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잣거리를 흐르는 구수하다 못해 걸쭉하기까지 한 입담에 그를 예순 넘은 능구렁이 같은 작가로 상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칼과 활 사이에 오가는 서슬이 퍼렇다 못해 날이 선 것 같은 대사에 그를 푸르른 청년으로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71년 생, 이제 갓 마흔을 넘긴 KBS 의 천성일 작가는 그렇게 여전히 베일에 싸여진 사람입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방송계에는 도대체 천성일이 누구냐? 며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땅에서 하루아침에 솟은 것처럼 보이는 이 남자는 영화기획사 마케팅부터 제작부장 기획 프로듀서를 거쳐 과 를 제작한 영화사 하리마오 픽쳐스 대표이자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까지 지난 10년, 쉬지 않고 대중을 쫓아온 사람입니다. 24부로 가는 기나긴 ‘추노질’에 입술이 허옇게 튼 작가를 3시간 넘게 붙잡아 놓는 일은 분명 황철웅의 인두고문보다 더 잔인한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그의 조곤조곤 사람 잡는 충청도산 이야기를 듣는 ‘인터뷰 100’에게는 더 없이 유쾌한 4번째 시간이었습니다. 다만 사진을 찍는 걸 부담스러워 해서 그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하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대신 언제라도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조촐한 천성일 작가의 집필 책상과 잘 찾아보면 그가 있을지도 모르는 하리마오 픽쳐스 식구들의 일터로 그 사진을 대신 할까 합니다.

천성일 작가│“<추노>를 통해 ‘그래도’ 희망이 있다를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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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17부의 고지를 넘었습니다. 이제 대본은 어느 정도 남으셨나요?
천성일: 3개 남았어요. 22, 23, 24부. 까마득하죠. 아직도 까마득해요.

100: 그래도 바야흐로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이들의 삶은 결국 어떻게 될까요?
천성일: 원하시는 결말을 말해보세요. 그렇게 만들어 드릴게요. (웃음) 제 성격인지 몰라도 에는 영웅이 없잖아요. 사실 송태하(오지호)가 외모에 무술실력에 진중함 바닥까지 찍고 튀어 올라가는 개인사까지, 영웅이 되기 위한 정말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는 있잖아요. 그런데 영웅이 되기를 스스로 꺼려하는 인물이죠. 전 그게 현실이 아닐까 싶어요. 누군가 결말이 어떠냐고 물어보면 모든 이야기에는 희비극이 공존하는 거다, 라고 답해줘요. 엄청난 영웅이 등장하거나, 엄청난 비극이 발생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100: 영화와는 달리 드라마는 방영 중간에 계속 이런 저런 시청자들의 반응들을 접하면서 글을 쓸 수밖에 없는데, 가장 뜨거운 비난은 ‘민폐 언년’(혜원, 이다해)에게 모아지긴 했어요. 이런 격한 반응들이 이후 언년의 캐릭터에 영향을 끼친 부분은 없었을까요?
천성일: 예… 없었어요. 작가가 여자캐릭터에는 관심이 없구나, 라는 말도 나왔다고 하던데. 이다해 씨에게 미안하기는 한데, 혜원이는 서서히 바뀌는 인물이기 때문에 시청자 반응이 이러니까 거기 맞춰서 서둘러 바꿀 수가 없었어요. 인물들이 저마다 밟아나가야 하는 단계가 있기 때문에 원래 생각했던 대로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죠.

100: 그렇다면 배우들의 연기 맛이 좋아서 이후 좀 더 강조하게 된 경우는요?
천성일: 오포교(이한위)의 “전반적으로”가 처음엔 대본에 그렇게 만들지 않았는데 점점 ‘전반적으로’ 많아지고, 급기야 다른 인물의 대사에도 들어가는 사태가! (웃음) 그러다 보니 최종대본에는 빠졌는데, 기생이 오포교를 “저자 소문을 ‘전반적으로’ 많이 꿰고 계신 오포교님”이라고 소개하는 대사도 있었죠.

