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석 “연기는 죽을 때까지 해도 지겹지 않을 거 같다”
정보석 “연기는 죽을 때까지 해도 지겹지 않을 거 같다”
연기자가 연기를 하기 위해 가장 먼저 배워야할 건 기본적인 발성이나 시선처리 같은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다음에 무엇을 배워야할지는 아무도 모르고,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연기가 단지 누군가의 흉내내기나 어색하지 않게 대사를 소화하는 것 이상이 될 때, 연기자는 단순한 기능인과 철학자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를 맞이한다. 단지 대본을 읽을 것인가, 자신의 철학을 연기에 투영시키며 작품을 꿈틀거리게 만들 것인가. 그리고 정보석은 SBS 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욕망을 놓지 못하는 조필연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온 몸으로 표현했다. 그러니 지금 연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인터뷰를 즐겨찾기에 남겨두길 바란다. 정보석이, 자신의 연기에 대해 말한다.

드디어 가 끝났다. 어떤 기분인가.
정보석 : 마지막 촬영이 새벽에 끝났는데, 그 날 마지막 신들이 다 있으니까 굉장히 집중하며 촬영했다. 그래선지 촬영이 끝나니까 가 끝났다기보다는 오늘 촬영을 마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잘 끝났다는 안도감만 들었다. 촬영 내내 긴장감을 잃으면 무너진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조필연을 통해 미래를 경험한 것 같기도 하다”
정보석 “연기는 죽을 때까지 해도 지겹지 않을 거 같다”
정보석 “연기는 죽을 때까지 해도 지겹지 않을 거 같다”
인터뷰를 위해 통화했을 때 당신의 목소리에서 조필연의 톤이 남아있더라. 아직 조필연의 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건가.
정보석 : 그래서 새로 들어간 팀에 미안하다. 가 한창 중요한 부분이라 힘을 쓰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에 많이 집중하지 못한 것 같다. 에서 콧수염도 그래서 달았다. 두 캐릭터가 달라야 하는데 자칫하면 비슷해 보일 수도 있어서. 원래 디테일한 연기로 그걸 보여줘야 했는데 아쉬웠다. 이젠 콧수염을 빨리 떼고 싶다. (웃음)

가 끝나기도 전에 바로 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
정보석 : 사실 쉬고는 싶었다. 과 모두 어려운 작품이었으니까. 원래는 12월은 실컷 놀고 (웃음) 1월하고 3월에 연극 한 편씩 하려고 했는데 제안을 받고 바로 들어가기로 했다. 나는 대중문화를 하는 사람이고, 대중에게 편안하게 다가서고 싶다. 를 했다고 대중에게 너무 무겁게만 느껴지거나, 지나친 기대를 받기는 싫었다. 그런 것들이 오히려 내 한계를 지울 수도 있으니까. 배우가 매번 조필연 같은 역할을 만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서 편하게 생각하고 새 작품에 들어갔다.

그만큼 에서 당신의 연기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인터넷에서 당신의 호연에 ‘필연神’이라는 별명까지 생길 정도였다. (웃음)
정보석 : 조필연처럼 4-50년을 살아볼 캐릭터를 했다는 건 행운이다. 한 인물의 시작과 끝을 보여줬고, 그 진행과정에서 나이를 먹고, 그 인물을 성장시킬 수 있었다. 의도했던 것들도 많지만 연기하면서 나도 모르게 캐릭터가 커가는 순간을 느끼기도 했고. 그래서 현장에 나갈 때마다 오늘은 어떤 느낌을 얻을 수 있을까하면서 신나게 연기했다.

당신 말대로 는 조필연의 평생을 보여줬다. 연기자로서 흔치 않은 경험이다.
정보석 : 연기하면서 정말 조필연으로 산 것 같기도 하다. 를 보면서 과거 회상 장면이 나오면 내가 저럴 때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60~70대의 조필연이 됐을 때 그 느낌을 가지려고 생각했고, 그 나이에 강모를 죽이려는 부분에서는 마치 내가 욕심 못 버린 노인이 된 것 같은 느낌도 가졌다. 그래서 내 미래를 한 번 경험한 것 같기도 하다. 조필연이 내 미래는 아니지만 (웃음). 나 자신이 얻은 묘한 만족감이 있다.

특히 조필연은 한국 정치사를 집약한 것 같은 인물이었다. 이런 시대극의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연기자로서 뭘 얻게 되는 것 같나.
정보석 : 우선 인물에 대한 입체적인 해석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한 사회에 대한 이해다. 그 부분은 굉장히 큰 소득인 것 같다. 나는 조필연이 처음부터 악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악하기 전에도 성공하고 싶은 이 사람의 욕망은 끓고 있었고, 그래서 군인 시절에도 시골에 박혀서 부단히 노력했던 거다. 그런데 조필연의 군인시절에 부하 제춘이가 “열심히 했는데 좌천이라뇨”라고 말하지 않나. 만약 사회가 제대로 돌아갔다면 그는 굉장히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노력대로 성과가 주어지지 않으니까 그 때 이 사람의 욕망이 굴절되면서 그 시대에 살아남는 법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거다.

