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석의 100퍼센트] 글 쓰지 마라, 제 값 받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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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있을까요” 영화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마지막 쪽지에는 ‘남는 밥’이란 표현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문장도 있었다. “2월 중하순에는 밀린 돈들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라는 문장은 있었다. 어떻게 ‘밀린 돈’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모든 글 쓰는 사람들에게 ‘밀린 돈’은 그들의 고질병인 어깨나 등의 통증과 비슷하다. 지긋지긋하고, 떨쳐낼 수 없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어느 잡지사는 한 필자의 원고료를 1년 이상 떼어먹다 “잡지 폐간하니 고소하려면 고소하든가”식의 편지 한 통을 보냈다. 편의점 주인이 아르바이트 생의 돈을 떼어먹으면 ‘악덕 점주’란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한 유명 시나리오 작가는 작가 지망생들에게 말했다. “시나리오가 팔리는 건 기적이고, 돈을 받는 건 더 기적이다.” 많은 초보 영화스태프들은 월 5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는다. 그나마도 받으면 다행이다. 최고은의 죽음은 단지 굶주림이 아니라 악화된 병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아픈 사람은 돈 없이도 치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건, 슬프게도 아직 먼 이야기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이상이고 현실이고 필요 없다. 일을 시켰으면 제 때 돈을 줘야 한다. 그게 법이고, 정의다.

개인의 미덕과 사회가 보장해야할 기본권은 다른 문제다
[강명석의 100퍼센트] 글 쓰지 마라, 제 값 받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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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고은이들에게 건투를 빈다.” 소설가 김영하가 자신과 문학평론가 소조의 논란을 진행 중 최고은의 죽음에 관해 쓴 글의 일부다. 이 건투에 열심히 일해도 밀린 돈을 못 받는 것을 견디는 것도 포함 될지 모르겠다. 김영하는 다른 글에서 세계의 예술가 지원 정책을 말하며 예술가의 궁핍을 완전히 해결하는 건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예로 든 미국 작가 노조는 작가 지망생은 보호하지 않더라도 노동력을 영화사에 판 작가는 반드시 돈을 받게 해준다. 반면 한국의 한 작곡가는 자신의 노래가 차트 1위를 한 다음에야 작곡료를 제대로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영하에게 창작자의 세계는 누군가는 황금을 발견하는 엘도라도일 것이다. “내면에 숨어있는 과대망상의 어린 자아”를 가진 작가가 부단한 노력에 더해 운까지 따르면 성공이 가능하다. 그러나 많은 창작자들에게 한국은 찰스 디킨즈의 소설에 나올 법한 세계다. 일자리는 없고, 임금은 박하며, 노동 강도는 끔찍할 정도다. 그리고 일을 해도 돈을 받는다는 보장조차 없다.

김영하는 이 모든 불합리한 문제들을 딛고 인기 작가가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개인의 미덕과 사회가 개인에게 보장해야할 기본권은 다른 문제다. 김영하는 작가들이 제대로 돈을 못 받는 것을 그가 쓴 표현대로 “임금지급 관행의 개선” 정도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동자에게 돈을 주지 않는 건 관행 이전에 범죄다. 김영하의 언급대로 “예술가의 궁핍은 오래된 추문”이지만, 그 예술가들은 누군가의 돈을 받는 노동자이기도 하다. 열정, 낭만, 건투 같은 것 필요 없이 일하면 돈을 받아야 하는 노동.

이것은 노동과 노동자의 문제다
[강명석의 100퍼센트] 글 쓰지 마라, 제 값 받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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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작가관은 존중 받아야한다. 그러나 예술가가 창작에 대해 가지는 태도와 노동자가 가져야할 권리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김영하든 최고은이든 다른 사람에게 글을 팔면 돈을 벌 수 있다. 작가 개인의 만족감이나 소명의식은 그 개인의 태도일 뿐 모두가 가져야할 의무의 영역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많은 고은이”에게 ‘건투’를 빌며 예술을 위해, 또는 훗날의 성공을 위해 참으라 말한다. 몇 해 전 어떤 시사잡지는 필자들에게 “원고료를 돈 대신 정기 구독권으로 받아달라”고도 했다. “그들의 명분과 추구하는 방향에 동의한다면”이라는 이유였다. 혹독한 육체노동으로 몸이 망가져가는 사람에게 건투를 빌지는 않는다. 대신 그를 구할 방법을 찾는다. 하지만 창작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고통은 예술가가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쯤으로 여겨진다. 커피 소비자는 농부에게 제 값을 주고 사들여 판매하는 공정무역 커피를 사는 것을 보다 도덕적인 행동으로 여긴다. 반면 음악과 소설과 영화와 평론에서는 소비자들이 노동 과정의 불합리한 문제를 인식조차 하지 않는다.

물론 창작자들 중 일부는 성공한다. 김영하는 폴 매카트니의 예를 들며 진입 장벽이 낮고,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는 성공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가 커진다고 했다. 하지만 폴 매카트니가 활동하는 미국과 영국에는 그처럼 거대하게 성공한 뮤지션과 적당히 생계를 꾸리는 많은 인디 뮤지션들이 공존한다. 한국에서는, 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이 있었다. 그는 생전 “음악으로 월 100만 원이라도 벌었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많은 소설가 지망생들은 김영하를 롤모델로 삼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은 커녕 노동법의 적용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곳에서 롤모델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차라리 로또 당첨이 답이다. 재능, 성실성, 운, 심지어는 돈이 벌리지 않을 동안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재산도 있어야 성공하는 직업이 있다면, 그 직업의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해야 할 말은 “죽도록 해라”가 아니라 “하지 말아라” 아닐까. 성공하지 못하면 죽은 뒤에도 “굶어 죽었다”또는 “삶에 의연했다”는 말 둘 중 하나만 들을 수 있는 직업 아닌가. 배고파 굶어죽은 예술가. 어려운 환경에도 의연하고 당당했던 예술가. 최고은의 죽음에도 예술가의 생계 문제는 여전히 ‘예술가의 문제’로 치부된다. 하지만 이건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문제다. 정말, 하지 말아라. 당신의 창작이 노동으로 제 값을 받기 전까지는.

글. 강명석 two@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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