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계절이라 한다면 김태용 감독은 ‘가을’ 같은 사람입니다. 색으로 치면 갈색, 온도로 치면 18도씨 쯤. 봄의 파릇파릇한 생기도, 여름의 씩씩한 정기도, 겨울의 싸늘한 냉기도 없는 이 남자는 대신 가을의 쓸쓸한 훈기를 담아 말하고 웃습니다. 그의 영화도 사람을 닮아서 벚꽃 같은 따뜻한 멜로도, 쾌속 질주하는 뜨거운 액션도, 소름 끼치는 서늘한 공포도 아닙니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공포라고 하기에 두려움 속에 숨긴 사랑이 너무 아련했고, <가족의 탄생>을 멜로라고 하기에 사랑 넘어 사람의 그림자가 너무 짙었습니다. 그리고 <만추>를 액션이라 하기에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 죽는 그 풍경마저 너무 처연합니다. 그래서 끝내 그의 영화를 무엇이라 부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저 매년 가을 찾아오는 몹쓸 병처럼, 우리는 김태용 감독의 세 번째 영화를 탈 수 밖에요. 여기 추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어둔 김태용 감독과의 대화가 있습니다. 독자님 오신 오늘 구비구비 펴십시오.
*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00: <만추>는 원래 오랫동안 염두에 둔 프로젝트였나요?
김태용: 아니요. <가족의 탄생>을 끝내고 멜로영화를 해보고 싶었는데 잘 안 써지더라고요. (웃음) 몇 년 동안 이걸 할까 저걸 할까, 이렇게 써보고 저렇게 써보고 하던 중에 보람영화사의 이주익 대표의 제안으로 시작하게 되었어요. 사실 그동안은 ‘누가 누군가를 만나는 게 꼭 좋은 일일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멜로 시나리오를 구상하다 보니까 계속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한 여자가 감옥에서 나오고 한 남자를 만나고 다시 감옥으로 들어간다는 확실한 설정이 저를 편안하게 해줬던 것 같아요. 어쨌든 유한의 시간이 있는 거니까. 오히려 만나는 동안 어떤 일이 있을까? 이런 생각에 집중하면 되니까.

“원작과 달라야 한다는 스트레스는 없었다”



100: 원작인 신성일 주연, 이만희 감독의 66년 작 <만추>는 감독님도 못 보셨죠?
김태용: 네, 필름이 없으니까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이니까 개봉 시에 본 관객들을 제외하고는 본 사람이 없겠죠. 들은 이야기로는 당시 <만추>를 수입하겠다는 곳이 있어서 스페인으로 원본 네가 필름을 보냈는데 영화사가 공항세관에 낼 세금을 구하지 못해 돌아온 필름을 찾는 걸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소각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안타까운 이야기죠.

100: 어쨌든 그 원본유실사건이 이 작품을 전설로 만드는 데 더욱 힘을 보탠 건 사실인 것 같아요. ‘한국영화사 최고의 걸작’이라는 이제는 누구도 확인할 수 없는 평가에 이어 1972년엔 사이토 고이치 감독의 일본영화 <약속>으로, 1975년엔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 81년엔 김수용 감독의 <만추>로 리메이크 되었다는 것만 해도 이 원작이 얼마나 매력적인가를 증명했다고 볼 수가 있을 텐데, 아무래도 40년 만의 리메이크라는 부담은 피해 갈 수 없는 부분이었을 것 같아요.
김태용: 일본 것은 찾아봤고, 김기영, 김수용 감독님 버전은 예전에 봤는데 이 작품들도 서로 워낙 다르잖아요. 그래서 원작과 어떤 방식으로든 달라야 한다는 스트레스는 없었어요. 대신 40년이 지난 지금 달라진 상황들은 어떻게 극복할까 하는 고민은 계속 있었죠. 마지막으로 리메이크 되었던 1981년만 해도 감옥에서 나온 여자가, 처음 보는 낯선 남자와 연애를 한다는 것 자체가 큰 문제였고, 게다가 어린 남자를 좋아한다는 건 약간 금기였던 거죠. 어떤 내용이 따로 없어도 그것 자체가 센 설정. 하지만 지금은 연하남이 대세고 (웃음) 감옥에서 잠깐 나와 시간이 주어진다면 능력 되면 누구라도 빨리 만나야죠. (웃음) 사람을 만나기까지의 거리감은 사라지고, 사람을 만난 이후에 내적인 거리감은 좀 더 커진 시대잖아요. 그래서 서양인들 눈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말도 안 통하고 문화도 다른 두 사람이 낯선 땅에서 만나는 설정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야 하는 여자라는 설정도 꽤 크지만, 저에게는 동질감과 이질감을 동시에 가진, 다른 언어 다른 문화의 두 사람이 만나서 보내는 며칠이라는 설정이 더 크게 다가왔어요.

