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경 “엄마에게 전화 한 통 걸게 만드는 작품이었으면”
노희경 “엄마에게 전화 한 통 걸게 만드는 작품이었으면”
평범한 가정주부 인희(정애리, 송옥숙)에게는 의사인 남편 정 박사(최정우, 최일화)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 상주댁(이용이)를 모시고 회사원 딸 연수(박윤서), 삼수생 아들 정수(이현응)와 함께 산다. 하나뿐인 피붙이 남동생 근덕(박철민, 전배수)이 돈만 생기면 노름판에서 날리고 행패를 부려 착한 아내 근덕댁(이지현)과 인희의 속을 썩이는 것을 비롯해 모든 가족들은 각자의 일상과 고민으로 서로를 돌아보거나 배려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후배 윤 박사(이영숙)을 통해 자신이 자궁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은 인희는 천천히 세상과 이별할 준비를 시작하지만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돌볼 이가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걱정이다.

1996년 MBC 창사특집 4부작 드라마로 방송되었던 노희경 작가의 이 15년 만에 다섯 번째 작품으로 무대에 오른다. MBC , 의 이재규 감독이 연출을 맡고 정애리, 송옥숙 등 낯익은 연기자들을 비롯해 이용이, 최정우, 전배수 등 실력 있는 연극배우들이 다수 캐스팅되었다. 4월 23일부터 7월 18일까지 대학로 문화공간 이다 1관에서 공연될 의 감독, 작가, 배우들을 만났다.

을 연극 무대에 올리게 된 소감은.
이재규 감독 : 말이 필요 없는 작품이다. 무대만 옮겨왔다 뿐이지 어린 아이부터 나이 드신 분까지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작품이다. 따뜻하고, 집에 돌아가실 때 가슴 속에 뭔가 남는 좋은 작품이 되도록 하고 싶다.
노희경 작가 : 설레고 두렵다. 워낙 탁월하신 감독님과 배우들을 모시고 하게 된 게 영광이다. 사실 이번엔 내 작품이라기 보단 관객이 된 것 같은 기분이라 울산 사는 큰언니까지 가족들 모두 떼로 몰려와서 보기로 했다.

“엄마의 따뜻함보단 관계의 따뜻함을 얘기한다”
노희경 “엄마에게 전화 한 통 걸게 만드는 작품이었으면”
노희경 “엄마에게 전화 한 통 걸게 만드는 작품이었으면”
노희경 “엄마에게 전화 한 통 걸게 만드는 작품이었으면”
노희경 “엄마에게 전화 한 통 걸게 만드는 작품이었으면”
동년배의 여성이자 엄마, 아내, 며느리로서 세상과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인희 역을 준비하는 기분도 남다를 것 같다.
송옥숙 : 처음엔 연출, 작가님의 브랜드 파워에 묻어가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워낙 잘 알려진 작품이기 때문에 배우에게는 너무나 큰 부담이기도 하다. 드라마에서 나문희 선배님께서 인희 역을 하셨기 때문에 같은 역을 하기가 너무너무 두렵고 많이 고민하고 있다. 재미있는 건, 정애리 씨는 좀 냉정해 보이고 나는 좀 독해보이는 여자인데 이 작품에서는 따뜻함을 많이 얘기한다는 거다. 처음에는 엄마의 따뜻함을 말하는 줄 알았는데 연습을 하면서 보니 그보다도 관계의 따뜻함을 의미하는 것 같다.
정애리 : 한 집안의 며느리, 아내, 엄마. 평범한 삶이라면 삶일 수 있는데 이별을 앞두고 준비해 나가는 과정이 나온다. 배우로선 최선을 다해 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건 당연하지만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더 쉽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잘 하는 사람은 이 현재를 가장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아닐까. 나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박철민 : 보통은 제작사에서 나를 섭외하러 연락을 하는데 이번 작품은 내가 제작사를 섭외했다. 우연한 기회에 작품을 읽었고 정애리 선배님 때문에 무조건 시켜달라고 해서 깍두기처럼 합류했다. 정애리 선배님은 제 인생의 로망이었고 로망이고 앞으로도 로망일 텐데 늘 선망의 대상이던 선배님과 공연을 통해 가족처럼 함께 할 수 있어서 설레고, 근덕 역은 전배수 씨가 열심히 연기할 거다. (웃음)

평생 고생만 시킨 아내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남편의 역할은 어떤가.
최정우 : 정 박사는 젊은 시절 의료 사고를 낸 데 대한 트라우마가 있고, 가부장제의 표본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집에서 남자의 권리만을 행사한다. 대본에 “사내란 참 쓸모없는 놈들” 이란 말이 나오는데 백 프로 동감하고, 수컷들이 잘못해서 세상이 험악해져 가는 걸 여인들에게 반성해야 될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어려운 희곡을 만난 게 오랜만이라 대본을 손에서 못 놓고 진땀 흘리고 있다. 하지만 무대에서 실망시키지 않는 배우로 남겠다.
최일화 : 나도 결혼 생활 17년째인데 이번 대본을 받아본 뒤 암을 선고받은 아내를 둔 의사 입장에서 과연 내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게 어디까지고 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 꽉 찼다. 결국에는 계속 바라만 보다가 아내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는데, 그 홀로 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잘 생각해서 창조적으로 표현해내는 지점을 고민하고 있다.

