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같은 시간대에 방송된다고 해서 이런 긴장감을 자아내지는 않는다. 모처럼 동시에 출발한 세 편의 수목드라마가 ‘전쟁’의 느낌을 주는 이유는 이들 작품들이 모두 여자주인공의 매력에 크게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라마가 완성되지 위해서는 무수한 사람들의 수많은 과정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수목의 드라마 삼파전이 ‘여배우 대결’로 좁혀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세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막강한 캐릭터인 이들의 만남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다음은 어느 수요일 낮의 기록이다.

ㅅㅞㅂ은 말씀하셨다. 수요일은 언제나 운이 좋다고 말이다. 그 얘기를 하면서 어쩐지 한쪽 입꼬리로 비열하게 웃은 것도 같았지만, ㅅㅞㅂ이 그렇다고 말씀하시면, 그런 거다. 그리고 라스페라 2호점에 출근한 첫 번째 수요일. 추가 주문한 의자들이 배송되지 않아 개점이 30분이나 미뤄진 것을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ㅅㅞㅂ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직 ‘CLOSE’라고 쓰여 있는 레스토랑의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여자 손님을 보는 순간, ㅅㅞㅂ의 말 따위를 떠올릴 여유는 더 이상 없었다.

“이봐요. 문 열어요! 나 여기서 중요한 약속 있단 말이에요.” 여자는 막무가내였다. 그녀가 세차게 몸을 흔들 때 마다 손바닥만한 치마가 일렁거렸고, 손바닥보다 큰 선글라스는 조금씩 코끝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러다 그녀의 새된 소리에 놀란 사장님이 황급히 가게 문을 열었을 때, 그녀의 선글라스는 바닥에 내동댕이쳐 진 채였고, 그녀는 “이거 한정판인데……. 그레이스 캘리가 쓰던 건데”라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수목 클리닉│지붕 뚫고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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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닦고 가게 안으로 안내된 여자는 어울리지 않는 사과박스를 들고 있었다. “사람들 참 이상해. 안에 없는 척 할 이유가 어디 있어? 어차피 점심시간인데 내 돈 내고 내 맘대로 먹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비민주적입니다. 예약도 제가 했잖아요. 낮 열두시 반, 청담동에서 약속이 있는데 왜 날 막아요? 얼마 주면 되는데요?”라고 종알거리면서도 여자는 사과박스를 쉽게 다른 사람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사장은 조급해졌다. 장인이 곧 들이닥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순재 F&B를 고급 레스토랑 업계에 진출시켜 브랜드 이미지의 고급화를 도모하자며 라스페라와의 협업을 주장할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있었다. 이번에야 말로 슈퍼 주얼리 정의 진면모를 보여주리라,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었다. 그러나 생각지 못했던 문제들이 준비 되지 않은 시간에 발생하는 것이 바로 사업의 묘미이며, 그 묘미를 만끽하느라 개점 사흘째까지도 사장은 크고 작은 문제들을 수습하느라 신경이 예민한 상태였다. 게다가 내부에 사정이 생겨서 오픈이 늦어졌다고 변명을 하는 그에게 “제가 왜 사장님 속사정까지 생각해야 돼요? 저는 손님이지 사회사업가가 아닌데요. 아니, 어떻게 한 달에 몇 백 명씩 만나는 사장님 사정을 일일이 다 봐줘요?”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해 오는 여자와 마주하자 사장의 표정은 점점 아득해져가고만 있었다.
수목 클리닉│지붕 뚫고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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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다. 큰 소리를 내며 가게 문을 열어젖힌 그 사람은 역시나 큰 소음과 함께 의자들을 가게 한가운데 내려놓았다. 그리고 큰 소리로 “의자 왔습니다! 히야, 늦게 도착해서 죄송해요!”라며 사장을 향해 밝게 웃어보였다. 초조함을 감출 수 없던 사장이 그 사람을 향해 “작업하느라 의자들과 정들었을 텐데 그냥 쭈욱 갖고 계시지 그랬어요”라고 빈정대자 그는 “사장님은 가만 보면 참 다정한 거 같아요”라며 배시시 웃었다. 사장이 “내가 원래 무섭기로 소문난 공포의 족사마인거 알아요, 몰라요?”라고 추궁을 하는데도 그는 “네. 사장님 옛날엔 되게 히스테릭하고 이기적이었는데 이젠 아니잖아요”라며 연신 방글방글 웃을 뿐이었다. 사장이 “왜 날 무시해!”라며 필요이상으로 신경질을 부리자, 그제서야 그 사람은 사태를 짐작한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는 “으아아아아. 내가 또 약속을 어겼네요. 여기 사람들이 사장님 성격 나쁜 거 다 알았어요. 난 등신이에요. 박개인. 등신!”이라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오히려 화를 돋우는 사과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누구의 잘못인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사장에게 용서해 달라며 매달렸고, 사장은 그의 팔을 뿌리쳤을 뿐이다. 그리고 그 손에 마침 가게로 들어오던 소녀가 뒤통수를 맞아 넘어지면서 삼단 같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다 속의 미역처럼 공중에 펼쳐진 것이었다. 젠틀한 사장은 얼른 소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까만 눈동자를 반쯤 내리깐 소녀는 사장을 향해 작지만 날카로운 한마디를 던질 뿐이었다. “비켜.” 그러나 소녀의 표정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사장은 아프지는 않는지 소녀를 달래기 시작했고, 소녀는 “아파. 안 아플 리가 있어? 근데 그게 뭐? 아픈 게 뭐가 어떻다고?”라며 더욱 거칠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수목 클리닉│지붕 뚫고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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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술도가 구씨의 수양딸이었다. 프렌치 레스토랑인 라스페라와 이순재 F&B의 한식 기술을 접목한 신메뉴를 위해 사장은 가게에서 와인과 함께 막걸리를 팔기로 했다. 사실은 술도가 사장의 재혼한 아내에게 반해서 엉겁결에 계약을 한 것이지만, 장인에게 업체를 설명할 때는 구 씨의 술에 대한 장구한 철학을 인용해가며 제법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기도 했다. 특히 구 씨가 마음에 차지 않은 술독을 깨버리는 모습을 휴대폰 동영상으로 촬영한 것은 장인을 조금 감동시키기도 했다. 망치를 휘두르는 구씨의 모습이 떠오르자, 사장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소녀에게 조금 더 다정한 미소를 보내려 애를 썼다. 처음 밥을 먹고 가라 권하자 소녀는 “핫바리 같은 거 말고……. 그냥 돈으로 주든지요”라며 눈을 맞추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사장이 “아니야. 아니야. 우리 레스토랑에서 파는 프랑스 파스타 먹고 가. 응?”이라며 연신 친절한 눈빛을 보이자, 소녀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도 같았다. 물론, 그 순간 소녀가 ‘프랑스? 거기 가서 숨으면 아무도 못찾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소녀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간신히 경계를 풀고 소녀가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그 사람이 자신도 물 한잔 달라며 소녀의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버린 것이었다. 물론, 소녀는 어김없이 “참 속도 좋으세요”라며 어금니를 드러냈고, 그런 소녀에게 그는 “히힛. 오늘 서로 마주보면서 칭찬하는 날이야?”라며 예의 눈치 없는 대답으로 응수했다. 그러니 “꺼져. 언제 또 밥상이란 걸 차려서, 밥이란 걸 먹게 될지 몰라. 마지막으로 먹어둬야 되는 거거든. 말 시키지마”라고 소녀가 화를 내는 것도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은 아니었다. 한번 폭발한 소녀의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왜 그래요? 어린년한테 이런 얘기 들으니 자존심이 상하나보죠? 뭐하는 거예요, 지그으음. 안 나가요?”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소녀는 상처 입은 동물 같았고, 그런 동물은 레스토랑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수목 클리닉│지붕 뚫고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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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 못한 사장이 술도가에 전화를 넣으려는 찰나, 소녀의 어깨를 낚아챈 것은 먼저 자리에 앉아 있었던 여자였다. “헌법엔 개인의 행복 추구권이 있어요. 그런데 너 때문에 내가 지금 불행할 것 같거든요. 구두 값에 호텔비 반, 아침 값에 꾼돈 10만 원 등등 해서 팔백 일만 오천 원을 들고 왔는데, 남자는 오지도 않고. 안 그래도 속상한데 네가 자꾸 소리를 지르니까 머리가 아프잖아요.” 그러나 소녀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불여시. 나한테 손대지마.” 부들부들 떨리는 소녀의 어깨에는 극도의 피곤함이 묻어났다. 보다 못한 그가 “오오- 와아- 진짜! 말로 해서는 안 될 사람이네”하고 거들자 소녀의 불꽃은 더욱 거세게 타오를 뿐이었다.

