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예쁜’ 정려원을 볼 수 없게 됐다. 물론 시상식과 제작발표회 현장에서 그는 여전히 예쁘고 세련된 스타일로 주목받고 있지만, 작품 안에서는 그런 이미지가 점점 흐릿해지더니 어느 순간 사라졌다. 아마도 그 기점은 2005년 MBC <내 이름은 김삼순>이었던 것 같다. 연기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렸던 MBC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뱀파이어계의 귀엽고 섹시한 패셔니스타 엘리자베스로 출연하다가 스스로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한 드라마”라고 인정했던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는 가녀린 몸 때문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청순가련한 희진을 연기했다. 화면 밖에서 대중들에게 소비되는 도시적인 이미지를 좀 더 작품 안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었지만, <내 이름은 김삼순> 이후의 정려원은 안전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강원도 산골에 사는 시골소녀(<넌 어느 별에서 왔니?>), 순수한 자아와 걸핏하면 욕설을 내뱉는 자아를 동시에 지닌 다중인격장애자(<두 얼굴의 여친>), 방 안에 갇혀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한 채 폐인처럼 살아가는 여자(<김씨 표류기>)까지 자신의 외형적인 이점을 철저히 숨긴 채 오로지 연기만으로 정면 승부했다. “멋 부리고 나올 수 있는 자리는 따로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영화 <적과의 동침>도 “꾸미지 않아야 편하게 연기할 수 있다”는 그의 지론이 반영된 선택이다. 꾸미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의도적으로 허름한 옷과 어눌한 말투를 내세워 영락없는 시골소녀 설희로 등장한다.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과거의 첫사랑 정웅(김주혁)이 자신을 해치려는 인민군이 되어 재회하게 된 상황에서 정려원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온몸으로 표현하되 결코 과잉된 감정을 드러내진 않는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변하진 않았지만, 세월에 따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가 겪어보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지냈는지 알고 싶어서 전쟁을 겪으신 분들과 대화도 많이 했어요. 그렇게 표현 방식을 하나씩 찾아 나간 것 같아요.”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려오는 와중에도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남자를 부둥켜안고 애써 눈물을 삼키는 정려원의 모습은 ‘열심히 공부하는 배우’라는 인상을 준다. 스크린 밖에서는 스타일리쉬한 여인으로, 스크린 안에서는 연기 외에 겉으로 보여지는 것들에 무신경한 배우로 살아가는 정려원은 일상생활에서는 어떤 사람일까. ‘혼자 웅크리고 앉아 들으면 좋은 노래들’은 그가 평소에 보고 느끼는 감정들에 대한 자그마한 힌트가 되어줄 것이다.




1. Damien Rice의 <9>
“정말 사랑해서는 안 되는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다면 공감할 수 있는 노래에요. 사랑하는 그녀에 대한 그의 목소리가 절절하게 와 닿거든요.” 많은 배우들이 추천한 데미안 라이스의 곡은 영화 <클로저>의 OST로 알려진 ‘The Blower`s Daughter’였다. 하지만, 정려원의 첫 번째 추천 곡은 굳이 가사를 해석하지 않더라도 피아노 연주에 묻어나는 데미안 라이스의 목소리만으로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Accidental Babies’다. 화려한 연주에 기대지 않고 오직 목소리라는 훌륭한 악기로 서정적인 울림을 안겨주는 그의 쓸쓸한 감성을 느끼고 싶다면 이 곡을 들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을 때의 감정이 어떨지 혼자서 상상해보다가 마지막에 ‘What about me?’라고 툭 내뱉는 대목에서는 정려원의 말처럼 “절절함”이 느껴진다.



