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찍은 영화 중 어떤 게 대표작이냐고 생각하느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없다고 해요. 나는 영화를 찍고, 녹음이 끝나고, 시사가 끝나면 그 이후 내 영화를 거의 안 봐요. 분명 찍을 때 소홀히 하는 것 없이 쥐어짜듯 최선을 다해 찍었다고 생각한 게 시간이 흘러서 보면 다 결함으로 드러나요. 어쩌면 내가 욕심이 너무 많아서 스스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테마 영화 추천’을 위해 본인의 영화를 추천해달라는 요청에 임권택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대가라는 말로도 수식하기 어려운 이 노감독의 지나친 겸양일지도 모르겠다. 한국 영화 최초로 100만 관객을 넘기고 일종의 신드롬을 만들었던 <서편제>,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됐던 <춘향뎐> 등을 비롯해 50여 년 동안 수많은 작품과 수많은 성과를 냈던 그의 과거를, 아니 현재 진행형의 도전들을 따져본다면 더더욱. 하지만 엄청난 필모그래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 대해 채워지지 않는 욕심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때문에 그 오랜 시간 동안 영화계의 장인으로 남아 있었다는 게 더욱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나는 영화 만드는 일로 일생을 살겠지만 스스로 완벽하다 여기는 작품은 평생 못 찍을 거요. 단지 완성을 향해서 꾸준히 열심히 노력하다가 끝나겠지.” 노감독의 담담한 고백은 그래서 겸손을 가장한 허세 따위와는 격이 다르다.

그래서 이번 ‘테마 영화 추천’은 임권택 감독 본인의 뜻을 존중해, 객관적으로 성과가 있다고 평가하는 작품을 임의로 골라 그에 대한 감독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단순한 편의의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 몇 개 작품을 골라 추천하는 게 불가능한 사람, 그에 대해 우리가 반박할 수 없는 사람, 유일무이한 대가 임권택이기에 그래야만 했다.




1. <아제 아제 바라아제> (Aje Aje Bara Aje)
1989년 | 임권택

“나는 60년대에 액션물을 많이 찍은 감독이에요. 그런데 그런 작품은 서구 작품을 흉내 낸 작품이지, 우리의 삶을 담아낸 작품이 아니란 말이요. 그렇게 십 수 년 찍고 나서 그런 걸 안 찍겠다는 생각으로 한 감독으로 살아남기 위해 서양의 스피드함과는 다른 한국 영화를 찍겠다고 생각했고, 그러면서 나온 <아제 아제 바라아제> 등을 영화제에 출품했지. 그러면서 강수연 양이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탔고. 그런데 내가 마음이 급해졌어요. 내 영화를 통해 여자배우들이 매년 상을 타는데 나는 성과를 못 낸다는 기분이 들었지.”

출가한 윤봉 스님을 아버지로 둔 고등학생 순녀(강수연)는 은선 스님을 스승으로 두고 아버지처럼 출가해 비구니로의 삶을 산다. 하지만 박현우라고 하는 남자를 죽음 직전에서 구하며, 그녀는 속세의 번뇌와 엮이고 그 때문에 파계승 취급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번뇌와 카르마 속에서 그녀는 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에 따른 아픔을 알게 되고, 진리의 가르침이란 오히려 산사가 아닌 이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2. <길소뜸> (Kilsodeum)
1985년 | 임권택

“나는 조선시대나 창씨개명, <하류인생>에서 그린 60년대 등등 한국의 수많은 시대들을 그려왔어요. 그렇게 시대를 증거하는 거지. 그런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내 영화들을 봐야지, 하나하나 쪼개서 보면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지. <길소뜸> 역시 이산가족 찾기가 벌어지던 시대상을 통해 우리나라의 분단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작품인데, 이 역시 내 영화 전체의 맥락에서 봐야하는 작품이오.”

1983년 KBS를 통해 진행된 이산가족 찾기는 지금의 남한이 얼마나 큰 아픔을 묻어둔 분단국가인지 보여줬다. <길소뜸>은 바로 그 이산가족 찾기에서 시작해 분단이 개개인의 삶을 어떻게 피폐하게 했는지 보여준다. 황해도 길소뜸에 살던 화영은 이산가족 찾기를 통해 옛 애인 동진을 찾고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추측되는) 성운을 찾는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들의 삶에서 지워버리려 한다. 상처란 결코 쉽게 아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 <장군의 아들> (The General`s Son)
1990년 | 임권택

“<아제 아제 바라아제> 이야기를 했던 것에 부연하면, 이제 나도 성과를 내야겠다고 고민하고 있을 때, 태흥영화사에서 <장군의 아들> 연출을 제의했어요.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지. 나는 20년 전에 액션 영화를 찍었던 저질 감독이었다가 그걸 벗어나고 있는데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그 때 제작자가 사내가 없는 시대에 남자 이야기를 하자고 계속 요청을 했지. 지금 생각에 <장군의 아들> 시리즈를 찍길 잘한 건, 덕분에 <서편제>를 제약 없이 찍을 수 있었단 거요.”

