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에 드라마를 시작했다. 2003년에야 ‘재발견’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데뷔 20년째. 염정아는 인생도, 연기도 길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염정아
남주희: 염정아가 고교시절 친했던 친구의 언니로, 훗날 데뷔작 MBC 에 함께 출연한 연기자. 아역 배우 출신이던 남주희는 아직 연기가 어색하던 염정아에게 많은 조언을 해줬다고. 염정아는 어린 시절 연극반 오디션을 보는 자리에서 뇌종양에 걸린 소녀의 독백을 연기하다 연기자가 되기로 결심했고, 대학도 연극영화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데뷔작에서 그가 맡은 배역은 자신의 실제 성격과 달랐고, 연기에 몰입하기 어려웠다. 대중에게는 연기자로서의 의지보다는 미스코리아라는 경력이 더 눈에 띄던 시절.
김남주: 미스코리아 출신에 고양이 같은 외모를 가진 신인에게 들어오는 배역은 대개 강한 역할들이었다. 김남주와 함께 출연한 SBS 에서 염정아는 강한 성격의 악녀를 연기했고, 드라마의 인기와 함께 주목 받았다. 하지만 착한여자가 신데렐라가 되는 이야기가 대세이던 당시 트렌디 드라마에서 강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배우가 선택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은 넓지 않았다. 또한 SBS 같은 작품에서 연기한 캐릭터는 말 그대로 전형적인 악녀 캐릭터. 그 사이 영화 , 등에도 출연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특히 는 노출 연기만이 부각되면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스타이긴 했지만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줄 기회도, 그런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누군가 자신이 ‘종이인형’ 같다는 말에 자신의 연기가 가짜 같다는 이야기인가 싶어 충격 받았고, “산다는 게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1999년, 염정아는 몸에 화가 쌓여 피부가 안 좋아질 만큼 우울증에 걸렸다.
심은하: 1999년 출연한 영화 의 주연. 염정아는 원래 친분이 있던 심은하와 연기하는 것이 좋아 피부가 안 좋은 상태에서도 을 찍었다. 염정아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찍은 영화라지만, 은 염정아에게 작은 분기점이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악역에 가까웠지만, 속 염정아는 악녀이기 보다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여자였다. 무슨 일을 벌이는지, 심은하가 연기한 배역과는 어떤 관계인지 모호하다. 속도 알 수 없고, 어딘가 위험해 보이고, 동시에 예민한 성격을 가졌을 것 같은 이미지를 보여준다. 외모에서 나오는 이미지나 배역의 성격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독특한 분위기로 연기를 납득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염정아는 “뭔가를 꽉 쥐고 놓지 않고 있음”을 깨닫고 좀 더 마음을 편하게 갖기 시작했고, “연기도 편하게 할 수 있었”다.
김지운: 영화 의 감독. 염정아를 캐스팅한 뒤 그가 굉장히 예민하고,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 보고 “저 모습을 그대로 캐릭터에 얹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그 순간 염정아는 대중에게 새롭게 재발견됐다. 에서 그는 자신을 계모로 둔 두 딸에게는 위험한 여자였지만, 내면적으로 위태로운 여자였다. 마치 목을 졸린 채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작은 새처럼, 의 염정아는 예민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작품 전체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불어넣으며 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MBC 에서는 이 예민함을 일과 삶에 지친 여성의 모습으로 풀어냈다. 지극히 예민하고 우아한 여자가 전쟁터 같은 일을 할 때 생기는 인생의 고단함이 묻어나자, 시청자는 부하직원의 연인을 빼앗은 그의 심리에 공감했다. 미스코리아 출신, 트렌디 드라마의 악녀가 어울리던 배우는 그렇게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여성의 내면을 보여줄 수 있는 연기자로 TV에 돌아왔다.