100: 그나저나 해외 올 로케이션이라니,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나쁜 일과 상상 이상의 모든 변수가 그 6개월 안에 생길 수밖에 없었겠어요.
김태용: 시애틀에 가서 시나리오 마무리작업하면서 2달, 프리 프로덕션 하면서 2달, 촬영 한 달 반을 하고 왔어요. 그래도 다행히 그동안 ‘외우’는 많았지만 ‘내환’은 없었어요. 한국에서 시애틀로 날아간 한국 스태프라고는 저하고 김우형 촬영감독, 류성희 미술감독, 송종희 분장감독 밖에 없었거든요. 배우들 역시 타국에서 타국의 언어로 영화를 찍다 보니 서로 말하지 않아도 무형의 무언가를 함께 찾아가야 한다는 이해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사람들도 좋고 배우들도 좋았는데 제작여건이 순조롭진 않았어요.

100: 아! 도망갈까? 하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어요? (웃음)
김태용: 도망까지는 아닌데, 아, 잘못 왔다. 망했다! (웃음) 이런 생각은 들었죠. 한 달 반 동안 총 36회 촬영이었는데, 말을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의 문제가 아니라 앞서 언급한 3명의 스태프를 제외하면 모두 미국 스태프를 썼고, 미국 시스템 자체가 우리와 너무 다르니까 제가 적응하는데 애를 먹었어요. 특히 시간의 문제가 컸죠. 우린 6시에 끝낸다 하면 6시 30분이 되기도 하고, 밤새기도 하는데 여긴 딱 6시에 끝나야 되는 거죠. 시간을 지키는 훈련이 안 되어 있어서 초반엔 좀 힘들었는데 중반부터는 적응이 되더라고요. 결국 욕심이 나지만 더 욕심을 내지 않는 부분이 생겼고, 혹은 그걸 맞추기 위해 샷을 바꾸던지 미리 준비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고.

“현빈이 캐스팅되면서 좀 더 경쾌해졌다”



100: 훈이 거울 앞에서 온갖 폼을 잡으며 머리를 빗는 장면이나,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고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안갯속을 걷는 모습에서는 장국영과 제임스 딘의 모습이 스치더라고요. 그런데 사실 현빈이라는 배우는 훈이처럼 인생을 막사는 남자를 연기하기엔 참 바른생활 사나이 같은 이미지가 강하잖아요.
김태용: 예, 참 점잖죠. 똑똑하고 영리하고 어른스럽더라고요, 애 늙은이 같기도 하고. 그래서 서로 욕심이 났던 것 같아요. 바꿔보면 좋겠다. 바꿔주면 좋겠다는 욕심. 고전적인 영웅들 보면 신성일도 그렇고 장국영도 그렇고 얼마나 잘생기고 폼 나요? 그런데 까불기도 잘 까불잖아요. 그래서 당신처럼 잘생긴 배우들이 여유 있고 능청스러운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욕심을 내볼 수 있겠냐, 고 하니까 해보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전에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을 봤는데 좋더라고요. 뭐랄까. 눈을 보면 좀 슬픈 느낌도 있고, 막 명랑하다가도 잠깐 멍해질 때 아득한 느낌도 좋고. 그래서 현빈으로 최종 캐스팅이 결정되고 나서는 남자 캐릭터를 싹 바꿨어요.