100: 기존의 흥행 드라마들이 대부분 선악이 양분되거나, 감정이입 대상을 분명히 만들어 주는데 비해 는 많은 인물들을 방사형으로 뿌려놓고 하나하나 설명하고 보듬는 방식을 택해요. 이게 그런데 참…. 결과적으로는 좋은 반응을 얻긴 했지만 TV라는 장르 안에서 상당히 무모하거나 용감한 선택이었거든요.
천성일: 어지럽고, 난잡하죠? 초보 작가의 오류죠. 뭐. 원래 도박도 처음 배운 놈이 쓰리고 치고 그러니까. (웃음) 는 ‘길바닥 사극’인데, 그 길바닥에도 정말 많은 계층의 사람이 살고 있잖아요. 또 한 계층 안에도 다양한 인간군상 즉 권력을 다 가진 양반, 권력의 끝자락에 붙어서 아부하는 양반, 권력을 발전적으로 이용하려는 양반이 있는가 하면, 잘살아 보겠다고 도망가는 노비도 있고, 맞서 싸우는 사람,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그 와중에 동지들 뒤통수 쳐서 돈 들고튀려는 나쁜 사람도 있죠. 이들이 각각의 사연을 안고 좀 더 촘촘히 엮였으면 좋겠다 생각했죠. 어차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100: 오로지 곽정환 감독만이 초보 작가의 이토록 엄청난 시작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을 텐데요. (웃음)
천성일: 처음에 6부까지 쓰고 감독님을 만났는데 인물표를 쫙 그리시더니 아, 인물이 너무 많네요, 하시더라고요. 50명이 넘으니까요. 그래서 인물 많으면… 안돼요? 라고 물었죠. (웃음) 그런데 이 작품이 한 사람의 영웅 실화도 아니고, 쫓고 쫓기는 액션만으로는 한계가 있잖아요. 활약상도 중요하지만 그 기저에 깔려있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점에 곽정환 감독과 100% 합의를 보고 들어갔죠. 그래서 외부 이야기에서 흔들림 없이 갈 수 있었던 거예요. 물론 좀 둔감한 덕도 있고. (웃음)

100: 삼각관계, 사각관계 혹은 영웅담이 아니라 미드처럼 연결성보다는 에피소드의 완결성에 더 공을 들이는 작품, 한 두 명의 분명한 주인공이 존재하지 않는 이런 무모한 배포를 가지고도 시청률 혹은 대중적인 지지를 끌어냈다는 점에서 의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천성일: 처음엔 좀 산만해 보일 수 있겠지만 후반부가면 결국 노비들이나, 철웅(이종혁)이나, 태하나, 전혀 대길이(장혁)와 상관없는 인조(김갑수)까지 하나의 이야기 속으로, 그 소용돌이 속에 뒤 섞일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냥 무식하게 밀고 나가고 있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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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많은 시대 중에 병자호란 이후의 난세, 인조시대를 주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천성일: 정치에는 캐치프레이즈, 큰 이슈들이 따라다니고 결국 그 이슈가 대중을 장악하죠. 당시는 그게 ‘북벌’인데 거기에 반대하면 애국자가 아니었던 시대였어요. 그렇게 획일화된 시대, 하나의 가치에 붙들려 살아야 했던 시대가 살기엔 좀 팍팍하잖아요. 이런 시대에 태어난 정말 보잘것없는 한 개인이 역사와 융합해서 추노꾼이 되고 그 활동이 활성화 되었다가 결국 추노가 끝나는 과정, 즉 개인의 역사와 집단의 역사가 만나는 시기로는 그때가 가장 좋은 시기였던 것 같아요.