임권택 감독 본인에게 <장군의 아들>을 그것도 3편까지 시리즈로 만든 것은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다른 건 몰라도 협객의 도는 지키고자 했던 김두한, 신마적, 쌍칼 등의 이야기는 21세기에 나오는 수많은 조폭 영화들과는 그 무게감이 전혀 다르다. 그래봐야 깡패들인 이들을 미화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에서 중요한 건, 미화된 김두한이 아닌 그 지랄 맞고 주먹이 앞서는 시대에도 옳고 그름이 중요하다는 메시지 아닐까.



4. <서편제> (Seopyonje)
1993년 | 임권택

“처음 내가 제작자에게 작품 제의를 할 때, 이건 흥행할 수 없는 작품이라고 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감독도 없는데, 제작자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어요. 그래도 제작해보자 해서 찍는데, 현장에서 판소리를 틀어놓으면 젊은 스태프들이 별로 좋아하질 않아요. 그런데 촬영 후반부 즈음 가니까 다들 조금씩 그 소리를 들으며 들썩거리는 걸 보고 ‘아, 관객 5만만 들면 체면치레는 하겠구나’ 싶었지. 그런데 100만을 넘겼어요. 정말 내가 흥행을 재는 재주가 없어요.”

<서편제>가 임권택 감독 최고의 영화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대가였던 임권택 감독의 명성을 범 대중적으로 알린 단 하나의 영화를 고르라면 단연 <서편제>다. 이청준의 원작 소설을 스크린에 담은 이 영화에서 임권택 감독은 한을 통해 궁극의 소리를 찾으려 했던 아비와 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리를 위해 딸의 눈을 멀게 하는 아비의 집념은 자칫 광기처럼 그려질 수 있지만, 차곡차곡 부녀의 이야기를 쌓아가며 임권택 감독은 그것이 가슴 저린 예술혼임을 관객에게 납득시킨다.



5. <하류인생> (Raging Years)
2004년 | 임권택

“관객들 중 일부는 <장군의 아들> 이후에 임권택이 또 액션 영화를 찍었나 보다, 생각하고 온 것 같기도 해요. 그렇게 보면 한참 못 미치는 영화겠지만 나는 그 당시 그런 의도가 아니라 60년대 그 때의 깡패 출신이 시류 안에서 미군 부대를 끼고 기생하듯 살아가는 ‘하류인생’을 그리고 싶었던 거지. 만약 액션물을 찍고 싶었으면 구성부터 그러면 안 되는 거였지.”

이제는 영화와 뮤지컬 양쪽에서 최고의 배우가 된 조승우지만, 무명이었던 그를 발탁해 <춘향뎐>의 이몽룡으로 삼은 건 임권택 감독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 번 조승우라는 배우에게서 험한 시대를 살아가는 야비하고도 안쓰러운, 주먹은 세지만 권력과 시대 앞에서 무력한 ‘하류인생’의 얼굴을 끌어냈다. 그 얼굴은, 그리고 영화가 그려내는 풍경은 결코 아름답지 않은 살풍경이지만, 또한 외면할 수 없는 우리 현대사의 원죄이기도 하다.




그의 101번째 영화. 임권택 감독의 최근작 <달빛 길어올리기>를 수식하는 설명이다. 물론 100이라는 숫자를 하나의 완결로 보고, 그 다음을 새로운 시작인양 말하는 것은 십진법의 세계를 사는 이들의 불필요한 호사일 수 있다. 중요한 건, 100이라는 숫자만큼 압도적으로 누적된 이 노감독의 경력 안에서만 지금 이곳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달빛 길어올리기> 하나만을 놓고 보면 아쉬운 요소들도 있다. 조선왕조실록 복본 사업에 참여했던 전주시 공무원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면서 종종 관제 영화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서편제>나 <천년학> 같은 작품을 통해 잊힌 우리의 문화를 관객에게 알리고, <길소뜸>과 <하류인생> 등으로 현대사의 아픔을 증언하려 했던 그의 백 개 필모그래피를 볼 때, 비로소 <달빛 길어올리기>가 따라가는 한지 복본 사업의 의미를 공감할 수 있다. 물론 작품은 온전히 그 작품 하나로만 파악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론 그럴 수 없는, 혹은 그래선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그 대상이 임권택이라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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