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희│생각의 끈을 조이는 영화들
지진희│생각의 끈을 조이는 영화들
“우와” “이야” “으악” “두두두두두” 호들갑스러운 감탄사와 의성어를 동원해가며 “내 인생의 영화들”을 말하는 지진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드라마 의 조재희가 겹쳐지는 천진한 얼굴이라니. 일에서 정확하고, 일상에선 정리정돈과 청결이 신조인 조재희가 아이처럼 행복해하는 때가 있다면 사랑하는 고기를 먹기 직전이나 찾아 헤매던 오디오를 발견했을 때다. 그 순간만큼은 조재희는 까칠한 건축가가 아닌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일곱 살짜리 소년이 된다.

사실 조재희는 대중이 원하는 지진희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드라마 의 강직한 민 종사관으로 인기의 정점을 경험한 지진희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TV 속에서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실제로 그가 연기한 반듯한 인물은 민 종사관이 거의 유일했음에도 말이다. “많은 분들이 을 보셨죠. 거기다 광고가 정말 많은 영향을 끼쳤어요. 깔끔한 정장이나 금융권 위주의 CF가 들어오다 보니까 (웃음) 더욱더 반듯한 이미지가 강해졌죠.” 그래서 이후 그의 행보는 민 종사관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사투처럼 보였다. 지진희는 광고주로부터 항의를 받을 만큼 망가졌던 구제불능 백수()이거나 왕년에 놀던 껄렁한 만화가() 혹은 출소한 운동권 학생(), 잔인한 청부살인업자()였다. 마치 자신의 반듯함을 박박 문질러 씻어 내려는 듯한 그의 작품들에 지진희는 대수롭지 않게 답한다. “제 반듯한 이미지가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어라, 이렇게 웃긴 면도 있었네?’ 하고 반전이 가능하잖아요.”

이미 주어진 것과 이루어낸 것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걸 토대로 더 높고 견고한 산을 쌓으려는 그의 성향은 암벽등반을 즐기는 이유에도 드러난다. “한 단계 위를 올라갔을 때, 하나씩 정복했을 때 느끼는 희열이 장난이 아니에요. 노력하는 만큼 실력으로 나타나니까 운동처럼 깨끗한 게 없어요. 삶이랑 똑같아요.” 운동 안에서도 삶을 반추하는 그가 운동보다 즐긴다고 밝힌 취미는 생각하기다. 그래서 지진희가 추천하는 영화들도 생각의 끈을 조이는 영화들이다. 일상의 고삐는 잠시 풀어두고 화면의 여백 안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생각들을 따라가 보는 건 어떨까?
지진희│생각의 끈을 조이는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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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tranger Than Paradise)
1984년 | 짐 자무시
“데뷔하기 전, 대종상 영화제에서 세계 걸작 영화 특별상영전을 했는데, 그 행사의 포스터를 디자인한 덕택에 보게 된 영화예요. 이후로도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됐죠. 그 때는 사진과 디자인 쪽 일을 하고 있어서 영화의 장면, 장면의 구도가 사진처럼 완벽하게 느껴졌어요. 신에 대사도 거의 없고, 정적이 흐르는데 생각을 많이 하게 해줘서 좋았어요. 요즘 영화들은 빨라서 생각 할 여유 없이,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도 모르고 극장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은 찰나를 적절하게 포착해내서 그 순간에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줘요. 한 컷, 한 컷 충분히 느낄 수 있게 말이죠.”

아무 것도 얘기하지 않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도 많은 것을 얘기하는 영화. 손대면 부서질 것 같이 건조한 화면은 보는 이의 시선이 얽혀 들어와야 비로소 생기를 찾는다. 화면 안의 세 젊은이들이 결국 그들이 꿈꾸는 파라다이스로 갔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천천히 그들의 여정을 ㅉㅗㅈ으면서 일어나는 우리 안의 변화를 짐 자무시 감독은 노렸을지 모른다. 제 1회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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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Ballad Of Narayama)
1982년 | 이마무라 쇼헤이
“극장에서만 7번을 봤는데 같이 간 사람들이 다 절 죽이려고 했어요. (웃음) 재미없다고. 그런데 전 발가벗겨진 느낌, 인간의 본성이 어떤 것일까, 내가 지금은 이렇게 살고 있지만 인간의 밑바닥은 어떤 것일까, 나 또한 저런 상황이면 같지 않을까 등등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일주일 내내 봤는데도 매번 똑같은 느낌을 받고, 계속 울었어요. 아무리 효자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리면 이성보다 본능이 더 앞서는 현실 때문이었나 봐요. 보는 내내 창피할 정도로 계속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예요.”

