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의 주문은 강력했다. “은조야”하고 나직이 부르던 기훈(천정명)의 목소리는 생긴 뒤로 한 번도 열린 적 없었던 은조(문근영)의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 사람을 뭐라고 불러본 적 없어 제 이름만을 목 놓아 부르던 은조의 오열 또한 먹먹했다. 그러나 주인공들이 어른이 되고, 동화 같은 시간이 끝나면서 더 이상 “은조야”의 마법은 통하지 않게 되었다. 은조와 기훈의 감정은 계속 엇갈리기만 하고, 그 사이에서 효선(서우)은 갈팡질팡하며 정우(옥택연)는 그들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다. 더 이상 “은조야”의 마법도, 동화 같은 교감의 순간도 없는 의 새로운 동력은 무엇일까? 위근우 기자와 윤이나 TV평론가가 종반을 향하고 있는 에 대해 서로 다른 리뷰를 내놓았다. /편집자주

동화 ‘신데렐라’는 신데렐라의 아버지가 재혼을 한 뒤, 전처의 딸인 신데렐라가 재투성이가 되어 구박을 받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KBS 는 다르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 드라마는 신데렐라의 언니에게로 이야기의 중심을 옮기고, 동화 ‘신데렐라’ 바깥의 시간, 곧 드라마 속에서 신데렐라인 효선(서우)이 계모 강숙(이미숙)과 의붓언니 은조(문근영)을 맞이하게 되기 이전 상황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는 작은 유리 구두에 발가락을 잘라서라도 발을 집어넣으려 했던 탐욕스러운 신데렐라 언니와 악랄하고 잔인했던 계모에게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각자의 사연을 심어주면서, 짧은 동화를 드라마에 어울리는 길고 풍성한 이야기로 만들어간다. 신데렐라와 아버지, 계모와 언니, 왕자님은 동화 속 모습 그대로 박제된 캐릭터가 아니라 서로에게 복합적인 감정과 인연을 가진 존재들로 속에서 묘사된다. 적어도 4회까지는 그랬다.

8년이 지난 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신언니> vs <신언니>│아직도 뜯어먹을 게 남았니
vs <신언니>│아직도 뜯어먹을 게 남았니" />은조와 강숙이 남해의 장 씨에게서 도망치던 그 시절, 이 모녀가 처해있는 현실은 진절머리 나도록 비루한 진창이었다. 하지만 는 그런 현실을 날 것으로 담아내는 대신, 한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는 은조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다. 은조는 엄마만 없으면 자신의 삶이 훨씬 나아지리라 믿고 언제나 도망을 꿈꾸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언제나 저 밖에 의지할 데가 없는 엄마의 곁을 지킨다. 은조는 차갑지만 우울하지 않고, 거칠지만 위험하지 않다. 그런 은조의 캐릭터는 가 8년 전의 이야기를 할 때 우울과 비극의 덫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이었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도가와 집의 풍경 속에서 공들여 서로의 감정을 쌓고 쌓아간 의 8년 전은, “달이 네모라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8년이 지난 5회 이후로 는 더 이상 동화일 수가 없다. 기훈(천정명)은 떠났고, 은조는 마음을 닫았으며, 효선은 스스로를 사랑하지도, 믿지도 못하는 어른으로 자라났다. 이들 사이에 생겨난 사랑이나 미움으로 단순하게 치환될 수 있는 감정을 넘어선 또 다른 복잡한 감정과 어른의 현실은 더 이상 동화의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는 그렇게 변해간 인물들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탄탄하게 다져가기보다 ‘감정’ 그 자체에만 집중함으로서, 막 생겨나는 감정들이 동화 같은 이야기를 만나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던 초반의 느낌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나마도 유지되어오던 동화와 현실 경계에 선 의 세계는, 대성(김갑수)이 세상을 떠나면서 무너졌다.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은조와 강숙을 품어주며, 죽어가면서도 기훈의 배신을 용서해 주었던 ‘어른’ 대성의 존재마저 사라진 에 남은 것은, 미성숙한 인간들 사이의 감정적 충돌뿐이다. 남아있는 모든 이들에게 어마어마한 죄책감과 상처를 떠안긴 대성의 죽음은 남은 인물들로 하여금 대성에게 은혜를 갚기 위한 행동, 곧 대성참도가와 관련된 거의 집착에 가까운 헌신만을 허용하게 했다. 이 드라마 속에서 유일하게 삐뚤어진 구석이 없이 건강한 정우(택연)가 숨통을 틔워주지만, 정우의 존재가 인물들의 감정에, 전개될 이야기에 끼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은조가 대성의 사진 앞에서 ‘아빠’라 부르며 잘못했다고 고백하는 장면처럼, 감정이 극단에 다다르는 순간의 울림은 여전하지만, 지금의 에는 그 한 순간만을 위한 감정의 소비가 너무나 크다.

