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슬혜는 현실에서라면 괜히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타입의 여자다. 흰 피부에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순진무구해 보이는 커다란 눈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세상 모든 남자들이 먼저 달려와 무거운 짐을 들어주겠다고 나설 것 같은 ‘꿈의 여인’, 특히 함께 미팅에라도 나갈 일이 있다면 차라리 꾀병이라도 부려서 기권하고 마는 게 덜 비참할 것 같은 강력한 상대. 그런데 맑고 청아한 음성만 새어나올 것처럼 새초롬히 닫혀 있던 입술이 열리자 독특한 저음의, 씩씩하고 기운 넘치는 말들이 쏟아진다. “촬영하느라 잠 못 자고 추운 거요? 에이, 힘들어도 그런 건 행복한 고민이죠!”

그러고 보면 황우슬혜라는 배우를 대중이 주목하게 되었던 첫 작품 <미쓰 홍당무>에서도 그가 연기한 이유리 선생은 공주 같은 외모와 달리 눈치라곤 없는 데다 불륜 관계인 서 선생(이종혁)을 유혹하기 위해 음란 채팅에 열을 올리는 별난 캐릭터였고, <과속스캔들>에서는 기동(왕석현)의 유치원 선생님으로 짧게 등장했음에도 재치 있는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모든 남자의 이상형인 ‘마리’와 특이한 성격의 정신과 의사 장 선생 등 1인 2역으로 출연한 영화 <펜트하우스 코끼리>에서도 그는 백치미와 묘한 섹시함 사이를 오가며 대체 불가능한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연기가 하고 싶어 무작정 연습실의 문을 두드렸던 어느 날 이후 수년 동안 기약 없는 연습생으로 지내면서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의지는 결국 데뷔 후 빠른 시간 안에 황우슬혜가 가장 주목받는 여배우 가운데 하나가 되도록 만들어 주었고 영화 <폭풍전야>에서 그는 김남길과 폭풍 같은 사랑에 휘말리는 ‘미아’ 역으로 본격적인 멜로 연기에 도전했다. “아주 강렬한 감정을 품고 있지만 겉으로는 절제해야 하는 캐릭터라 고민을 참 많이 했어요.” 이제는 이름만으로도 기대를 품게 하는 배우 황우슬혜가 마음을 잔잔하게 만들어주는 음악들을 추천했다.




1. Toni Braxton의 < Secrets >
“90년대나 2000년대 초반 팝송을 요즘 노래보다 더 좋아하는 편인데 이건 데뷔 전 연습생 시절에 정말 많이 들었던 앨범이에요. 토니 브랙스톤의 파워풀한 목소리 덕분에 힘들 때 들으면 기운이 절로 나더라구요. 이 앨범에서는 ‘Un-Break My Heart’가 가장 히트했지만 저는 ‘I Don`t Want To’라는 곡을 더 좋아해요. 멜로디도 좋고 애절한 느낌이 가슴에 와 닿아요.” 90년대를 풍미했던 팝의 디바 가운데 한 명인 토니 브랙스톤은 베이비페이스와 함께 작업한 첫 솔로 앨범 < Toni Braxton >과 < Secret >이 잇따라 히트하며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68년생으로 불혹이 지난 나이에도 폭발적인 가창력을 간직하고 있으며 올해 새 앨범 < PULSE > 발매가 예정되어 있다.



2. Radiohead의 < Pablo Honey >
“원래 라디오 헤드의 음악을 좋아해요. 특히 ‘Creep’ 같은 곡은 노래방 같은 데서 남자 분들이 부르면 멋있죠. 영화 <펜트하우스 코끼리>를 촬영하면서 작품의 독특한 분위기와 잘 맞다는 생각에 계속 들었는데 90년대 초반에 나온 노래들인데도 여전히 새롭고, 듣는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92년 영국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 라디오 헤드의 싱글 앨범 < Creep >으로 처음 세상에 나왔던 이 곡은 초반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그들의 1집 앨범 < Pablo Honey >에 다시 실린 뒤 수개월에 걸쳐 차트에 오르기 시작했다. 영화 <씨클로>에 삽입되며 전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해 이후의 라디오 헤드에게 영광이자 굴레가 되기도 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흔든다는 점에서 명곡으로서의 가치는 여전하다.