100: 어떤 점이 가장 큰 차이였나요.
김태용: 그전까지 써왔던 시나리오 속 훈은 좀 더 어른의 느낌, 우수에 찬 성인의 느낌이 강했지만 현빈 씨가 캐스팅되면서 좀 더 경쾌해졌어요. 애나는 과거에 어떤 큰일을 당하고 난 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풀리거든요. 앞으로 사는 게 좀 재밌었으면 좋겠는 그런 여자. 반대로 훈이는 앞으로 뭔가 크게 당할 것 만 같잖아요. 무식해서 착해서 혹은 겁이 없어서 세상의 불행이 곧 이 녀석에게 찾아올 것만 같은 예감. 너 그렇게 까불다가는 세상에 큰코다칠걸? 그렇게 불안 불안한 기운 때문에 누구라도 얘를 어떻게 해줘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저는 홍콩영화에서 장국영을 볼 때마다 그랬어요. 입으로는 다 덤벼! 누가 날 잡아! 막 까불고 으스대는 순간에도 뭔가 불안했어요. 그런 면에서 애나와 훈이가 교차점에서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100: 탕웨이는 처음부터 이 배우다, 라고 생각한 캐스팅이었나요?
김태용: 스케줄이 안 맞으면 어쩔 수 없지만, 기본적으로는 애나는 탕웨이, 라고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죠. 원작은 볼 수가 없어서 모르겠지만, 그 사이 여자 캐릭터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왜 남동생 같은 사람 있으면 따뜻한 옷도 덮어주고 조금은 기운 빠져 있는 애처로운 누나 있잖아요. 그런데 애나는 좀 더 차가운 사람, 자기를 절제하는 스타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군가 다가오면 ‘어딜! 지금 네가 뭘 원하는 줄 알겠다만, 딴 데 가서 알아봐!’ (웃음)하는. 그렇게 강한데 그 안에 미세하게 떨리는 느낌이 전해지는 인물을 개인적으로 좋아하기도 하고, 그런 캐릭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탕웨이라니 너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100: 외국 배우라서 오는 어려움은 없으셨어요?
김태용: 오히려 다른 언어를 쓰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이 아니라 마음을 읽으려고 더 적극적으로 노력했던 것 같아요. 게다가 촬영 전에 미리 시애틀에 두 달간 머물면서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기 때문에, 우리 사이에는 통역 너머의 언어가 생겼어요. 제가 뭐 영어가 유창한 것도 아니고 그저 슬로우(slow), 돈 스마일(don`t smile), 돈 무브(don`t move), 이런 말이 다인데 그때그때마다 감독이 원하는, 다른 요구의 행간을 읽어내 주더라고요.

100: 한국 대중들에게 탕웨이는 <색, 계>에서 보여준 강인하지만 조금은 어둡고 심각한 이미지가 컸어요. 그런데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인터뷰한 모든 기자가 그녀의 활발하고 오픈된 성격에 반했고, “현빈왔숑, 현빈왔숑”이라는 천재적인 유행어를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면서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태용: 실제로 되게 장난꾸러기예요. (웃음) 물론 처음에 봤을 때는 시나리오 쓰면서 내가 상상하고 기대한 표정과 느낌이 그대로 있는 배우라서 너무 좋았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호기심도 많고 건강한 사람이고 무엇보다도 참 열심히 해요. 애나가 7년간 감옥에 있는 설정이니까 미국감옥도 가고, 죄수들도 만나보고, 이민 온 중국여자들의 삶이 어떤지 통역해주던 여자 분이랑 시애틀의 시장이며 동네며 다 돌아다니고, 현빈과 함께 스태프들 헌팅에 따라가기도 하고, 어떤 일에서든지 상당히 적극적이에요. 아주 고전적인 방식으로 연기를 하는 사람이죠. 사랑하면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너무 정석에 무식한 방법일 수도 있는데, 훈련이 잘 되어 있는 배우들은, 못해도 70 잘해도 80이라면 이런 스타일의 배우는 안 되면 10 잘되면 100 혹은 그 이상을 치는 거죠. 예를 들어 슛 들어가면 1초도 안 돼서 눈물을 펑펑 쏟는 배우와는 달리 탕웨이는 여간해서 잘 못 우는 편이에요. 그런데 한번 울면 정말 마음을 움직여요. 그런 면이 저랑 잘 맞았던 것 같아요.

