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거나 험난하거나. 혹은 둘 다. 배우 이문식이 영화 속에서 보여준 인생은 대부분 그러했다. <공공의 적>의 양아치 이안수는 바퀴달린 의자에 앉아 강철중 형사(설경구)에게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며 취조를 받았고, <마파도>의 충수는 복권당첨금을 갖고 잠적한 여자를 찾으러 갔다가 무시무시한 할매 다섯 명에게 된통 당했으며 <황산벌>의 백제병사 거시기는 영문도 모른 채 전쟁터에 끌려와 죽기 살기로 싸워야 했다. 고생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거시기를 <평양성>이 다시 전쟁터로 불러냈으니, 이 정도면 비극의 끝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억울하고 비극적인 일을 겪을수록 관객들은 오히려 더 크게 웃는다. 그것은 이문식이 지금까지 해왔고 앞으로도 하고 싶은 코미디다. “배우가 개그를 하면 코미디 영화가 망가져요. 그냥 그 배역의 인생을 진정성 있게 연기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웃음이 터져요. <평양성>에서 홀어머니 남겨놓고 군대 두 번 끌려간다는 것 자체가 거시기한테는 굉장히 슬픈 일인데, 사람들은 코믹하게 받아들이잖아요. 마냥 박장대소하는 작품보다 이렇게 페이소스가 묻어나는 작품이 더 맛있는 영화죠.”

그가 수많은 코미디 영화를 통해 보여준 건 광대, 양아치, 병사 등 주로 하층민의 삶이었다. 이 일관된 필모그래피에는 “동네 아저씨처럼 촌스럽게 생기고 순하게 웃는” 인상도 한 몫 했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살아왔던 인생이 영화 속 인물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 올라와서 고생 많이 했죠. 사기도 많이 당했고. 그렇게 어렵고 절박했던 시절이 캐릭터의 인생을 연구할 때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덕분에 표정 연기도 훨씬 수월하죠. 재벌 2세가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사는지는 모르지만, 하층민들의 인생은 단번에 이해가 되요. (웃음)” 그런 점에서 왕이나 장군이 아닌 민초 거시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평양성>은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캐릭터와 장르가 모두 녹아든 작품이다. “이미 <황산벌>에서 사투리로 재미를 봤기 때문에 속편에서는 뭔가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황산벌>의 거시기가 마냥 싸움만 했던 병사였다면, <평양성>에서는 코믹한 모습 뿐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 갑순이를 지켜주는 진지한 모습까지 함께 보여주려고 노력했어요. 좀 더 입체적인 인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죠.” 코미디 하면 이문식이 떠오를 만큼 한 장르에 특화된 배우지만, 그 나름대로의 애환도 있다. “남들이 나오는 코미디 영화를 보면 자꾸 분석하려고 하는 습관 때문에 즐기면서 보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평소엔 스릴러나 공포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에요.” 그래서 지금껏 도전해보지 못했던 스릴러 영화들, 그 중에서도 배우의 힘이 느껴지는 영화 다섯 편을 추천했다.




1.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
1975년 | 밀로스 포먼

“조연들이 살아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죠. 조연이라고 해서 구석으로 밀려나는 게 아니라 주연 같은 연기를 하면서 각자의 몫을 잘 해냈더라고요. 특히, 대니 드비토나 크리스토퍼 로이드의 연기가 인상적이었어요. 이 영화가 나오고 3~4년 후에는 모두 주연을 꿰차셨더라고요. 연극할 때 처음 본 영화인데, 그 후로 한 10번 정도 봤어요. 인디언 추장이 정신병원에서 탈출하는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요.”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이며 인간이 인간을 구속할 수 있는 규율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교도소에서 정신병원으로 후송된 맥머피(잭 니콜슨)와 무자비하게 권력을 행사하는 수간호사의 관계를 통해 이 질문들의 해답을 찾아나간다.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실제 정신병원에서 생활한 것으로 알려진 잭 니콜슨은 이 영화로 제48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 <택시 드라이버> (Taxi Driver)
1976년 | 마틴 스콜세지

“트래비스 브킬이 뉴욕에서 무료하게 택시 운전을 하다가 뭔가 해보려고 하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죠. 주인공이 거울 보면서 멋 부리는 모습을 집에서 따라한 적도 있고요. 로버트 드니로가 트래비스 역으로 출연하는데, 이름 있는 배우들은 제 값을 하는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이 분이 나온 영화를 계속 찾아보게 되더라고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한 작품이자 배우 로버트 드니로와 조디 포스터를 발굴한 영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불면증에 시달리는 택시기사 트래비스를 뉴욕의 황량한 밤거리에 던져놓았고, 로버트 드니로는 풍부한 표정연기를 통해 캐릭터를 사실적으로 표현해냈다. 이렇게 탄생한 마틴 스콜세지-로버트 드니로 콤비는 이후 <분노의 주먹>, <좋은 친구들>, <케이프 피어>, <카지노> 등을 함께 작업했다.