이세영: 영화 에 함께 출연한 배우. 과 가 염정아의 날씬한 몸매만큼이나 연약할 것 같은 여자의 내면을 보여준 작품이라면, 와 은 그가 평소 다른 사람 앞에서 보여주는 모습을 드러낸다. 염정아는 어린 시절 남자아이와 싸워서 코피를 터뜨릴 만큼 개구쟁이였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랑말랑한 성격”이라고 자부한다. 하지만 어떻게든 서울에서 교사로 일하려는 의 모습이나, ‘구로동 샤론스톤’이라는 별명을 가진 영화 의 여자 사기꾼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넉살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어느 순간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신경질적으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예민한 성격에 우아하게 사는 게 어울릴 것 같은 여자가 현실이 받쳐주지 않을 때 생길 수 있는 일. 를 기점으로 염정아는 자신의 개성을 평범한 일상에도 녹여내기 시작한다.
허일: 염정아의 남편. 미남이다. 그리고 의사다. SBS 에서 염정아는 직장에서 인정받던 커리어우먼 시절과 달리 못난 남편과 두 아이 때문에 온갖 스트레스를 겪는 여성으로 나온다. 아이 엄마가 돼서도 여전히 현실이 받쳐주지 못해 부글부글 끓는 속을 견디며 세상과 만나는 여성인 셈. 하지만 실생활에서 염정아는 허일 같은 남편이 있고, 두 아이를 가지며 행복한 생활을 하는 중이다. 또한 미스코리아였고, 미스 인터내셔널 대회 3위였으며, 청춘스타의 시절을 보낸 뒤에는 의 최동훈 감독이 “저렇게 예쁜데 저렇게 연기를 잘한다는 걸 믿을 수 없다”고 할 만큼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았다. 다 가진 인생. 또는 가장 실속 있는 커리어. 지진희는 영화 < H >를 함께 찍으며 알게 된 염정아에 대해 “그 때 내가 여자친구가 없었다면 결혼하자고 할 만큼 매력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극찬을 하기도 했다.
지진희: 염정아는 지진희와 다시 만나 영화 을 찍었다. 에서 염정아는 학생운동을 하다 20여 년 동안 수감된 지진희를 기다리는 미술가를 연기한다.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험난한 시대 속에서도 그의 우아함은 훼손되지 않았고, 20여년의 시간에도 미술가의 예민한 신경은 무뎌지지 않았다. 에서 염정아는 모든 것이 변하고, 훼손된 시대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무엇이었다. 그 여성의 모습에는 시간의 무게를 견뎌내면서 자신의 광채를 잃지 않고, 시대의 상처를 감싸 안는 힘이 있었다. 불가사의할 만큼 타고난 우아함과 예민함에 20여년의 시간이 쌓이면서 염정아는 놀라운 배우로 변하고 있다.
차예련: 에 이어 MBC 에 함께 출연하는 배우. 에서 염정아가 연기하는 김인숙은 근본적으로 착하지만 JK그룹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 악녀 같은 모습도 보여주고, 자신이 후원했던 한지훈에게는 착하고 유순한 모습을 보이지만, 혼자 있을 때는 모든 상황들을 생각하느라 지극히 예민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또한 김인숙은 한 아이의 어머니고, 자신을 구박하는 큰동서마저 “K(김인숙)는 품위라도 있지”라고 할 만큼 우아한 분위기를 가졌다. 김인숙의 복합적인 내면은 재벌가에서 이름 대신 ‘K’로 불린 18년 인생이 만들어낸 결과다. 그리고 염정아는 연기 데뷔 20년째에 선악으로 나눌 수도 없고, 진심이 무엇인지도 알기 어려운 여주인공을 연기하며 화제의 중심에 섰다. 지극히 극단적인 상황과 강렬한 캐릭터가 많은 에서 섬세함과 강렬함을 동시에 소화하는 염정아의 연기는 작품 전체가 오버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준다. 김인숙처럼, 염정아의 연기는 지난 20년 동안 연기하고, 고민하고, 절망하고, 다시 전환점을 찾으며 완성된 결과다. 차예련 같은 젊은 연기자에게 염정아는 배우의 길에 관한 하나의 지침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미스코리아였다. 청춘스타였다. 악녀였다. 그 모든 시간을 지난 지금, 염정아는 염정아다.
Who is next 염정아가 에서 함께 출연한 김남주 주연의 MBC OST에 참여한 김건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