2. 넬의 <3집 Healing Process>
“사랑, 기억, 사람에 대한 곡인데, 노래한다기보다 읊는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아요. 도대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 잊어버린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에 ‘이번에야말로 진짜일 거라고 생각해. 사랑해’라고 한 번 확 지르는데 이 부분이 참 아팠어요. 넬의 노래도 좋지만, 특히 가사를 보면 정말 천재적인 것 같아요.” 데미안 라이스가 상대적으로 덤덤하게 쓸쓸한 감정을 노래한다면, 넬은 온몸을 다해 감정을 쏟아내는 뮤지션에 가깝다. 애써 슬픔을 억누르지 않는다. 사랑하고 이별하고 상처받고 치유하는 과정에 대한 잔인한 가사 그리고 그것을 읊조리는 고음의 목소리. 혼자 방에서 웅크리고 앉아 듣다 보면 감정의 바닥까지 경험할 수도 있는 곡이다.



3. Radiohead의 < OK Computer >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에요. 약간 귀찮은 듯 무심히 부르는 목소리가 묘하게 끌리더라고요.” 정려원뿐만 아니라 김C 역시 라디오헤드의 ‘No Surprises’를 가장 좋아한다고 밝힐 정도로, 이 곡은 라디오헤드의 대표곡으로 알려진 ‘Creep’과 함께 그들의 베스트 트랙 중 하나로 꼽힌다. 맑은 실로폰 연주와 섬세한 기타 연주 그리고 보컬 톰 요크의 무심한 듯한 목소리가 더해져 전체적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a handshake of carbon monoxide(일산화탄소와의 조우)’라는 가사와 함께 밀폐된 공간에 물이 점점 차오르는 뮤직비디오를 두고, 자살에 대한 곡이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았으나 톰 요크는 이 사실을 부인했다. 하지만, 사실 여부와는 무관하게, 뮤직비디오와 함께 들어보면 메시지가 더 와 닿는 곡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4. Snow Patrol의 < Up To Now >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밤하늘을 보면서 듣고 싶은 노래에요.” 그냥 들어도 마음이 울컥하지만,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2>의 OST로 먼저 접했던 사람들은 드라마의 장면이 오버랩 되면서 언제 들어도 눈물이 나는 명곡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하면서까지 사랑해서는 안 될 환자 데니를 사랑하게 된 의사 이지는 결국 싸늘하게 식어버린 데니의 시체를 마주하게 됐고, 그런 이지에게 전 남자친구는 ‘널 사랑한 사람은 네가 이러지 않길 바랄 거야’라는 말을 건넨다. 그 순간 흘러나오는 음악이 바로 ‘Chasing Cars’다. 덕분에 스노우 패트롤은 ‘13년 만에 처음으로 빌보드 싱글차트 5위권에 진입한 영국 록밴드’로 불리며 미국에서도 사랑받는 뮤지션으로 거듭났다.



5. 검정치마의 <201 (Special Edition)>
“검정치마는 정말 천재인 것 같아요. 가사에서 영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구사하는 능력에 50점, 일반적인 노래처럼 ‘Part A-Part B-Sub bridge’로 연결되지 않는 점에 50점을 주고 싶어요. 결국, 100점짜리 곡이라 할 수 있죠.” 2008년 11월 데뷔앨범 <201>을 들고 홍대에 나타난 검정치마는 홍대 인디계에 그야말로 충격적인 존재였다. 데뷔 앨범 하나만으로 2010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록 앨범상을 수상할 만큼 검정치마의 음악은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쉽게 들을 수 없었던 ‘다른’ 색깔이었다. 비록 멤버들이 제각기 흩어지면서 조휴일의 1인 밴드가 됐지만, ‘2집은 도대체 언제 나오냐’는 질문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질 정도로 여전히 검정치마에 대한 관심은 현재진행형이다.




“예전에는 일단 부딪히고 보는 편이었어요. SBS <자명고> 같은 경우에도 제가 해보고 싶었던 여자 캐릭터라 매력을 느꼈거든요. 모험가적인 기질을 숨길 수 없었나 봐요.” 마치 학생이 공부하듯이 차근차근 연기를 배우고 때로는 무모한 것에 도전했던 정려원은 이제 “하고 싶은 것보다 잘할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모범생이었다면 앞으로는 우등생이 되고 싶다는 뜻을 조심스럽게 밝힌 셈이다. <내 이름은 삼순이>에 이은 정려원의 두 번째 터닝 포인트가 곧 개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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