결국 사장은 소녀를 먼저 돌려보내기로 결심을 했다. 그의 말은 다정했지만 소녀는 “됐고”라며 막걸리 값을 요구하며 사장에게 싸늘한 손을 내밀었다. “그 말투 묘하게 익숙한데. 그건 그렇고 구 사장님이 먼저 빚 진 게 있으니까 오늘은 술 값 안줘”라는 사장의 말을 들은 소녀는 더욱 차갑게 식어들었다. “난 댁한테 빚 없어요. 혹시 다른 게 빚이라고 생각하면 울 사장님 찾아내서 받아내요. 난 아니니까.” 소녀는 막무가내로 사장에게 막걸리 값을 요구했다. 사장이 거부하자 무턱대고 악을 쓰기도 했다. 끝내 분노가 폭발한 여자는 소녀를 돌려세워 충동적으로 협박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검사가 단독 관청인건 알지? 나 중부지검 형사 5부 마혜리 검사야. 너 좀 아픈 것 같아. 돈 것 같다구.” 그리고 여자의 커밍아웃은 생각보다 큰 효력을 발휘했다. “갑자기 존경심이 생겨서는 아니구요, 검사님. 제법 똑똑하신 것 같기도 아니, 제법 몹시 똑똑하신 것 같기도 하고, 말싸움 하기도 귀찮고. 난 별로 시간도 없…. 전 별로 시간도 없기 때문에 시간낭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검사님. 떼인 돈 받아주세요. 부탁해…요.” 띄엄띄엄 단어들을 붙였지만, 소녀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소녀를 알아보았다. “가구 좀 사라. 싸게 줄게. 구매가능하신 엄마는 어디 계시니?”라며 나에게 말을 거는 그 사람을 밀어내고, 나는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수목 클리닉│지붕 뚫고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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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조야.”
소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소녀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소녀는 온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은조야, 하고 불렀다.’ 그렇게 오랫동안 잊지 않고 있었던 그녀를 다시 만난 기쁨에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창 밖에는 세찬 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 순간 우리의 침묵을 얼룩지게 하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은조를 향해 말했다.
“이대로 잠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
그러자 사장님이 놀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봤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구요.”
사장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갔다. 물론, 사장의 눈에 비친 것은 어느새 내 뒤로 등장한 그의 장인이었다. 그리고 장인은 짧은 다리를 들어 나를 뻥 차버리고는 말하는 것이었다. “야,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라.”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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