캐릭터 자체를 묘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한 시대 속에서 태어난 인간의 묘사에 대해 생각한 건가.
정보석 : 그렇다. 그 시대 부모들을 생각해봐라. 그 때 부모들의 교육은 대부분 무조건 성공하라는 거였다. 착해지라고 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 성공의 첫 번째는 경제였고, 이기는 사람만이 뭐든지 할 수도 있고, 베풀 수도 있다고 가르쳤다. 그런 가르침과 시대적 상황이 맞물려서 세계 역사에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경제성장이 가능했지만, 거기서 도태되면 몰락했다. 반대로 한 번만 승리하면 신분이 바뀌고. 그런 과도기적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조필연에게 투영했다.

“복잡한 사람이라면 조필연 같은 짓을 못한다”
정보석 “연기는 죽을 때까지 해도 지겹지 않을 거 같다”
정보석 “연기는 죽을 때까지 해도 지겹지 않을 거 같다”
“가 상전벽해처럼 인생이 바뀐 사람의 시대를 다뤘다”는 유인식 감독의 말이 생각난다. 는 가진 것 없어도 서울에 제일 높은 빌딩을 짓겠다고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했고. 그만큼 포기하지 않는 욕망으로 가득했던 시대였던 것 같다.
정보석 : 실제로 옛날 정치인들을 보면 그런 모습이 남아있다. 어떤 정치인들은 몰락했는데도 자신은 몰락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것 같고. 세상사의 시선과 상관없이 자신의 기백은 죽지 않는다는 거다. 몰락한 건 아니지만 은퇴한 정치인들을 만나보면 여전히 자신의 꿈을 갖고 있고. 연기할 때 그런 것들을 많이 참고했다.

조필연의 캐릭터 해석에도 시대적인 배경이 작용한 건가. 보통 당신은 불안과 내적 갈등이 많은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조필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심 없이 악을 향해 달려간다.
정보석 : 조필연의 롤모델이 될 만한 분들을 뉴스로 접하거나 하면서 알게 된 건, 복잡한 사람이라면 조필연 같은 짓을 못한다는 거였다. 사회 안정이라는 명목하에 사람들을 그렇게 괴롭히지 않나. 그들은 단지 욕망 하나에 삶의 모든 가치를 투여하고 에너지를 쏟는다. 조필연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이 사람이 그 욕망으로 움직이는 과정에서 악이 태어나는 거지 이 사람 자체가 악을 목표로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점에서는 조필연을 그렇게 연기하는 게 시대적 리얼리티에 더 맞았다고 생각한다.

조필연이 처음부터 불안함을 몰랐던 인간은 아니었다. 자신의 죄가 들킬까봐 불안해하는 모습은 남아 있었는데, 어느 시점부터 사라졌다.
정보석 : 그게 교도소에 갔던 때부터였다. 정치적 문제로 교도소에 가긴 했지만, 조필연이 정치를 하면서 가능성을 본 거다. 그 사람에게 이건 영원한 권력이고, 누구 밑에 있는 게 아니라 선택을 받으면 그만인 거니까. 그 선택이라는 것도 얼마든지 조종 가능하다는 확신을 한 거고. 거기다 그 때 강모가 죄를 뒤집어쓰고 탈주 중인 상황이라 자신을 찾아올 수 없는 상황인데 대담하게 면회를 오지 않나. 그리고 조필연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방법을 들고 와서 협박하고. 그 때 강모의 그릇을 알고 두려움이 생긴 거다. 어떻게든 빨리 성공해서 강모를 없애기로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두려운 모습이 없어진 거다.

가장 두려운 사람이 생기면서 오히려 확신에 찬 인간처럼 행동하게 됐다는 건가.
정보석 : 그래서 그 때부터 조필연이 크게 웃는 모습이 나온다. 겉으로 볼 때는 확신에 찬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강모에 대한 불안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걸 표현하는 방법이 뭔지 생각했다. 그래서 크게 웃는 거다. 한 인물에 대해 두려움도 생기고, 반대로 성공에 대한 확신이 생기니까. 그런 감정을 숨기려는 장치였다.

당신의 말처럼 조필연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점점 행동이 달라진다. 군인시절, 안기부 시절, 정치인 시절 행동이 다르고, 점점 손짓이 격해지기도 하고. 그런 디테일한 부분이 당신의 캐릭터 해석에 대한 승부수였던 것 같다.
정보석 : 사실 굉장히 많이 의식한 부분이다. 젊은 시절을 연기할 때는 절제하려고 노력했다. 사람은 욕망을 이루고 나면 그보다 큰 욕망이 제곱으로 생긴다. 그래서 처음에는 절제하지만 점점 더 욕심이 확대되고, 어느 순간 욕망이 조필연을 삼키는 시점이 있었을 거다. 그 기점이 교도소에 들어가는 부분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욕망에 내가 먹힌 상태를 보여주고 싶었고, 동작도 크게 했다.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잃고 욕망에 먹히면서 자신감이 아니라 해낼 수 없는 것들을 버겁게 해 나가면서 나를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그런 동작을 한 거다.

