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신경 써야 하고 다 책임져야 하고, 제가 좋아하는 그림과 음악과 이야기를 공통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건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라는 거였어요.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건 혼자 하는 경우가 많지만 영화라는 작업은 머리가 많아요. 80명의 머리가 뭉쳐서 하나의 결과물을 만드는 것, 그게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인 거 같아요. 혼자 했으면 절대 못할 작업이죠. 그분들과 함께 했기에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결과들이 나왔어요.”

솔직히 말하건대, 구혜선의 그 수많은 활동들, 그림 전시회를 열거나, 소설 <탱고>를 출간하는 활동에 대해 반쯤은 자의식 과잉이라고 여겼던 적이 있다. 뚜렷한 지시체 없이 자유로운 선으로 표현된 일러스트는 흥미로웠고, 소설의 어떤 구절들은 눈에 띄게 감성적이었지만 종종 그것들은 하나의 텍스트로 이해되기 전에 젊은 여배우의 치기 어린 돌발 행동 정도로 이해됐던 것이 사실이다. 아니, 그렇게 보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요술>을 만들며 감독이라는 타이틀로 대중을 만나는 그녀가 조금 걱정스러웠던 건 그래서다. 영화, 그것도 장편인 작품은, 한 재능 있는 배우가 최후의 전리품으로 취하기엔 너무 큰 작업이 아닌가. 구혜선의 예술가적 자의식이 수습할 수 없는 큰 판을 벌인 건 아닌가. 하지만 그녀는 영화라는 작업의 매력에 대해 오히려 수많은 스태프와 협업하는 것이라고, 협업을 통해서만 영화라는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어쩌면 그녀는 그토록 다양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천재’니 어쩌니 하는 언론의 설레발과 여배우에 대한 편견 속에서 제대로 자신이 하고픈 말을 하지 못했던 건 아닐까. “조명 팀, 예술 팀과 싸우기도 하지만 그들의 의견을 반영했기에 내 생각을 넘어서는 장면이 나올 수 있었다”고 말하는 그녀는 천재도, 허세 가득한 고집쟁이도 아닌, 자신이 쥔 기회에 최선을 다하는 한 청춘에 가까워 보인다. 하여, 거창한 타이틀 없이, 자신이 언제나 즐겁게 봤던 줄리아 로버츠의 작품으로 고른 그녀의 테마 영화 추천은 오해 없이 그녀를 이해할 하나의 단초가 될지도 모르겠다.




1. <귀여운 여인> (Pretty Woman)
1990년 | 게리 마샬

“<귀여운 여인>은 정말 여자들의 환상, 특히 10대 소녀의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출연했던 KBS <꽃보다 남자>보다 더. (웃음) 그녀가 연기한 비비안의 경우 매춘을 하는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에드워드(리처드 기어) 앞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지 않잖아요. 저는 그런 게 줄리아 로버츠의 매력인 거 같아요. 여성적이지만 결코 약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 터프하진 않지만 따뜻한 마음을 통해 강하고 독선적인 남자를 이겨내는 그녀의 매력이 이 신데렐라 스토리를 더욱 희망적으로 만들어준다고 봐요.”

줄리아 로버츠를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이자 할리우드산 신데렐라 스토리의 거의 모든 공식을 만든 작품이다. 말하자면 거리의 여자지만 돈과 상류층의 거만함에 주눅 들지 않는 비비안은 ‘나에게 이런 여자 네가 처음인’ 수많은 캔디녀의 원형이며, 기업 인수 전문인 백만장자 에드워드는 수많은 ‘실장님’과 구준표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두 사람이 서로의 진심을 느껴 사랑을 하게 되고, 남자의 멋진 프러포즈로 마무리된다는 이야기 구조는 빤해 보이지만, 사실 언제나 먹히는 이야기는 빤한 법이다.



2.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My Best Friend`s Wedding)
1997년 | P.J. 호건

“전 줄리아 로버츠의 그 웃음소리가 좋아요. 보고 듣기만 해도 정말 희망적이에요. 미녀지만 팜므파탈과는 거리가 먼, 특유의 소탈한 느낌이 좋은데,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나는 게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이나 <노팅 힐> 같은 로맨틱 코미디라고 생각해요. 그 중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데, 마지막에 친구의 결혼식에 들러리로 서서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하는 모습을 보고 펑펑 울었어요. 사랑이라는 게 그저 가지려는 게 아닌 보내주는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입 크게 벌리며 웃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두 여자 배우, 줄리아 로버츠와 카메론 디아즈가 등장하는 로맨틱 코미디다. 주인공인 줄리안은 사랑을 품었지만 그저 친구로 지내던 마이클(더못 멀로니)이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앞두자, 그 결혼식을 무산시키고자 한다. 자칫 그저 그런 삼각관계, 혹은 억지 소동극 정도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극을 이끄는 두 여배우의 호감적인 이미지 그대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훈훈한 결말에 이른다. 특히 음치임에도 주눅 들지 않고 노래를 부르던 신인 카메론 디아즈는 줄리아 로버츠의 포스에 밀리지 않는 씩씩함을 보여준다.



