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숙(염정아)과 지훈(지성)은 하늘에서 사라졌다. 길고 지난했던 한 여자의 외로운 인생도, 자신의 존엄을 찾기 위한 여정도 가장 높은 곳에서 그렇게 끝이 났다. MBC 는 대한민국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재벌드라마로 시작해 인간임을 힘겹게 증명하던 복수극을 건너 결국 구원을 이야기했던 드라마로 기억될 것이다. 소리없이 사라져버린 두 사람의 엔딩이 실망스러울수도 있고, 되려 본인마저 잊고 있던 감정을 복기시켰을수도 있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철옹성 같던 정가원은 아직도 사회 곳곳에서 조용히 숨쉬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괴물이 될 것인가, 인간임을 지키고 살아갈것인가. 윤이나, 김선영 두 TV평론가가 마지막 정가원의 내부를 들여다보았다./편집자주

MBC 는 가면을 쓴 드라마다. 재벌가의 암투와 경쟁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전개됐던 4화까지, 이 드라마는 재벌에 대한 탁월한 묘사와 함께 ‘로열 패밀리들’과 K라고 불리는 김인숙(염정아)을 대비시킴으로서 재벌과 한국 사회의 계급 구조에 대한 흥미로운 텍스트로 읽혔다.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축이 K였던 김인숙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불릴 능력을 갖춘 김인숙으로 이동하면서 는 비참한 상태로 18년의 시간을 살아온 한 여인의 복수극으로 변했다가, 중반 이후로는 인숙이 김마리였던 과거가 불러온 잔인한 운명과 안간힘을 다해 싸우는 투쟁기가 되었다.

이 드라마가 김인숙이라는 한 여인에 대한 미스터리로 바뀌는 기점이 되었던 8회, 조니(피터 홀맨)가 사라진 것을 알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인숙을 향해 엄 집사(전노민)는 “돌아서! 무대로 돌아가!”라고 외친다. 가 다중적인 가면을 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숙은 JK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자신의 원래 모습을 감추고 ‘연기하는 자아’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숙의 복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까지는 그녀의 얼굴에서 누구도 복수의 욕망을 읽지 못해야 하고, 그녀가 “JK와 바꾼대도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드러내지 않기 위하여 끝까지 숨겨야만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가면을 쓰고 있는 건 인숙만이 아니다. JK 사람들은 모두 가면을 쓴 존재들이다. 진심이 들키거나 마음을 읽히는 것이 수치라고 여기는 재벌가의 사람들에게는 위악과 위선의 가면이 다양한 종류로 준비되어 있다. 진짜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의심하며 수많은 함정을 파놓고 서로의 약점을 쥐려고 한다. 는 이들이 쓴 가면을 한 꺼풀씩 들추어내면서 가면 아래 맨 얼굴에 인간적인 표정이 어리는 것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인간의 증명을 위해 포기한 것들
<로열 패밀리> vs <로열 패밀리>│밀실 가면극의 공포
vs <로열 패밀리>│밀실 가면극의 공포" />이런 점에서 는 철저하게 위악적이다. 이 드라마는 인숙이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키를 끝까지 쥔 채로, 그녀가 악마일 수도 있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가장 사랑했던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JK 회장의 얼굴을 하고 있어야 했던 공순호와, 상처받은 조니를 두고 JK클럽 사장 취임식 단상에 올랐던 인숙의 얼굴은 섬뜩하도록 똑같다. 이들이 괴물의 얼굴을 하고 있을 때, 가장 흉측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에만 인간적인 감정과 진짜 속내가 드러나며 그 순간의 얼굴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은, 각자의 방식으로 상대방과의 다름을 증명하고자 애썼던 공순호와 김인숙 모두에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변해가는, 혹은 원래부터 그랬는지 모를 인숙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숨겨진 과거의 흔적이 하나 둘 드러나면서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그녀를 믿고 사랑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 것은 비단 지훈(지성) 만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와 인숙이 그토록 증명하고자 하는 것, 인숙이 인간인가 하는 질문은 보는 이들에게 더 간절하게 다가온다. 가 초반의 무서운 질주와 흥미로운 소재를 포기하면서까지 얻고자 한 것은 인숙이 바란 것과 다르지 않다. 인숙이 인간인 것이 증명되지 않으면, 이 드라마는 끝날 수가 없다. 하지만 극이 진행되며 스스로가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 뜨거운 피가 돌고 감정이 살아있고 죄책감이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은 죽어간 사람들뿐이었다. 그래서 공순호 회장과 인숙이 원한 피날레는 결국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숙이 내밀었던 구원의 손길은 결국 그녀 자신을 구원하는 것으로 되돌아왔다. 가장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드라마 속에서 유일하게 연기하지 않는 존재인 지훈은, 곧 의 맨 얼굴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에야 드러낸 의 맨 얼굴
결국 가 하고 싶었던 말은, 스스로가 저지른 죄 앞에서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고 소리내어 말하고, 괴물이 될 가능성을 언제나 안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한 뒤에, 서로가 서로를 구원해보자는 것이었다. 절박하게 진실을 말할 것을 요구하는 지훈에게 인숙은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으로 “진실이 뭘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진실은 결국 인숙을 구원하고 그녀가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되었다. 욕심과 의심이 도처에 만연하고 진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사회 역시 정가원과 다를 게 없다고 할 때, 그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이 여기 있다. 임윤서(전미선)처럼 모든 것을 버려두고 떠나거나, 공순호의 뒤를 이은 조현진(차예련)처럼 지옥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설 수 없다면, 고통스러워도 진짜 얼굴을, 진실을 찾기를. 가면을 벗어 던지고 “잔인한 연극”를 끝낸 뒤, 이름을 가진 한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마지막에야 드러낸 의 맨 얼굴은, 휴머니스트의 그것이었다.
글 윤이나