100: 그나저나 ‘추노’에 대한 이야기의 발화점은 어디였을까요.
천성일: 휴- 먹고 살려고 하다 보니까? (웃음) 영화 시작하고 한 5년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사극을 준비하다 흥미로운 문구를 하나 발견했어요. 중세에는 200년-300년 정도가 국가수명이었는데 조선처럼 500년이나 간 국가가 없었다고, 연구대상이라고. 그래서 연구를 좀 했죠.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국가적 위기를 왕조 입장에서는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 흔한 시민혁명 하나 없이. 그 의문이 ‘추노’에 대한 발화점이었던 거죠. 그래서 조선 500년에 대한 야사와 비화를 들쳐보던 중에 도망한 노비와 그 도망노비를 쫓는 추노꾼과 범죄자들의 이야기를 발견했어요. 영화 시나리오 단계에서 이걸 드라마화 하면 어떻겠냐, 라는 이야기가 나왔고 결국 여기까지 왔네요. 시나리오는 굉장히 하드한 액션, 느와르였는데 드라마로 오면서 많이 바뀌었죠. 드라마에 나오는 조연들은 하나도 안 나오고 태하, 대길, 왕손(김지석), 최장군(한정수)이 있고 혜원 대신 태하 여동생이 있었죠.

100: 천지호(성동일)의 연기에 몸서리치는 시청자들이 많은데 ‘천’지호가 그럼 조상님 정도 되나요? (웃음)
천성일: 그렇죠. 원래 성을 굳이 안 붙여도 되는데 왜 우리 가문을 붙여 가지고… 종친회 가서 야단맞을지도 몰라요. 원래 천 씨가 명에서 온 중국 성씨였고 벼슬도 받았던 양반이었어요. 제가 어릴 때부터 족보교육 굉장히 열심히 받았거든요. 천지호도 양반출신이었다는 비화가 있었는데 결국엔 뺐어요. 그렇다고 우리도 양반이었다는 걸 알려줘야지! 뭐 그런 건 아니었고 (웃음) 결국 세상 살다 보면 양반 상놈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천지호에게 성을 주었던 거죠. 사실 조카이름이 그것과 비슷한데 그리 올곧은 캐릭터도 아니고 어린 시절에 큰 상처로 남을 것 같아서 끝자만 살짝 바꿨죠.

100: 곽정환 감독에 대한 첫 인상은 어땠나요?
천성일: 크랭크 업 바로 직전에 만났는데, 사실 아무 느낌이 없었어요. 이사람 좋다, 싫다 이런 것도 없었고. 머리는 딱 대길이 상태였는데, 관공서 가까운 KBS에서 저런 헤어스타일이 용납될까 생각했었죠. (웃음) 당시는 이걸 드라마화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처음 만난 자리지만 좀 일찍 자리를 뜨는데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자기는 지금까지 간다는 작가 잡아본 적이 없다고, 그래서 제가 그랬죠. 저도 감독이 잡는데 자리 떠본 적 없다고.

100: 흡사 ‘밀당’의 멜로 영화 같은 첫 만남이군요. (웃음)
천성일: 그러다 며칠 후에 거절을 하더라도 그 전에 은 보는 것이 사람을 만난 도리겠다고 생각했죠. 결국 3회까지 보고 나서 제가 전화를 드렸죠. 감독님! 같이 하시죠. (웃음) 보고 나니까 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100: 왜요?
천성일: 어쩌면 는 의 또 다른 버전 일 수 있겠다는, 곽정환 감독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아! 떠넘길 임자를 찾았구나! (웃음)
천성일 작가│“<추노>를 통해 ‘그래도’ 희망이 있다를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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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곽정환 감독과는 동갑내기에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인데 이후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나요. 세상을 바라보는 방향이나 목표가 같은 사람이 아니라 그 방법을 찾는 이치가 같은 사람들이 결국 무슨 일이든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천성일: 별다른 충돌 없이 늘 잘 넘어 갔던 것 같아요. 만약에 감독이 노비가 있을 수도 있었지, 큰 집 노비들은 그나마 좀 편하지 않아? 라고 나오면 난감 한 거죠. 기본적으로 둘 다 노비라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라는 생각을 하고 시작한 드라마였고, 어쨌든 한 시대를 해석하는 입장이 동일했던 것 같아요.