3.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
“팝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노래도, 오래전에 나온 곡들의 가사와 멜로디가 정말 예술인 것 같아요. 특히 이 곡은 가사가 별로 꾸민 것 같지 않으면서도 시 같은 느낌이 들잖아요. 정말 좋아해서 노래방에 가면 가끔 부르는데 제 마음 같지 않게 사람들 반응은 칙칙하더라구요.(웃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게 되는 애절한 발라드 ‘세월이 가면’은 故 최창권 작곡가의 아들로 아버지가 작곡한 만화영화 <로봇 태권V>의 주제가를 부른 소년이었던 최호섭의 데뷔곡이다. 형 최명섭이 작사하고 동생 최귀섭이 작곡하는 등 삼형제가 모두 참여한 이 곡은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지만 이후 최호섭은 성대 결절로 오랫동안 가수 활동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조성모, 마야 등 많은 후배 가수들이 리메이크해 부르고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주인공 김주혁이 직접 부르는 신이 등장할 만큼 사랑받는 곡이기도 하다.



4. 지아(Zia)의 < Atelier >
“처음에 들었을 땐 ‘그대 떠나간 후에 내 시간은 넘쳐요. 눈치 없는 여자라 생각해도 좋아요. 난 그냥 편하게 그대와 한잔하고 싶을 뿐’ 이런 구체적인 가사가 신기해서 ‘이게 뭐지?’ 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은근히 중독성 있게 계속 머리에서 맴돌더라구요. 요즘 노래인데도 어딘가 구수한 느낌이 있어서 좋아졌어요.” 2007년 데뷔한 여성 솔로 지아는 작년 4월 교통사고로 두개골이 함몰당해 20바늘을 꿰매는 중상과 우울증으로 활동을 한동안 쉬어야 했지만 연말 미니앨범 < Atelier >로 무대에 다시 섰다. ‘술 한 잔 해요’는 다소 청승맞은 듯하지만 실연의 상처를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가사와 지아의 호소력 있는 보컬이 인상적인 곡이다.



5. Inger Marie Gundersen의 < Make This Moment >
“공연을 자주 보러 다니지 못하고 가도 앉아서 얌전히 감상만 하는 소극적인 관객이에요. 그런데 잉거 마리의 꾀꼬리, 여신 같은 목소리가 너무 매력적이라 내한 공연 때 일부러 찾아가서 듣고 왔죠.” 노르웨이 출신의 재즈 가수 잉거 마리는 2004년, 40대 중반의 나이에 데뷔 앨범을 낸 뒤 ‘유럽의 노라 존스’라는 찬사를 받으며 개성 있으면서도 편안한 음색과 캐롤 킹의 곡을 리메이크한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로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모았다.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번안한 ‘Even When’을 앨범에 수록하고 내한 공연 당시 노르웨이 포크송에 ‘아리랑’을 연결시켜 부르는 등 한국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섹시하다는 말은 정말 너무 어색해요.” MBC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파트너 이선호의 칭찬에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던, 보기와는 달리 의외로 ‘공주과’가 아닌 황우슬혜는 사실 연기할 때도 무대포에 가까운 배우다. 연기가 뜻대로 안 되면 집에 돌아와 펑펑 울기도 하고 수중 촬영 중 저체온증으로 구급차에 실려 갈 만큼 몸을 던지면서도 “해야 하는 거니까 당연히 해야죠”라며 굳은 결의를 내보이는 성격은 <폭풍전야>에서 여린 외모 뒤로 의외의 대담함을 지닌 미아와도 겹쳐진다. “지금도 촬영할 때마다 정말 많이 긴장해요. 심장이 터질 것 같을 때도 있어요. 그래도 해야 하는 거잖아요.” 두려움 없는 배우가 아니라 두려움을 이겨낸 배우,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계속 궁금해질 것 같은 황우슬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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