3.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84년 | 세르지오 레오네

“어떤 영화에 한 번 꽂히면 여러 번 반복해서 보는 편인데, 이 영화도 5번 넘게 본 것 같아요. 로버트 드니로(누들스 역)가 굉장히 악역으로 나오는데, 그 인물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잘 표현했어요. 심지어 공감이 갈 정도였으니 그만큼 배우의 내공이 대단했다고 볼 수 있죠.”

갱스터 영화의 교과서로 꼽히지만, 휴먼스토리의 색깔도 짙은 작품. 어린 시절 좀도둑질을 시작으로 범죄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누들스는 어떻게든 친구들과의 우정을 지키려했으나 결국 친구와 첫사랑, 아메리칸 드림 모두를 빼앗긴다. 가장 불행한 삶, 엇갈린 인생을 살았던 남자. 이문식이 그에게 공감대를 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4. <케이프 피어> (Cape Fear)
1991년 | 마틴 스콜세지

“이 영화에서도 드니로 형님이 악역으로 나와요. (웃음) 아주 질 나쁜 사람이죠. 보통 선악이 있으면 선한 인물한테 마음이 가야 되는데, 이상하게 악역을 응원하게 만든 영화였어요. 배우의 힘이 중요하다는 걸 느끼게 해 준 작품이라 할 수 있죠. 그래서 배우들끼리 영화 얘기할 때도 <케이프 피어>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해요.”

자신이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는 증거를 은폐한 변호사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애인을 성폭행하고 일가족 모두를 위협하는 맥스(로버트 드니로). 16세 소녀를 강간한 사람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없다고 자의적으로 판단해 의뢰인의 형량을 늘린 샘(닉 놀테). 두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나름대로 뚜렷한 논리와 신념을 갖고 있다. 선악의 경계가 흐릿한 영화 <케이프 피어>에서 과연 누가 더 악마인지 판단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5. <분노의 역류> (Backdraft)
1991년 | 론 하워드

“극 중에 “You go, We go”라는 대사가 있어요. 네가 가면 우리도 간다. 말 한마디에 많은 의미와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 대사인데, 그게 참 맛있게 느껴지더라고요. 우리나라로 치면 드라마 <다모>에서 “아프냐? 나도 아프다”에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만날 쉴 새 없이 떠드는 역할만 하니까 언젠가는 이런 대사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화재 현장에서 포착한 끈끈한 형제애와 동료애를 담아낸 재난영화. 화염 속에서 자신을 버리고 가라는 동료 소방관을 향해 스티븐(커트 러셀)은 ‘You go, We go’라는 짧지만 강렬한 한 마디를 남겼다. 비단 이문식 뿐만 아니라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뇌리에 오랫동안 남은 명대사.




“영화든 드라마든 조연들이 살을 잘 붙여줘야 작품이 재밌게 나와요. 주연은 시나리오에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모두 나와 있지만, 조연은 그런 부분이 부족해요. 자신이 맛깔나게 살릴 수 있는 거리도 많고 상상할 여지도 많기 때문에 연기하는 재미가 쏠쏠해요.”

조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지닌 그는 MBC <짝패>에서 거지 왕초 장꼭지 역을 맡았다. “자기 자식한테는 눈물 나게 잘해주는데 다른 아이들한테는 못되게 구는 아버지 역할이에요. 인간의 양면성과 해학적인 재미를 보여주는 인물이에요.” 그는 “누가 저한테 왕이나 장군 역할을 시켜주겠어요”라고 농담 섞인 푸념을 늘어놓았지만, 그가 <짝패>에서 보여줄 왕초가 거지들 사이에서는 어엿한 넘버원인 것처럼, 이문식 역시 조연들의 세계에서는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왕초’같은 배우다. 동시에 인생과 연기가 일치되는 몇 안 되는 배우 중 한 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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