돌림노래처럼 불러온 과거의 감정들만이
대성에게 단 한 번도 아빠라는 말을 들려주지 못하고 후회했던 은조는 여전히 기훈을 ‘그 사람’이라고 부르며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피로하고 지쳐보였지만 ‘여기보다 어딘가’를 꿈꾸기는 했던 어린 새 같던 긴 머리의 은조는 더 이상 없다. 지친 눈으로 술 항아리를 껴안고 술이 익는 소리를 들으며 위로받던 은조도, 은조에게 와서, 웃고, “은조야”하고 불러주던 기훈도 사라져 버린 지금, 는 마치 돌림노래처럼 과거를 불러온다. 감정만 남고 이야기가 사라져가면서 속 내레이션도 사라졌다. 의 화자는 더 이상 은조도, 효선도, 기훈도 아니다. 효선의 복수가 곧 시작될 지금, 드라마를 끌고 가는 것은 대성의 망령이다. 이들은 여전히 과거의 어떤 지점에 머물러 있고, 누구도 그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를 보는 시선 역시 마찬가지다. 언젠가는 이 이야기가 은조가 가슴을 치며 제 이름을 부르며 울던 그 때로 돌아가는 기대만이 이들의 반복되는 엇갈림과 감정의 부딪힘을 견딜 수 있게 만든다. 하지만 끝나지 않는 돌림노래는 언젠가 결국 듣다 지치게 되고 마는 법이다. 는 언제까지 동화 같던 날들의 힘만으로 버텨낼 수 있을까.
글 윤이나

“어떻게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네가 그렇게 잘 알아?” 뜯어 먹을 걸 더 늘리기 위해 대성 참도가의 일본 수출 건에 힘쓰는 것이 아니냐는 효선(서우)의 비아냥거림에 은조(문근영)는 대답했다. 아니, 내뱉었다. 그 둘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다. 효선이 물으면 은조는 되묻는다. 더 정확하게 말해 은조는 항상 이런 식이다. 적어도 새아버지 대성(김갑수)의 죽음 이후 참도가 재건에 나서기 전까지 그녀의 삐딱한 대화 방식은 KBS 의 오해와 갈등을 일으키는 원동력이었다. 사랑받는 것에만 익숙하던 효선은 분노와 열등감을 쌓아갔고, 8년 만에 돌아온 기훈(천정명)은 마음을 정착시키지 못했으며, 직원들은 참도가를 떠났다. 그리고 그 때마다 어김없이 은조는 혼자만의 공간에 숨어들어 후회하고 아쉬워하고 슬퍼했다. 이는 종종 를, 그리고 은조를 보기 답답하게 만든다. 왜 은조는 자신의 상상처럼 울며 매달리는 효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지 않는 걸까. 왜 편지를 남겼다는 기훈에게 냉소를 던지고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는 걸까. 아주 조금만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갈등과 분란은 생기지 않을 것만 같고, 그래서 답답하다.

언제나 불완전한 우리들의 대화처럼
<신언니> vs <신언니>│아직도 뜯어먹을 게 남았니
vs <신언니>│아직도 뜯어먹을 게 남았니"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는 소통의 어려움에 대한 흥미로운 텍스트가 된다. 앞서 빌려온 대화에서 은조는 덧붙인다. “속마음 같은 거 따로 품었다고 쳐. 그래도 너에게는 얘기하지 않아.” 여기서 너(효선)에게 얘기하지 않겠다는 것보다 우선하는 건, 따로 품을 속마음 따위 없다는 전제다. 말하자면 에서 은조가 종종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속마음과 겉모습이 달라서라기보다는 그 마음 자체를 스스로 확신하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이다. 극 초반 직접 내레이션을 들려주는 중에도 은조가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또렷하게 표현한 적이 없다는 건 그래서 흥미롭다.

기훈을 보고 살면서 처음으로 마음의 떨림을 경험하는 순간에도 그녀는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는 식으로 감정을 서술하지 않는다. 그가 떠난 순간에도 그가 불러줬던 자신의 이름을 되뇌며 불완전하게 그 감정을 환기할 뿐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낄 땐 그냥 달린다. 감정을 표현할 어휘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언어로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다. 즉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언어로 표현되는 마음은 언제나 오해의 여지를 품고 있다. 말하자면 안쓰러움을 위로 대신 질책으로 드러내는 은조와 기대고 싶은 마음을 애정 대신 분노로 표현하는 효선, 사랑하는 마음을 고백 대신 신경질로 내뱉는 기훈 간에 벌어지는 불완전한 대화는 오히려 당연한 거다. 순수한 대화라는 건 환상이다.

가 이뤄낸 유의미한 성취
의 미덕은 이처럼 소통의 어려움을 보기 불편할 정도로 끈덕지게 이어가면서도 우리가 어떻게 서로 한 줌 진심을 전하고 소통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데 있다. 11회에서 은조가 자신의 독설에 상처 받은 참도가 직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사과하는 장면이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건 그래서다. 단순히 특유의 차가운 태도를 버렸다는 것 때문은 아니다. 말로서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오히려 대화의 창구는 열린다. 즉 내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보다 상대방이 어떻게 들을지를 고민하는 것만이 언어가 가진 근본적 결핍을 메울 수 있다. 이것은 대화의 방법이자 화해의 방법이다.

어릴 적 받은 상처를 알리바이 삼아 언제나 차가운 태도를 유지하던 은조는 이런 사과의 과정을 통해 그토록 적대시하던 세상과 화해하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비슷한 시점에서 드라마 속 가장 극악한 캐릭터이던 강숙(이미숙) 역시 죽은 대성의 일기장을 보고 그가 자신에게 품었던 사랑을 깨닫고 그토록 확신하던 세상의 더러움을 재고한다. 소통은 너무나 어렵다. 하지만 불가능하진 않다. 힘겹게 얻어낸 이 낙관주의야 말로 가 이뤄낸 유의미한 성취일 것이다.
글 위근우

글. 위근우 eight@
글. 윤이나(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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