MBC 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밀실극처럼 보인다. 극의 중심 무대인 JK 그룹의 본가 정가원은 절대 군주 공순호 회장(김영애)의 통제와 감시 아래 놓여있는 폐쇄 공간이며, 그 안의 인물들은 그녀의 시나리오에 종속된 배우들처럼 움직인다. 정가원 내부 곳곳에 설치된 CCTV와 도청 장치, 수시로 펼쳐지는 수색 작업은 이러한 밀실성을 더욱 강화하고, 거대한 세트 안의 인물들을 잡아내는 풀숏, 롱숏의 활용 역시 같은 기능을 한다. 그리하여 는 그 폐쇄적인 내부에서 적자생존의 ‘아귀다툼’을 벌이는 한 재벌가의 잔혹한 밀실극을 통해 우리 사회의 공고화된 계급 구조와 그 병폐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로열패밀리라는 ‘불멸의 신성가족’
<로열 패밀리> vs <로열 패밀리>│밀실 가면극의 공포
vs <로열 패밀리>│밀실 가면극의 공포" />극중에서 묘사되는 우리나라는 이른바 ‘JK 공화국’이다. “대한민국 법 질서 위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반세기동안 기백이 넘는 정치인들을’ 돈으로 좌지우지해온 JK의 초법적 특권 계급으로서의 모습은, 재벌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전근대적 계급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현대판 왕족임을 알려준다. JK그룹은 공 회장 일가가 사유화한 재산일 뿐이고, 정가원은 그 자체로 중세의 성과도 같은 계급 사회의 풍경을 배경만 현대로 바꿔놓은 공간이다. ‘로열 패밀리’들의 와인 타임을 위해서 상주하고 있는 소믈리에처럼, 법무팀, 보안팀, 전략기획팀 등의 전문직 직원들 역시 JK가의 사적 업무를 담당하는 메이드와 다름이 없다. 대물림을 통해 “2대, 3대에 걸쳐서 부와 명예를 쌓은 귀족들”이 되어오는 동안 이들은 현대 사회 ‘불멸의 신성가족’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들이 부를 독점하고 유지하기 위해 펼쳐온 폭력적 폐쇄성의 전략은 그 내부에 심각한 부패의 냄새를 풍기게 한다. “여긴 누구도 가족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병준(동호)의 말처럼, 공 회장 일가는 “JK에 이득이 되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철저한 이익 논리를 따른다. 가족극 특유의 온 식구 식사신 같은 클리셰조차 찾아보기 힘든 이 일가는 가족애는커녕 냉정한 계약관계로 맺어진 집단이다. 그들은 언제나 대화 대신 거래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제거된 인간의 감정은, 이들을 감정적 금치산자이자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는 싸이코패스로 만든다. 공 회장은 애증과 의심 때문에 아들 죽음의 한 원인을 제공하고, 동진(안내상)은 윤서(전미선)에 대한 비뚤어진 사랑과 질투로 엄 집사(전노민)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그 지옥 한가운데서 ‘그들의 증오를 먹고 자란’ 또 다른 괴물이 탄생한다.

하지만 결국 구원에 관한 이야기
인숙(염정아)은 말하자면 정가원이 억압하고 배제해 온 것들로만 구성된 존재였다. 그녀는 고아에 하층계급 출신이며 유일하게 조건 없는 순수한 사랑으로 가족의 인연을 맺는다. 인숙은 ‘공 회장 같지 않아서’ 조 회장과 동호에게 사랑받았고, 밑바닥 출신의 아픈 과거와 상처의 경험으로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알고 있었다. 공 회장이 인숙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한 것은, 그녀가 그처럼 폐쇄적인 정가원 내부의 원칙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가원 입장에서 인숙은 그들의 모순과 균열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았다. 그들은 누구보다 인간다웠던 인숙을 인간 취급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괴물성을 부정하려 했고, 나아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고 싶으면 똑같은 괴물이 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는 이 근본적으로 닫힌 사회에 대한 밀실의식 가운데서도 한줄기 구원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너무도 불완전해서 악마가 되기 쉬운 인간의 나약함과 모순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생각해보면 엄 집사와 지훈(지성)과 인숙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완전한 사랑이 아닌, 죄책감과 연민과 동지의식이 바탕이 된 나약하고 비천한 이들의 연대였다. 인간의 불완전함과 치부를 감추는 가면을 쓰고 완벽한 괴물이 되어간 정가원 사람들과 달리, 그들은 과거에 대한 반성을 통해 성장하는 사람이 되는 길을 선택한다. 물론 공고화된 이 밀실 같은 폐쇄 사회는 애매한 실종의 결말로 타협을 해야 할 만큼 탈출조차 꿈꾸기 힘든 세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훈이 패닉룸의 금고 안에서야 인숙의 존엄을 지킬 실마리를 겨우 찾아냈듯이, 부끄럽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인간의 깊고 어두운 심연을 응시하고 반성해야 비상구를 열 수 있다고.
글 김선영

글. 김선영(TV평론가)
글. 윤이나(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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