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영화들
이성재│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영화들
2007년 영화 이후 3년 만이다. 그 사이 이성재는 “본의 아니게” 대중의 시선 바깥에 머물러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실시간 검색어가 바뀌고, 한 달이 멀다 하고 새로운 얼굴들이 쏟아지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선 잊힐 수도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연달아 3편의 작품이 무산되는 와중에도 “늘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특별히 공백을 느끼지 못했다”는 그의 말은 탄탄한 기초를 갖춘 배우만이 내놓을 수 있는 답안이다.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로 처음 등장했을 때도 이성재는 낯선 얼굴이었지만 어설프지 않았다. 두 여자 사이를 오가지만 자신감 넘치는 마초보다는 위태로운 소년 같았던 준희는 그 전의 한국 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남자였다. 의 철수 역시 까칠하게 굴지만 알고 보면 여주인공을 위한 것은 다 해주는 ‘츤데레’ 남자 주인공의 원형이었다. 이성재는 커피 광고에 손색없는 부드러움을 쌓은 이후, 다시 그것을 무너뜨렸다. , , 에서 그는 과묵하거나 터프하거나 사악한 남자로 일갈했다.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뻔하게 내놓지 않겠다는 듯. “물 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사람들이 이성재를 떠올렸을 때 하나의 이미지로만 기억되고 싶지 않거든요.”

이성재의 자신감은 선인과 악인, 멜로와 코미디를 가리지 않고 연기를 하며 만들어졌다. 그것은 보톡스를 맞고, 식스팩을 새기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성형법이다. “스무 살 때보다 서른 살의 제 얼굴이 더 좋았고, 서른보다는 지금의 얼굴이 더 좋아요. 앞으로 50대는 더 좋아질 거라 확신해요. 배우로서나 생활인으로서나. 자만심은 아니고 자존감이랄까요? (웃음)” 다음은 “배우는 꿈도 꾸지 않던” 때부터 “감수성 풍부했던” 대학 시절에 이르기까지 이성재와 함께 한 영화들이다. 그가 만들어간 필모그래피처럼 그의 스무 살의 얼굴, 서른 살의 얼굴을 빚는 데 일조한 원재료들이다.
이성재│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영화들
이성재│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영화들
1.
1984년 | 배창호
“집 앞 동시개봉관에서 우연히 봤어요. 물론 그 때는 배우가 될 마음은 추호도 없었는데 영화 보는 것만은 워낙 좋아했어요. 당시로는 드물게 해외에서 촬영돼서 그런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세련됐던 기억이 나네요. 이후에 에서 조명을 하셨던 스태프 분이랑 함께 작업도 해서 그 때 얘기도 재밌게 들었죠. 미국에 7명 정도의 최소 인원만 가서 찍었다고 했는데 굉장히 웰메이드한 영화가 나왔죠.”

해외여행조차 쉽지 않았던 1980년대, 미국 로케이션으로 촬영되었다. 배창호 감독의 친구이기도 한 최인호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구원처럼 여겨졌던 기회의 땅 미국에서 표류하는 청춘들을 그렸다. 위장결혼을 통해 이뤄진 호빈(안성기)과 제인(장미희)의 만남은 결국 사막의 모래성처럼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
이성재│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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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 Better Tomorrow)
1986년 | 오우삼
“비디오로 서른 번도 넘게 보다가 극장에서 재개봉을 해서 또 봤죠. 제 세대에는 안 본 사람이 없을 거예요. 비디오를 사려고 방이동에 있는 제작사까지 찾아갈 정도로 좋아했어요. (웃음) 가장 친한 친구는 아직까지도 그 때 휴대폰 벨소리가 ‘당연정’이예요. 대학교 올라가서는 검은 바바리를 많이 입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주)윤발이 형 흉내 낸다고 올백도 하고 다녔어요. (웃음)”

은 단순한 영화 한 편이 아니다. 한 시절을 설명하고, 그 때의 향수를 대변하는 상징물이다. 형제의 우애와 친구의 의리, 암흑가의 냉정함까지 남자들을 매료시키는 모든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은 주윤발이라는 신화적인 존재를 이 땅에 내려주었다. 당신도 ‘바바리’ 재킷을 세우고, 성냥개비를 입에 물었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까?
이성재│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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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Bagdad Cafe)
1988년 | 퍼시 애들론
“멜랑콜리한 음악이 참 유명하죠? (웃음) 그리고 가슴 안에 뭔가가 푹 꺼지는 느낌이랄까? 보고나서 여운이 오래 가는 영화예요. 원래 최루성 영화보다는 전혀 그렇지 않은 영화, 잔잔한 느낌에 오히려 크게 자극받는데 가 그랬어요. 특히 주인공이 큰 가방을 들고 나타나는 첫 장면, 그 더위나 끈적임, 황색 톤의 사막의 느낌이 기억에 남아요.”