3. <에린 브로코비치> (Erin Brockovich)
2000년 | 스티븐 소더버그

“아마 줄리아 로버츠가 거의 최초로 동적인 캐릭터를 소화한 작품이 아닌가 싶어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남성적인 느낌보다는 여성이기에 가능한 동적인 느낌을 살렸던 거 같아요. 뭔가 아줌마의 억척스러움이랄까? 제가 좋아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줄리아 로버츠는 여성이 보며 좋아할 영화를 정말 잘 고르는 거 같아요. (웃음) 하루는 신데렐라가 됐다가, 또 하루는 약자의 편에 서서 세상을 바꾸는 변호사 조수가 됐다가. 물론 그 모든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드는 건 줄리아 로버츠라는 배우 특유의 힘 덕분이고요.”

줄리아 로버츠가 그냥 스타가 아닌 초특급 스타라는 걸 2000만 달러라는 출연료와 함께 증명한 작품이다. 그녀가 맡은 실존 인물 에린 브로코비치는 스펙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지만 작은 단서로부터 진실을 밝혀내는 명민한 머리와 그른 건 그른 거라고 주장하는 곧은 심지를 가진 인물이다. 아이 셋 딸린 과부로서의 억척스러운 생존 본능과 거대 기업 앞에 꼿꼿한 성격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그녀의 연기는 극 전체를 이끌기에 충분했고, 오스카는 이에 여우주연상으로 화답했다.



4. <클로저> (Closer)
2004년 | 마이크 니콜스

“아마 줄리아 로버츠가 출연한 영화 중 가장 건조한 영화였던 거 같아요. 억측일지도 모르겠지만 과거 자신이 보여준 신데렐라 스토리나 로맨틱 코미디 같은 극적인 작품이 아닌, 좀 더 현실적인 작품을 보여주고 싶어서 이 작품을 택한 게 아닌가 싶어요. 사실 작품 자체도 정말 좋지만 그녀가 선택했다는 것만으로 더 호감을 가지고 봤던 거 같아요. 그래서 사랑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더 감정이입 하며 영화를 봤던 거 같고요.”

줄리아 로버츠의 로맨틱 코미디들, 아니 대부분의 사랑 영화는 사랑이 이뤄지거나 이뤄지지 않는 것으로 하나의 결말을 이룬다. <클로저>가 먹먹한 건, 바로 그런 결말 없는 사랑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안나(줄리아 로버츠)를 비롯한 네 명의 남녀는 서로 사랑을 느끼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또 다시 헤어진다. 그 반복 속에서 증명되는 건, 사랑한다는 말로는 결코 감정을 고정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결핍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먹먹하다.



5. <모나리자 스마일> (Mona Lisa Smile)
2003년 | 마이크 뉴웰

“시간 순으로 보면 <클로저>보다 먼저 나왔지만 개인적으로는 <클로저>가 주는 퍽퍽한 느낌을 극복하게 해준 작품이에요. 그녀가 맡은 캐서린은 여성을 위한 교육이 결국 좋은 아내 만들기로 진행되는 시대에 등장한 진취적이고 자유분방한 교사에요. 그게 어떤 페미니즘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었던 거 같아요. 그게 어떻게 보면 <클로저>가 남긴 허무함 너머를 보여줬던 거 같아요. 그래서 그녀가 학교를 떠날 때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쫓아오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 소름이 돋았고요.”

서양에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예쁘고 똑똑하고 좋은 교육을 받은 여자의 최종 목표가 좋은 집안에 시집가는 것인 시절이. 이 시기, 학생들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심어주는 선생의 이야기인 <모나리자 스마일>이 예측 가능하지만 괜찮은 영화인 건 그래서다. 여학생에게 가르칠 최고의 덕목은 가계일과 우아한 에티켓이라고 믿는 대학과 이에 대항하는 캐서린(줄리아 로버츠)의 반목, 그리고 캐서린에게 결국 마음을 열고 자신의 삶을 찾는 학생들의 이야기는 과거의 것이기에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시기를 이겨낸 여성들의 용기는 시간이 지나도 가치 있는 것이기에 이 영화를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작인 단편 <유쾌한 도우미>가 그랬던 것처럼 <요술> 역시 친절한 영화는 아니다. 등장인물들이 교복을 입고 음악 공부를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예술 고등학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특정 시간과 장소로부터 자유로운 판타지”이다. 그 안에서 천재적인 첼리스트와 그의 재능을 질투하는 친구, 그 두 남자의 사랑을 받지만 스스로는 어떤 표현도 하지 않는 여자 주인공이 만드는 이야기는 어떤 한 주제로 소급하지 않는다. 이것을 굳이 열린 해석이라는 그럴싸한 말로 포장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아직 뭔가에 대해 해석하고 답을 낼 시기는 아닌 거 같아요. 우선은 보고 듣는 족족 흡수하는 게 중요하지” 라고 말하는 아직 미완인 창작자의 첫 장편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이제 거품도 편견도 거둬낸 자리에 선, 한 욕심 많은 청춘이 이뤘거나 이뤄낼 것들을 담담히 볼 시기가 온 것 같다. 배우이자 작가이자 감독인 한 사람으로서의 구혜선을 온전히 평가할 시기가.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