극빈이 정점에 다다르는 산골의 겨울에는 입을 하나라도 더는 것이 모두가 사는 길이다. 집안의 노인을 나라야마 산 정상에 버리면 극락왕생한다는 가로전설. 극진한 효자도 흉년 앞에선 그 전설을 믿어버리기로 한다. 실제로 이를 부러뜨리고, 오지 마을에서 살며 영화를 완성한 배우와 감독의 집념이 섬뜩할 정도다. 제 36회 칸 영화제는 그 집념에 황금종려상으로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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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e Silence Of The Lambs)
1991년 | 조나단 드미
“굉장히 섬세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영화예요. 치밀하게 짜여진 각본뿐이 아니라 살인이든 결말에 대한 암시든 전체적인 이야기든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고 생각하게 만드니까요. 마치 영화가 관객에게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싸움을 거는 느낌이랄까요? 특히 안소니 홉킨스만이 풍길 수 있는 매력이 캐릭터를 200% 살린 것 같아요. 그 이후에 다른 영화를 봐도 렉터 박사의 느낌이 더 크게 작용될 정도로요. 안소니 홉킨스는 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완벽했어요.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감정을 자신 안에서 끌어내주니까 정말 대단한 배우죠.”

수많은 영화에서 살인마들이 등장하지만 한니발 렉터 박사(안소니 홉킨스)처럼 잔인하고 우아한 살인마가 또 있을까? 사람을 그저 죽이는 것이 아니라 가장 큰 고통을 줄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을 고안해 고문하고 인육까지 먹음으로서 완벽하게 악행을 완성하는 렉터 박사. 전기톱을 휘둘러도, 갈고리 손으로 위협해도, 비명을 지르는 해골 마스크를 써도, 사람의 뇌를 요리해 우아하게 와인까지 곁들여 먹는 렉터 박사의 오싹함을 따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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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Seven)
1995년 | 데이빗 핀처
“인간의 7가지 죄악에 따른 범죄를 보여준 게 굉장히 치밀했고, 무엇보다 좋았던 건 영상이에요. 약간 회색빛 도는 블루 톤의 화면이 그 도시와 인물들과 너무 잘 어우러졌어요. 보통은 스타일이 좋으면 내용이 부실한데 은 모든 걸 딱 맞게 만들어놓은 거 같아요. 물론 배우들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죠. 여기서 브레드 피트에게 반하지 않은 남자가 없을 결요?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자신의 매력을 한껏 발휘했어요. 멋지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웃음) 모건 프리만 또한 환상적이죠. 그렇게 완벽하고 지적인 느낌을 가진 배우가 또 있을까요?”

은퇴를 앞둔 노형사(모건 프리먼)와 신참내기 형사(브레드 피트)가 맡게 된 살인사건은 심상치가 않다. 성서에 등장하는 7가지 죄악을 연상케 하는 살인은 계속 이어지고 두 사람은 점점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게 된다. 결말의 반전은 충분히 충격적이지만 영화 전체를 엎어버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 만큼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영민하다. 끔찍한 살인 현장과 별개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치밀한 영상은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압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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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Apocalypse Now)
1979년 |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은 제 인생의 영화죠. 중학교 때 우연히 보러 갔는데 그때가 돌비서라운드가 처음 나왔을 때였어요. 화면에 헬기가 등장하는데 극장 안이 ‘두두두두두두’ 울리는데, 진짜 헬기가 제 옆에 있는 거 같았죠. (웃음) 영화 보는 내내 사운드나 영상에 압도되서 ‘와 어떻게 저렇게 찍었을까’ 감탄하면서 봤어요. 또 한 인간이 전쟁으로 인해 악마가 되어버리는 상황과 거기에 동화되는 인간들까지… 여러 사람들의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중학생이었는데도 그 충격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죠.”

인간은 지옥을 두려워하지만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내길 서슴지 않는다. 인류 최악의 발명품 전쟁은 지나간 자리를 모두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고, 계속되는 베트남 전쟁은 의욕 넘치는 젊은 대위(마틴 쉰)를 미치게 만든다. 실제 필리핀 정글에서 이루어진 촬영은 전쟁처럼 열악했지만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제32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거장의 칭호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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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을 앞두고 있는 의 김석현은 과거 누군가의 인생이 내게도 되풀이된다는 평행이론에 휘말려 며칠 동안 절체 절명한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 선택을 인생 전체로 확대한다면 지진희는 김현수보다 다단한 선택의 순간들을 맞아왔다. 디자인에서 사진으로, 공예에서 배우로, 그는 늘 방향키를 재게 움직이는 조타수였고 아직도 그를 다른 세상으로 이끄는 바람은 불고 있다. “직업이 많이 바뀌었지만 과연 배우가 종착역일까요? 디자인, 사진, 공예를 할 때도 늘 이 세상 최고의 직업이라 생각했어요. 지금 이 순간의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이후 어떤 일도 잘 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나중에 어떤 일을 할 지 모르지만 거기에 최선의 힘을 발휘하게 위해 늘 힘껏 살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으로 찾아온 지진희에게선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느껴진다. 영화가 처음으로 공개되는 자리에서도, 인터뷰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란 그의 기분 좋은 예상은 변함이 없다.

“여태껏 연기를 하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은 없었어요. 늘 목숨을 걸고 하죠. 십 년을 그렇게 살았더니 이제는 좀 자신이 생기는 거 같아요.” 최연소로 부장판사가 될 정도로 완벽했던 김석현은 평행이론에 점점 미쳐가며 운명 앞에 나약해 지지만 그를 연기하는 지진희는 마지막 반전에 이르기까지 힘 있게 극을 이끈다.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 단단하게 뭉쳐진 그의 어깨와 당당한 목소리가 언제까지나 흔들림 없기를.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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