100: 그래도 이견은 있었을 것 같아요.
천성일: 곽정환 감독님이 처음엔 그래도 주제의식을 조금 더 강하게 전달해야 하는 게 아니냐, 하는 입장이 있었죠. 그래서 이 논문이라면 는 만화다. 같은 이야기를 하되 어떤 방식으로 풀어 가는지가 다른 거다. 이성으로 움직이는 드라마보다 가슴으로 움직이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죠. 결국 거기에 동의해주셨고.

100: 는 전반적으로다가 육체파잖아요. (웃음)
천성일: 하하. 감독님께서는 불처럼 타오르는 드라마를 생각하셨던 것 같고, 저는 물처럼 스며드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죠. 예를 들어 업복이(공형진) 일당이 혁명을 꿈꾸는데 사실 정확한 전략과 전술도 없고 심지어 총 던지고 도망가는 경우도 있잖아요. 한편으로는 그들을 희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열망이 숙성이 되지 않은 채 투사가 되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원래라면 노비들이 혁명을 해야 하고, 이들의 혁명을 좀 더 선연한 구호로, 정확한 단어로 주장했겠지만 여기서는 얼뜨기 같은 그들의 꿈만 보여주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죠.

100: 아무래도 현실정치에 대한 알레고리로 이 텍스트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없기란 힘들 텐데요.
천성일: 현실 정치에 영향을 받았는가가 아니라, 안 받을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드라마의 정치이야기에 빗대어 현실정치를 논하고자 하는 의도는 적었어요. 그보다는 더 근원적인 것을 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현실정치 이전에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이나 자세에 대한 이야기 말이죠. 아마 송태하가 영웅이 못 되는 것도 그래서 일거예요. 이 싸움을 통해 얻게 될 새로운 나라에 대한 정확한 청사진을 세우기 이전에 “나와는 다른 생각이 틀린 생각인가” 같은 영웅이 안 해도 될 고민을 하고 있단 말이죠. 무릇 영웅이라면 “나를 따르라!”고 앞으로 쭉 뛰어나가야 재미있는데 말이죠. 오지호 씨에게 좀 미안한 마음도 있어요. 훨씬 멋진 캐릭터가 될 수 있었는데 자기를 죽여야 하니까 대본을 보며 답답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권투선수가 폼이 흔들리면 안 된다고 하잖아요. 아무리 지치고 맞아도 처음에 잡았던 폼을 끝까지 가져가는 것, 그게 결국 승패를 좌우한다고. 역시 흥하든 망하든 그걸 지켜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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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낚시에 용 걸리는 것 봤수”나 “국수 잘 마는 년이 수제비도 잘 끓인다”는 식의 구수한 대사는 거의 마당놀이 작가 같은 느낌이랄까요.
천성일: 어릴 때부터 동네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많이 들은 편이예요. 또래 친구들도 옛날 이야기하면 세대차이 느낀다고 할 만큼. 그 외에는 책도 참고하고. 속담사전도 자주 찾아봐요. 거기에 달린 예문도 많이 보고. ‘나무 잘 타는 놈이 헤엄도 잘 친다’ 같은 기존문장을 ‘호미 빌려간 년이 감자 캐간다’ 같은 문장으로,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있다 가라’는 말을 ‘남 집이다 생각하고 조신하게 있다 가라’ 식으로 비틀거나 변형하기도하고요. 그런데 마의로 나온 윤뮨식 선생님 대사 중에는 ‘미꾸라지 짝짓기 하는 소리하고 있네’처럼 현장에서 애드리브로 만들어 내신 게 많아요. 너무 잘하세요. 그래서 편해요. 그냥 뒤로는 저는 ‘헛소리 하네’ 정도만 써놓으면 되거든요.