100: 뭐든지 무식하게 접근하는 방법이요? (웃음)
김태용: 하하하. 아뇨. 나는 무식한 방법으로 열심히 하는 사람을 열심히 안 하게 하는 데 재주가 있는 사람이거든요. 김 빼는 거. 대신 열심히 안 하는 사람을 채찍질해서 잘 하게 만드는 기술이나, 에너지가 없는 사람을 자극을 해서 끌어내는 재주는 없는 것 같아요. 탕웨이는 에너지가 넘쳐나는 배우고 나는 그런 사람을 누그러트리는 걸 잘하고, 그런 면이 맞았던 거라는 거죠. 에너지를 담고 있되 표현하지 말아 달라는 요구를 많이 했어요. 현실의 탕웨이는 표정이 풍부한 사람인데, 영화 속 애나는 표정이 많지 않아요.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생겼다는 게 중요하다”



100: 등장인물의 차림새, 배경 등 많은 것들에서 구체적인 시대성이 배제되어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여전히 아날로그가 지배하는 조금은 20세기적인 풍경이랄까요. 이것도 하나의 의도였나요?
김태용: 그러게요. 캐릭터도, 만남도, 좀 고전적인 편이죠? 사는 공간이면서도 낯선 느낌이 나왔으면 했어요. 훈과 애나에게 미국은 살고 있는 곳이긴 하지만 여전히 이방인으로 대접 받을 수밖에 없는 곳인데. 삶의 공간도 여행지도 아닌, 현실에서 조금은 떠있는 느낌이면 좋겠다고 했죠.

100: 촬영했는데 안타깝게 빠진 신도 있나요?
김태용: 제가 영화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그러는 거 유난히 좋아하잖아요. (웃음)

100: 예전에 인권영화 <달리는 차은>에서 필리핀 엄마가 아기에게 자장가 불러주는 장면을 찍었다가 저작권 문제로 뺐다는 이야기가 기억나네요. <가족의 탄생>에서는 노래 부르던 공효진 씨가 하늘로 날아가고, <만추>에서도 춤추는 커플이 등장하고.
김태용: 그러게요. 그래서 이번에도! 탕웨이에게 노래를 부탁했어요. (웃음) 애나가 중국노래를 혼자 읊조리는 장면이었는데 탕웨이가 노래를 정말 잘하거든요. 결국 한 달 동안 연습해서 그 장면을 찍었는데, 이게 참… 막상 편집하려니 좀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아깝지만 뺐죠. 노래는 좋았는데 결과적으로는 내가 잘 못 찍어서 그래요.

100: 영화를 보는 내내, 저 남자와 여자의 몸과 마음이 언제쯤 폭발할까, 내심 기다리는 관객이 많았을 텐데, 끝내 키스 한번으로 끝나더라고요. (웃음)
김태용: 아무래도 탕웨이란 배우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작품이 <색, 계>였으니 노출이나 애정의 수위는 부담이었죠. 하지만 진짜 고민은 훈과 애나의 감정이 과연 격정적으로 치달을 수 있을까, 였어요. 시나리오에는 격정적인 섹스 신, 이라고 한 줄 써놓긴 했는데 계속 고민이 되더라고요. 애나가 욕정 때문에 마음이 열리는 스타일도 아닌데, 혹시 이들 사이에 격정이 느닷없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 처음엔 그래도 찍자 하는 생각이 있긴 했어요. 그래서 노출 없는 정사 신으로 가보면 어떨까, 아무도 없을 때 버스 의자에서 해볼까, 많은 연구를 했는데 뭘 해도 너무 이상하더라고요. 너무 바보 같고, 가짜 같고. 할 거면 제대로 하고 아니면 말아야지. (웃음) 그렇게 시간을 끌다가 결국 답을 못 찾았던 것 같아요. 최종적으로 아주 조심스럽고 섬세한 키스신으로 결정하게 된 거예요. 끝날 만하면 또 하고, 뭔가 나오나 해도 계속 키스만 해서 체념할 만큼의 롱키스. (웃음)

