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옥│사랑의 여주인공을 꿈꾸게 하는 멜로영화
배종옥│사랑의 여주인공을 꿈꾸게 하는 멜로영화
“배우의 운명이죠.” 배종옥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에서 그녀가 맡은 인희는 암 말기 환자로, 죽어가면서까지 가족들을 위해 사는 어머니다. 실제 암으로 어머니를 잃은 배종옥은 투병을 하는 어머니를 지켜보았던 기억을 연기하는 내내 떠올렸다. 개인적인 아픔까지도 열연의 재료로 삼는 배우의 잔인한 운명. 그마저도 담담하게 술회하는 그녀는 배우의 운명에 대해 말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 무대 아래, 스크린 밖, 브라운관을 벗어나서도 유지하는 완벽한 발음과 발성은 배우로서 가장 기본적인 소양조차 갖추지 못한 수많은 스타들을 각성케 하기 충분하고, 작품에 따라 자유롭게 입고 벗는 여성성은 ‘여배우’라는 틀에 갇혀있는 이들을 부끄럽게 한다.

KBS 에서 억척스럽게 생선가게를 꾸려가는 맏딸과 KBS 에서 순정에 코웃음 치는 화려한 스타 윤영은 배종옥이 아니었다면 결코 동일선상에서 논의될 수 없었을 것이다. 에서 미련스러울 정도로 가족의 울타리만 지켰던 어머니와 SBS 에서 성공을 위해 친자식까지 버리는 비정한 어미를 동시에 연기하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 또한 배종옥이라는 배우의 단면을 보여준다.

“너무 다른 두 가지 캐릭터를 연기하는 건 굉장히 고통스러워요. 원래 테크니컬하기보다는 진심으로 다가가는 걸 추구하는 편인데 그런 걸 통하지 않으면 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현장을 오가면서도 순간 순간 캐릭터나 상황에 몰입하려고 노력했어요.”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일하면서 부딪치는 부분도 많았고 연기를 전공할 때도 주변에서 아무도 배우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배종옥은 연기에만, 내게 주어진 작품에만 집중하다 보니 배우가 되었다. 다음은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가 아닌 사랑의 여주인공을 꿈꾸는 배종옥이 추천하는 멜로영화들이다. 그녀가 꿈꾸는 사랑, 그녀가 동경하던 여배우들이 이 안에 살아있다.
배종옥│사랑의 여주인공을 꿈꾸게 하는 멜로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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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rades: Almost A Love Story)
1996년 | 진가신
“원래 멜로영화를 참 좋아해요. 은 꽤 오래 전에 본 영화인데 처음 봤을 때 굉장히 가슴이 아팠어요. 물론 동시에 정말 잘 만든 영화라고 감탄도 했구요. 무엇보다 장만옥이라는 배우가 진짜 연기를 잘했죠. 제 생각에는 그녀가 진짜 배우가 될 수 있었던 작품이 이라고 생각해요.”

친절하지 않은 홍콩이라는 대도시에 꿈을 찾아온 가난한 소군(여명)과 이요(장만옥)는 닮았다. 등려군의 노래를 좋아하는 것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10여 년간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도 온전히 사랑할 시간을 갖지 못하는 그들은 결국 달콤하다는 뜻의 제목처럼 달콤한 엔딩을 맞을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상대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고, 추억을 만들어가는 소군과 이요 같은 연인들 덕택에 건조한 도시도 조금은 물기를 머금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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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e English Patient)
1996년 | 안소니 밍겔라
“정말 연기 잘 하는 배우들이 많이 나오지만 그 당시에는 그들이 지금처럼 명배우 칭호를 받진 않았어요. 막 연기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배우들이었는데 지금은 다들 너무나 대단한 배우들이 되었죠. (웃음) 배우로서 이렇게 좋은 영화를 보면 ‘그래, 이렇게 감동적인 영화 정말 찍고 싶다, 어디 저런 대본 없나’ 하면서 작품에 대한 갈증이 정말 간절해지죠.”