100: 하지만 동시에 같은 대사 안에서도 “물건 너 간 배는… 물 건너갔다고 봐야지” 같은 허무한 유머가 뒤섞여 있기도 하거든요. 특히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진짜 늦은 거 아니겠어요” 같은 대사에는 평소 팬이라고 자부하시는 에 대한 오마주가 읽히던데요. (웃음)
천성일: 그 말은 한 6년 전 쓴 시나리오에도 이미 있었던 말이긴 한데, 그나저나 은 정말 요즘 같이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빠지지 않고 챙겨보는 팬입니다. 제가 고향이 충청북도 옥천인데 “말이 그렇다는 거지, 뜻이 그렇다는 게 아니지.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같은 말을 많이 쓰거든요. 특히 친구들 중에 능글능글하고 도대체 무슨 행동을 할 지 모르고 어떤 말을 할 지 모르는 놈들이 많아요. 극중 방화백(안석환)의 말투는 현대백화점 천호점에 근무하고 있는 제 고향친구 말투 그대로고요.

100: 를 보면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배우들은 다 등장하는 것 같아요. 얼마 출연 못하고 죽어나가서 문제지. (웃음) 그 많은 등장인물들 이름 짓기도 힘드실 것 같아요.
천성일: 대길이는 ‘대끼리’에서 따온 거고, 태하는 남자 이름에 ‘클 태’자 정도는 들어가야 한다고 썼고 스태프들, 주변사람 이름도 많이 넣었고. 언년은 ‘어느 년’의 줄임말이고, 제 친구 형 중에 ‘중복이’가 있어서 ‘초복’이도 만들어졌죠. 그나저나 역적 리스트에 아무 생각 없이 장동건, 이병헌이라고 썼는데 그게 방송에 클로즈업 되는 바람에 아주 곤혹스러웠죠. (웃음) 2탄에도 멤버들 이름을 다 썼는데 빼라고 했는데 유재석, 박명수는 지켜냈어요.

100: 어릴 적부터 입담이나 글 솜씨가 남다른 소년이었나요?
천성일: 아니요 입담은 별로 없었어요. 장남이라 어릴 때는 엄마 앞에서는 착한척하고, 친구들 앞에 가면 깨방정 떨고 그랬죠. 잘 뛰어다닌다는 소리 많이 듣고, 머리 쓰는 것 빼고는 다 잘하는 아이였어요. 지금도 엄마는 서울에서 머리 쓰는 일 하고 있는 줄 아는데, 사무실에서는 사람들은 저 소개 할 때 이 분이 전화번호부도 찢어요… 라고 거의 차력하는 사람으로 말하니까…. (웃음)

100: 어릴 때 꿈은 뭐였는데요?
천성일: 고등학교 때까지는 출세하려면 육사를 가야 하는 줄 알았어요. 물론 충치 때문에 육사는 좀 힘들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죠. (웃음) 그러다가 종군기자를 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고. 그런데 종군기자라는 것이 전쟁터에서 일이 생기는 건데 그렇다면 늘 전쟁이 일어나길 바라야 하지 않나? 하는 직업적 딜레마가 있더라고요. 영화 일은, 돈 좀 많이 버는 줄 알고 시작했어요. ‘콘텐츠 비즈니스’라는 애매하고도 멋진 말도 있었고, 똑똑하고 멋진 사람들도 많이 모여 있는 것 같고. 자료조사를 해봤더니 이게 좀 괜찮은 거예요. 하… 자료조사를 잘못한 거죠. 괜히 할리우드에 대한 자료를 조사해가지고… (웃음) 결국 영화에 대한 엄청난 사명감, 영화는 나의 꿈, 하면서 이 판에 들어온 건 아니에요. 재밌겠다, 잘 할 수 있을까? 정도였죠. 그러다가 모 회사에서 영화 마케팅으로 처음 일을 시작하게 되었죠. 처음엔 제가 마케팅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었죠. 유혹해서 끌어들이고, 트렌드를 읽어내고 그 감각을 활용해서 뭔가를 하고 하는 걸 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결국 잘 못하더라고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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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프로필에 보면 제작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던데, 혹시 백만 여고생들의 심장을 뛰게 한 H.O.T. 주연의 그 인가요?
천성일: 아뇨. 제가 작업에 참여한 건 동두천 할머니들에게 가해진 미군범죄를 둘러싼 비극을 담은 ‘다큐멘터리’ 예요. 그런데 이 두 작품이 시기적으로 비슷할 때 나왔고 제가 한 웹진에다가 ‘아이돌 스타들의 인기만 믿는 영화제작의 허울’에 대한 비판 글을 한번 썼다가 메일함이 폭격을 당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으니 아예 관계없는 건 아니라고 봐야죠. (웃음)