100: 결국 그런 최종선택이 이들 사이를 맴도는 쓸쓸한 무드는 더한 반면, 대중적으로 쉽게 이해할만한 멜로의 기운을 줄인 것 같아요. 과연 그들이 나눈 게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외로운 순간의 쓸쓸함을 나누는 위로였나, 하는 생각.
김태용: 찍으면서도 계속 그게 숙제였어요. 이 관계가 사랑일까 하는 마음. 그러다가 사랑이 아니면 어때?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안는데 꼭 사랑이어야 해? 너무 추워서 안을 수도 있지 (웃음) 그런 마음도 기본적으로 있었죠. 쓸쓸할 때 추울 때 안아줄 수 사람이 있다는 것, 그런 느낌만으로도 좋을 것 같았거든요.

100: 개인적으로 라스트신이 가장 인상 깊었는데, 많은 관객도 엔딩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더라고요.
김태용: 한 사람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사실 사랑에 빠졌느냐 안 빠졌느냐보다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생겼다는 게 중요한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마지막에 애나의 얼굴에 살짝 웃음기가 맴돌잖아요. 아주 살짝. 그 순간 꼭 누군가가 와서 행복하고, 불행하고 그런 게 아니라, 이제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생겼다는 거, 그것이 끝이 되면 어떨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2년 후에 다음 작품을 들고 나올지도 모른다”



100: 어떤 관객들은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을 찾으러 극장에 갔다가 실망해서 돌아오는 경우도 있고, 어떤 관객들은 며칠 동안 가슴에서 이 영화가 떠나지 않는다는 고백을 하기도 하고, 사실 평가가 극에서 극으로 갈리고 있어요. 감독님에게 <만추>는 무엇을 찾아가는 영화였나요.
김태용: 예전엔 이런 이야기가 있고, 관객이 그 스토리를 알았으면 좋겠고, 그래서 그걸 영화를 통해 표현했던 거라면, <만추>는 영화를 찍는다는 게 뭘까, 라는 것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영화였어요. 카메라가 있고, 그 앞에 사람이 있고, 사람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고, 이 사람의 감정에 어떤 자극을 주는 사람이 나타나고, 결국 새로운 사람의 등장으로 한 사람이 영향을 받는.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떠도는 공기를 과연 카메라라는 것이 포착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마치 대학교 1학년 처음 영화 공부할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그런 질문들이 피어나기 시작한 거죠. <만추>는 무슨 사건이 있어서 사람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사람이 움직여서 사건이 만들어지는 상황이 펼쳐지잖아요. 사실 사람을 움직이는 동력은 호기심이나 욕망, 그 외에도 많은 것이 있겠지만, 만약 스스로도 모르는 어떤 마음이 자신을 움직이게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 그 순간을 영화가 잡아내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관찰 혹은 발견을 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100: <만추> 속 애나의 얼굴은 근래 본 어떤 영화의 주인공보다 아름다웠어요. 코가 높다, 눈이 크다, 얼굴이 브이 라인이다, 그런 객관적 미의 기준이 생각날 틈 없이 정말 아름다운 얼굴. 감독입장으로 탕웨이의 얼굴이 만들어내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언제였나요?
김태용: 정말 살짝, 웃을 때요. 사실 밝게 웃는 건 누구나 잘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살짝 웃는 게 어렵죠. 제아무리 흉악범이라도 밝게 웃으면 속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살짝 짓는 미소라는 게 그 사람의 살아온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니까요. 탕웨이가 그런 미소를 보여줄 때 참 아름답더라고요.

100: 그러게요. 세고 강할 때는 오히려 에너지에 가려 그 진가가 안 보이는 경우가 많잖아요.
김태용: 그럼요. 행동도 그렇고, 말도 그렇고.