걸음걸이가 인상적이었다. 노년의 조필연은 굉장히 무겁지만 어떻게든 힘차게 걸으려는 느낌이 들었다. 나이 들어도 끊임없이 욕망이 있고, 공격적인 자세를 가진 사람의 걸음걸이 같았다.
정보석 : 그건 일단 나이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요즘은 허리 굽는 분들이 많지 않다. 대신 허리를 받쳐주기 위해 등뼈가 휘는 분들이 많다. 그 자세에서 평행을 이루려다 보니까 몸이 처지고, 그러면서 엉덩이가 받쳐 들어가고, 어기적거리게 되된다. 곱게 늙으신 분들은 이런 걸음걸이가 없다. (웃음) 어떻게든 남 앞에서 몸을 펴고, 계속 공격적인 자세를 가진 사람이 이렇게 걷게 된다.

그렇게 조필연은 나이에 따라 변해 가는데, 사실 당신의 최후는 첫 회에 나오지 않나. 가장 늙은 모습을 찍었다가 다시 젊은 시절부터 찍는데, 둘 사이를 연결하기 어렵지 않았나.
정보석 : 사실 첫 회를 촬영할 때 내가 그 인물과 붙어야 찍을 수 있는 거라서 계속 촬영을 미뤘다. 제작진이야 당연히 빨리 잡으려고 했지만 내가 준비가 안 돼서 계속 “다음에 하자”고 하다 방영 2주전에 촬영했다. 그 장면을 촬영하기 전까지 권력의 끝을 추구하는 사람이 실패했을 때 맞이할 수 있는 끝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외형은 망가져 있지만 비굴하고 초라하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끝까지 자기를 안고 가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 점을 생각하면서 캐릭터의 일관성을 가져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연기에는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여백이 남아있다”
정보석 “연기는 죽을 때까지 해도 지겹지 않을 거 같다”
정보석 “연기는 죽을 때까지 해도 지겹지 않을 거 같다”
그만큼 당신은 단순한 캐릭터 분석이 아니라 작품 전체의 맥락과 시대 전체 속의 인간을 생각하며 연기하는 것 같다. MBC 의 재벌 같은 경우도 그런 맥락의 해석이 가능할까.
정보석 : 예를 들어 내가 아는 어떤 기업인은 가능하면 더 많은 분야에 진출하길 원한다. 자신의 회사가 여러 사업에 진출해서 싸고 다량으로 들여와서 팔면 다 이익 아니냐는 논리다. 하지만 나는 그러려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싸도 돈을 벌어야 소비를 할 수 있는데, 큰 기업이 모든 시장을 잠식하면 돈을 벌 수 없다. 그 기업인은 잠식할 시장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든 잠식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반대로 그 기업에 다니는 사람 외에는 모두 망할 수도 있다. 모든 기업인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이런 사람의 마인드를 보여주고 싶다. 굉장히 친절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회사의 이익에 직면했을 때는 어떠한 야수보다 더 냉혹하고 공격적인 모습을 가진 거다.

다시 연기의 새로운 일면을 발견한 것 같다.
정보석 : 의 공민왕 때부터 특히 그런 것 같은데, 연기하는 게 재밌다. 연극을 계속 하는 이유기도 하고. 가 끝나고 정서적으로 치료 받고 싶어서 연극을 하기로 했다. 는 과는 다르게 딱 한 가지 생각만 갖고 걸리적거리는 건 다 미는 모습을 연기해서 통쾌할 때도 있었지만, 더 거칠어진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뭘 접했을 때 순간적으로 제어가 안 될 때가 있었고. 그래서 따뜻한 내용의 연극을 하면 좋을 것 같다. 사별한 아내의 묘에 찾아가 독백하는 남자와, 그 남자를 보는 아내의 영혼에 대한 이야기니까, 나에게 따뜻한 기운을 줄 것 같다.

정말 연기하는 게 재밌어 보인다.
정보석 : 그럼! (웃음) 무슨 연기의 이상을 추구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연기는 할 때마다 늘 조금씩 알게 되고, 배우는 게 있기 때문에 재미가 있다. 이번에는 이런 것들을 느꼈는데 다음 작품에서는 또 뭐가 나에게 올까. 그걸 생각하면 정말 죽을 때까지 해도 지겹지 않을 거 같다. 앞으로도 내가 계속 성장할 수 있는 여백이 남아있는 것 같다.

글. 강명석 two@
사진. 이진혁 eleven@
편집. 이지혜 seven@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