100: 그리고도 하리마오 픽쳐스에 정착하시기까지 10여 년이 지나셨네요.
천성일: 영화 준비하다가 망하고 회사가 없어지기도 하고 그랬죠. 그러면서 군대에서 쓰는 ‘적재-후송-파기-방치’에 대해 온몸으로 느낀 거죠. 회사가 망했는데 짐을 많이 가져다 놓으면 힘들구나, 하는 깨달음! 지금도 짐이 A4 한 박스 하나를 넘지 않아요. 그렇게 옮겨 다니다가 제작을 시작했고 시나리오 개발하고 준비하다가 돈이 없으니까 제가 시나리오까지 쓰게 된 거죠.

100: 크게 제작에 참여하고 개봉까지 한 영화로는 이 최초인데 좋아하신다는나 과는 달리 상당히 비주류적인 영화였단 말이죠.
천성일: 정확하게 변방의 북소리 같은 영화였죠. 그런데 재밌잖아요. 다시 만들어지기 힘든 영화예요. 시나리오보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거죠.

100: “난 말이다, 다 싫구나, 니가 추운 게 싫고 니가 아픈 게 싫고 니가 힘든 게 싫구나” 같은 대사를 쓴 사람이라면 꽤나 로맨티스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동시에 머리에서 계속 주판알이 튕겨져야 하는 제작자로서 살아야 한다는 게 참 기괴한 일 같아요.
천성일: 감성적으로 계산하면 되는 거죠. 그리고 저 로맨티스트 맞아요. 물론 모자이크 장면 방송 된 이후로 로맨스를 넘어 ‘에로작가 천작가’로 불리고 있지만.

100: 에서 까지 일견 한 사람이 쓴 작품 같은 느낌이 안 들 수도 있고, 균질한 작품은 아니란 말이죠. 앞으로 결국 쓰고 싶은 작품, 제작하고 싶은, 만들 수밖에 없는 작품의 정수에는 뭐가 있을까요?
천성일: 재미있는거요. 뭔가를 주장하는 작품보다는, 장르에 충실한 작품을 하고 싶고요. 작은 이야기죠. 우주를 바꾸겠다거나 지구를 뒤집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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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결국 의 대길도, 태하도 중심인물들은 모두 과거에 매어있거나 너무 먼 미래에 대한 꿈으로 현재를 괴로워해요. 현재에 집중하고 즐기고 있는 인물이 없단 말이죠. 혹 그런 이유로 이들의 끝이 비극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들고.
천성일: 해석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제 나름대로는 해피엔딩으로 끝내고 싶어요. 구체적인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거고, 결국 희망은 신념이 돼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에요. 쉽게 이야기 하면 그래도 희망은 있다, 인데 이게 너무 멀고 힘들고 지치는 이야기잖아요. 방점이 ‘희망’에 찍히는 게 아니라 이 ‘그래도’에 찍히는 거죠.

100: 그러게요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기엔 아직 원손마마가 너무 어리시네요. 물론 그 귀여움에 인기가 여느 배우 못지않으시지만. 촬영현장에서 울다가도 고래밥만 주면 울음을 뚝 그치신다 던데.
천성일: 하! 새우밥 안 먹고 고래밥 먹는 배포 보세요. 역시 남다르시다니까, 마마께서는.

글, 사진. 백은하 one@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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