100: 그래서 감독님도 살짝 보이는 미소 같은 영화만 계속 하실 건가요? (웃음)
김태용: 아니요. (웃음) <만추>를 끝내고 나서 보니까, 다음 영화는 많이 격정적인 감정을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구를 미칠 만큼 갖고 싶다거나, 누구를 너무너무 미워한다거나. <만추>는 사실 자기 욕망이나 감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 이야기잖아요. 그러다가 우연히 누가 툭 하고 쳤는데 나도 모르게 몸이 떨리는 거죠. 아, 이 느낌은 뭐지? 그걸 포착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어쩌면 조금은 수동적인 사람들의 이야기죠. 다음 영화에서는 내일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지더라도 이걸 하고 죽으리라! (웃음) 같은 적극적인 인물들이 나왔으면 해요. 예전엔 그런 격렬한 감정들이 무서워서 피하려고 했는데, 그 무서움의 끝에서 만난 영화가 <만추>였던 것 같아요. 이제는 좀 더 뜨거운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뭐라고 말해야 하지? 호기심이랄까? 자신감은 아니고….

100: 용기요?
김태용: 네! 용기. 그게 조금 생겼달까.

100: 그렇게 용기 있게! 바로 다음 작품을 준비 중이시라고 들었습니다.
김태용: 아직 확정된 건 아니고 두 가지 프로젝트를 생각하고 있어요. 하나는 조선 최초의 여성 명창 진채선 이야기예요. 당시 남자의 전유물로 인식된 판소리에서, 처음으로 명창의 반열에 오를 만큼 재능이 출중했던 여자였는데 흥선 대원군이 사랑해 첩으로 삼아 궁에 들이면서 판소리 스승이자 연인인 신재효와 헤어지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관계를 둘러싼 사건도 있고요. <만추> 촬영 들어가기 전에 <가족의 탄생> 같이 했던 백연자 프로듀서로부터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꽤 흥미로운 작업이겠다는 생각을 했었죠. 제가 음악영화에 늘 관심이 많기도 하고. 그래서 <만추>를 끝내는 동안 프로듀서와 작가가 한 1년 가까이 어느 정도 작업을 해놓았는데 이제 함께 고민해 볼까 하구요. 다른 하나는 예전에 말씀드린 이혼한 부부 사이에 실종된 아이에 대한 시나리오를 다시 써볼까 하는 마음도 있고요.

100: 그간의 작업 속도에 비하면 계속 빨라지고 계시네요. (웃음)
김태용: <만추>는 이렇게라도 빨리 도망가려고 하지 않으면 나를 너무 오랫동안 붙잡아 놓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여운이 너무 커서. 막 도망가지 않으면 잡고 안 놔줄 것 같아. (웃음) <여고괴담>에서 <가족의 탄생> 사이 7년, <만추>까지 4년, 이제 2년 후에 다음 작품을 들고 나올지도 몰라요.

100: 80살 쯤 되시면 일주일에 한편씩 찍으실 기세네요!
김태용: 하하. 이젠 속도를 더 내고 싶어요.

100: EBS <시네마 천국> 진행도 했고, 대학 강의도 했고, 연극도 연출하고, 연기도 하고, <온 더 로드 투> 같은 음악다큐도 찍고, 여행프로그램에 출연도 하고, 참 우문이지만 김태용이라는 사람은 과연 뭘 하고 싶은 건가, 하는 궁금증이 들 때가 있어요.
김태용: 가끔 인터뷰에서 필모그래피가 쌓이면 어떤 사람으로, 어떤 감독으로 기억되길 바라느냐, 일관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이 있느냐, 같은 질문을 받으면 그냥 억지로 생각해서 대답하기도 하는데 가슴 깊이 생각해보면 그런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물론 내가 삶을 향해 가진 호기심과 관심이 어떤 일관성이 있을 거라는 기대는 있지만, 일관성 있는 무언가를 향해 똑바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단순히 목표를 위해 뭔가를 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그저 이 관심과 호기심이 지그재그, 좌충우돌 가다 보면 언젠가 어떤 방향을 향해, 어디든 가고 있겠죠?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 나도 너무 궁금해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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