놀고 싶은 게 꿈이라고 말하는 이 배우가 곧이어 관객들을 향해 덧붙였다. “고맙다. 니들 덕에 먹고 산다.” 하지만 관객들도 성동일을 볼 때마다 생각할 것이다. 고맙다. 덕분에 웃고 산다. 덕분에, 울고 산다.

글. 최지은 five@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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