에서는 모든 것이 몽롱하다. 사막 한 가운데에 툭 던져진 등장인물들처럼 관객들 또한 그들의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어떠한 친절한 설명도 없이 극 전체를 휘감는 주제가, ‘Calling You’가 귀를 먹먹하게 한다. 그러나 서로에 대해 잘 몰라서 오해를 할 지언정 편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친구가 되고, 오아시스보다 소중한 연대를 사막에 꽃 피운다.
이성재│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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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Mulberry)
1985년 | 이두용
“이 영화를 말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웃음) 하지만 은 그 당시에 유행했던 에로 영화들과는 달랐던 것 같아요. 물론 동시상영관에서 보긴 했지만 그냥 보고 즐기는 에로 영화가 아니더라구요. 영화에 대해 잘 모를 때였지만 보면 볼수록 영화에 뭔가가 있었어요. 스토리적으로도 그렇고, 해학도 있고, 무엇보다 굉장히 유머러스하구요. 참 탄탄한 영화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나도향의 원작을 토대로 은 토속적이고 원초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있으나마나한 남편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안협(이미숙)과 삼돌이(이대근)의 기싸움이 코믹하면서도 솔직하다. 신인이었던 이미숙은 이대근에 전혀 밀리지 않는 카리스마를 선보이며 그해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성재│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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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Platoon)
1986년 | 올리버 스톤
“베트남 전쟁 영화중에 가장 좋아하는 영화예요. 고1 때, 지금은 없어졌지만 현재 웬만한 영화관의 스크린에 버금갈 정도로 큰 화면이 있던 금호극장에서 봤어요. 이때부터 윌렘 대포라는 배우를 좋아하기 시작했죠. 주인공인 찰리 쉰보다 더 인상적이었어요. 최근 행보는 팬으로서 좀 아쉬운 구석도 있지만 여전히 카리스마 있는 배우인 것 같아요.”

전쟁에 대한 신념도, 군인에 대한 자부심도 아무 것도 없는 신병 크리스(찰리 쉰). 그저 무료한 생활에 반전을 주기 위해 참전한 베트남전에서 그는 죽어가는 동료들, 인간성이 사라져가는 상사를 보며 갈등한다. 그리고 그 갈등은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제 5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과 작품상 등 수상.
이성재│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영화들
이성재│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영화들
“지금까지도 좋을 때와 안 좋을 때, 더 안 좋을 때가 있었지만 아직도 좋은 배우로 가기 위한 시행착오의 길 위에 있는 것 같아요. 지금도 촬영장에 있으면 새로운 것들이 들어오거든요. 예전에는 내 연기하기 바빴는데 지금은 외적인 것, 편집이나 카메라 앵글, 소품 같은 것도 고려하면서 연기하게 되더라구요.” 이제는 편해질 만한 현장에서도 끊임없이 즐거움을 찾아내는 이성재 앞에는 새로운 과제들이 대기 중이다. (가제 )와 를 통해 “국내 최초로 3D 영화를 연속으로 두 편 찍는 배우”가 될 예정이고, 도 이제 막 개봉했다. 북한군 분대장으로 축구 앞에선 사상도 벗어 던진 에서 그는 영화 안팎에서 실제 분대장 역할을 하며 신인배우들을 지도하고, 미술에서부터 연출까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성재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영화에서 만큼이나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줬다. “너무 영화에 간섭하는 게 아닌가”를 경계할 정도로 넘치는 에너지를 고백하다가도, 연기에 대한 생각을 밝힐 때는 15년 경력에 정비례하는 능력치를 갖춘 배우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리고 사춘기 큰 딸을 걱정하고 미술에 재능을 보이는 작은 딸 자랑에 여념이 없을 때는 영락없이 자상한 아빠였다. 한 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동안 이성재가 보여준 다양한 얼굴은 그가 ‘물 같은 배우’가 되리란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사진제공. 씨네드에피

글.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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