치매에 걸린 노인을 연기하는 데 있어 어려운 점,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이용이 : 치매에 진짜 걸려서 대사가 안 외워진다. (웃음) 치매 걸려서 며느리에게 욕하는 대사도 많고 어느 순간 정신이 들면 며느리를 불쌍하게 여기기도 한다. 제일 가슴 아픈 건 인희가 ‘내가 어머니를 놔두고 먼저 어떻게 죽느냐’며 어머니 빨리 죽으라고 목을 누르는 장면이었다. 어떤 이별보다도 가장 가슴 아픈 건 자식들을 먼저 보내는 마음이라 그 신이 되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그리고 내가 정애리, 송옥숙 씨에게 애기처럼 업혀서 노래도 부르고 잠도 자는 장면이 많은데 요즘 몸이 좀 불어서 미안하다. (웃음) 연습 하면서 보면 저 사람들이 연기하고 있는 것, 여기 섞여 있는 내 모습이 교차되면서 행복하고 마음이 아리기도 하다. 훌륭한 연극이 탄생되는 것 같고 우리 며느리가 둘이니 두 번씩 보러 오시면 좋겠다. (웃음)

연수와 정수 역의 두 배우는 오디션을 통해 선발되었는데 작품에 임하는 소감은.
박윤서 : 나도 부모님과 함께 사는 장녀라 비슷한 상황인 연수를 만나면서 내 모습을 돌아보고 많이 반성했다. 작업하면서 부모님과 동생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다.
이현응 : 오디션 때 연출님하고 많은 선배님들이 ‘경쟁자 많이 없으니까 대충 됐다고 보면 돼. 걱정하지 마’라고 하셨다. (웃음) 나름대로 막내로서 분위기를 살려보려고 썰렁한 농담도 하고 그러는데 동년배들에게 하면 빵빵 터지는 얘기들이 여기서는 심각한 얘기로 받아들여 고민들을 하시고 논쟁이 된다. 그렇게 코드가 안 맞을 땐 가끔 절망적인 생각이 든다. (웃음) 작품에 임하는 기분은 행복하다. 물론 내 나이에 행복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되겠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최고의 선배님들과 한 팀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

“아름다운 건 세상이 아니라 사람”
노희경 “엄마에게 전화 한 통 걸게 만드는 작품이었으면”
노희경 “엄마에게 전화 한 통 걸게 만드는 작품이었으면”
4부작 드라마를 90분으로 압축하면서는 이야기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
이재규 감독 : 4부작을 90분에 맞추려 하다 보니 캐릭터들의 풀 스토리나 풍성한 이야기는 조금 줄었지만 원작의 틀을 최대한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야기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가족으로 범위를 좁혀 그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했다. 원작과 거의 흡사하지만 또 새로운 작품을 보여드리려고 한다.

이재규 감독의 드라마는 영상미가 강점이었는데 연극에서도 그것을 살리기 위한 장치가 사용되는지.
이재규 감독 : 장치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무대의 장점을 살려 최대한 담백하게 할 생각이다. 드라마는 카메라와 편집이라는 기댈 수 있는 구석이 있고 배우 분들과 얘기할 때도 시간이 부족하면 내 주장으로 얼핏 넘어갈 수도 있지만 지금은 차 떼고 포 떼고 무대 위로 온 거라 긴장된다.

연극 연출이 앞으로 작업할 드라마에 도움이 되는 면도 있을까.
이재규 감독 : 드라마만 계속 했으면 조금씩 안주하거나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소리도 듣고 이재규 이제 끝났다는 얘기도 들었을 것 같다. 연극은 겁나지만 무식한 용기를 가지고 하는데 이렇게 좋은 배우들과 작업하다 보면 초라한 나를 느끼곤 한다. 어제도 집에 가면서 너무 괴로운 심정이었는데 그걸 본 집사람이 왜 울고 왔냐고 할 정도였다. 진짜 운 건 아닌데, 그런 심적인 고민이 드라마를 할 때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이재규 감독 : 나 개인적으로는 아름다운 건 세상이 아니라 사람이란 얘기를 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극 안에서 이 사람들이 그렇게 따뜻하지 않다. 이기적이고 서로 잘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보면 그들의 관계가 아름답고 이별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노희경 작가 : 이 작품을 쓰기 2년 전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작품을 쓰면서도 많이 울었고 돌아가신 뒤 3년 동안은 길을 가다가도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엄마의 죽음을 조금 더 가볍게, 엄마가 나를 슬프게 하려고 돌아가신 게 아니라 나에게 줄 것을 다 주고 가실 때가 되어서 가셨다고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작품이 방송되는 걸 보시고 힘들어 하시던 아버지도 4년 전에 돌아가셨다. 다행히 아버지는 감사하다, 사랑하다는 말을 하고 보내드렸다. 이 작품 안에는 효도하지 않고 소통하지 않는 가족들이 모여 있지만 누구는 화를 내고, 누구는 말하지 않고, 누구는 치매에 걸려서 나름대로 소통하고 있다. 그래서 작품을 본 뒤 ‘효도해야겠다’가 아니라 ‘지금 세상이 별로 문제없구나. 다들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구나’ 하는 걸 깨달으면 좋겠다. 보시고 엄마한테 전화 한 번 하고, 아빠 오면 방에 들어가 버리는 대신 밥 같이 먹고 TV 보고, 한 순간이라도 그러면 좋겠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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