사랑의 기억만을 간직한 채 죽음을 기다리는 남자가 사랑을 믿지 않거나 피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랄프 파인즈, 줄리엣 비노쉬, 윌렘 데포 등 각국을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들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고스란히 살려낸다. 제 69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 감독상 등 9개 부문 수상작.
배종옥│사랑의 여주인공을 꿈꾸게 하는 멜로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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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Out Of Africa)
1985년 | 시드니 폴락
“메릴 스트립을 너무 좋아해요. 대학교 3학년 때 그녀가 나오는 이라는 영화를 보고 3일 동안 잠을 못 잤어요. 연기에 소름 돋아서요. (웃음) 그 때부터 제 롤모델로 삼았죠. 메릴 스트립이 연기하는 걸 볼 때마다 ‘아, 내가 여기에 멈춰 있으면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절 깨어있게 하는 배우죠. 영화는 중년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안에 철학이 있어서 여느 멜로 영화와는 다르죠.”

훌쩍 아프리카로 떠나고, 그곳에서 정착하며 남편과는 헤어지고 병까지 얻으면서도 끝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던 여자, 카렌(메릴 스트립)의 인생은 다이나믹한 아프리카의 풍경보다도 더 큰 울림을 준다. 햇살 좋은 오후, 강가에서 데니스(로버트 레드포드)가 카렌(메릴 스트립)의 머리를 감겨주는 장면은 멜로영화 명장면의 정석이라 할 만하다.
배종옥│사랑의 여주인공을 꿈꾸게 하는 멜로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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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Fatale)
1992년 | 루이 말
“정말 충격적인 영화였죠. 줄리엣 비노쉬를 좋아해서 그녀의 출연작들을 최근에 다시 찾아보고 있어요. 도 그렇고 사랑 얘기만큼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고, 생각하게 할 수 있는 소재가 없는 것 같아요. 한 가지 아쉬운 거라면 우리나라도 이제 중년의 사랑을 재밌게 잘 풀었으면 좋겠어요. 중년의 사랑은 불륜밖에 없는 거처럼 묘사되는데 그렇지 않거든요. 그들이 꿈꾸는 사랑이 있고, 그들에게도 사랑이 크고 중요한 문제예요. 그런 걸 로맨틱 터치로 그리는 영화를 만나고 싶어요.”

모든 것을 가진 남자가 사랑 때문에 다시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과정을 따라간 영화는 관능적이고 격정적이다. 순간의 격정에 흔들리는 남자와 성실한 가장이자 성공한 정치가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영화에서 ‘마성’이라 불리기에 손색없는 제레미 아이언스의 치명적인 매력이 아찔하다.
배종옥│사랑의 여주인공을 꿈꾸게 하는 멜로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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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Les Amants Du Pont-Neuf)
1991년 | 레오 까락스
“개봉 당시에도 물론 너무 충격을 먹고, 심장이 뛰도록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최근에 다시 보니까 ‘아, 저게 그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구나’ 하는 걸 새롭게 느꼈어요. 젊어서 봤을 때랑 달랐어요. (웃음) 젊었을 때는 영화의 어떤 이미지만 봤다면 이번에는 내면을 본 것 같아요. 을 예전에는 새롭고 충격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서 다시 보니까 사랑의 의미가 뭔지 질문을 던지는 영화더라구요.”

당신이 아는 낭만의 도시 파리는 여기에 없다. 고개를 돌리고 싶을 만큼 헐벗은 모습의 도시에서도 가장 남루한 미셸과 알렉스는 거리에서 만나고, 폐허 같은 퐁네프다리에서 서로를 품는다. 보고 나면 온 몸이 아플 만큼 극단적인 두 사람의 사랑을 보여주는 몸의 언어는 절절하다. 레오 까락스 감독의 연작 중에서 그의 페르소나, 드니 라방이 가장 돋보인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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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잘 만든 드라마로 여러 사람을 울렸던 원작에서 출발한 데다 죽음을 앞둔 어머니로 인해 바뀌는 가족이라는 익숙한 모티브를 가진 은 배종옥에게 불리한 싸움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따지자면 사랑 얘기는 더 흔하잖아요. 누가 누구를 사랑했고, 그들의 갈등이 어떤 결말을 맞는지도 우리 모두 다 알잖아요. 고대 이후로 계속 되풀이되었던 이야기라도 그걸 어떻게 푸느냐가 문제지 소재 자체가 문제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미 어떤 경지에 다다른 연기력의 ‘국민 어머니’들은 전국의 불효자를 충분히 울렸다. 애끓는 모정, 자식들의 뒤늦은 후회는 익히 보아왔다. 그러나 배종옥이 인희가 되어 고통에 몸부림칠 때, 그러면서도 자식들에게 해가 될까 비명을 애써 참아 누를 때 눈물을 참아 내기란 힘들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배우의 힘이다.

글. 이지혜 seven@
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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