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지금의 당신은 배우로서 어떤 지점에 서 있다고 생각하나. 그리고 무엇이 당신의 경쟁력이라고 생각하나.
정보석 : 40대를 넘기면서 내 길에 대한 방향을 찾고, 그러면서 관객들의 생각을 같이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들을 쫓아가는 것과 느끼는 건 전혀 다르다. 그저 요즘 대중이 원하는 것만 보여준다고 하면 대중이 나에게서만 찾는 고유의 것을 가질 수 없다. 세상에는 수 없이 많은 배우가 존재하고, 거기서 나는 무엇을 갖고 대중과 만나느냐로 배우로서의 가치가 결정된다. 수많은 배우들을 놔두고 내가 그 역할을 한다면 그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러면 내 방식대로 캐릭터에 대해 접근해야 하고, 나에게 맞게 캐릭터를 변화시켜야 한다. 그 접근법이 바로 정보석이 가지는 역할이 된다. 중요한 건 어떤 역을 맡느냐가 아니라 내면이다. 그 사람이 뭘 가지고 살아가는지 보여주는 거다.

“배우는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반문해야 한다”
정보석│“이순재 선생님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 -2
정보석│“이순재 선생님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 -2
그런 연기관을 가지기까지 터닝 포인트가 몇 번 있었을 것 같다. 영화 을 기점으로 당신의 연기나 작품 선택이 변했다는 생각도 든다.
정보석 : 이후에 가장 중요한 게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배우가 사람이라는 걸 포착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구나 싶었다. 그래서 캐릭터의 겉모습을 놓고 사람을 알려고 노력했다. 연기에 필요한 건 캐릭터의 드라마가 아니다. 드라마는 사는 모습 속에 저절로 우러난다. 그리고 그 전에는 MBC 가 첫 번째 계기였다. 그 전까지 나는 내 캐릭터에만 몰두했다. 그래서 대본에 계속 밑줄을 긋고, 분석하는 걸 반복했다. 그런데 를 하면서 내 대본뿐만이 아니라 현장이란 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내 역할과 내 상태만 생각해서 현장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내 역할만 잘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던 시기였으니까. 에서 현장 상황에 대해 알게 되면서 연기가 달라졌고, 더 이상 밑줄 치면서 대본을 분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이 그런 연기의 맛을 알아가는 것과 달리 한국에서 당신의 연기 접근법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는 한정적이다. 한국 드라마는 불안하고 고뇌에 찬 중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힘들지는 않나.
정보석 : 몸에 맞지 않는 캐릭터를 연기해야 한다고 해서 힘들지는 않았다. 나는 기본적으로 인물이 단순해지는 걸 싫어해서 캐릭터를 내 나름의 해석으로 소화하니까. 물론 그런 내 연기가 당위성을 얻지 못하면 되지도 않는 게 생각만 많다고 인정받지 못했겠지. 그래서 그 인물이 그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을 찾는 게 중요하고, 내 방식이 공감을 얻은 게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다행이다. 그래서 배우를 할 수 있었으니까.

그 점에서 MBC 은 당신의 연기가 성장하면서 만난 순간의 절정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중년의 인텔리이기도 하고 천박하기도 하고, 아내에 대해서도 복잡한 생각을 하는 한 사람의 총체적인 인생이 당신의 연기 속에 들어 있었다.
정보석 : 은 주변 친구들로부터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실제 펀드 매니저들도 있고, 다 그 나이 또래니까. 그 남자들이 갖고 있는 비뚤어진 욕망이랄까, 그게 고개를 들면서 남자의 인생에 균열이 일어나는데 그런 것들을 많이 지켜볼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사람은 어떻게 살든 진지하게만 살면 다 옳다고 생각한다. 다만 자기 삶을 진지하게 보고 가느냐 못 보고 가느냐는 있는데, 배우는 지속적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반문하려고 노력하는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어떤 작품이나 캐릭터를 만났을 때 내 속에 잠재 돼 있는, 내가 있는 삶의 굴레 속에서 만들어진 내 안의 본능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순재 선생님은 어떤 경지에 오르신 것 같다”
정보석│“이순재 선생님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 -2
정보석│“이순재 선생님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 -2
정보석│“이순재 선생님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 -2
정보석│“이순재 선생님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 -2
카잘스는 죽기 전까지 매일 연습하면서 “나는 지금도 내 연주가 늘어간다고 생각 한다”고 말했다고 하더라. 당신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다.
정보석 : 그렇다. 난 내 식으로 연기를 하고, 연기를 하면서 늘어가는 경험치가 있다고 믿는다. 나라는 그릇 자체가 매 순간 변해가는 게 있을 테니까. 나는 같은 생각을 갖고 산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의 방식이나 넓이라는 게 있으니까 달라진다. 그리고 그렇게 믿어야 하고. 나는 내 성장속도가 더디면 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정체되는 순간 내가 가진 배우로서의 가치는 상실된다. 그리고 작품을 제작하는 속도도 빠르고 양이 많으니까 배우 정보석이 그 속도에 맞추지 못하면 관객에게 금방 내 한계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만약 에서 보여준 정도의 깊이를 다음 작품에서 보여주면 나는 바닥이 보일 거다. 반대로 내가 을 3년 후에 다시 하면 캐릭터는 똑같아도 내 연기는 달라져야 하고. 내 생각은 3년 뒤면 또 달라져야 하니까. 나는 내 캐릭터가 중복되거나 답보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일이 없도록 배우 정보석을 잘 꾸려가고 싶다.

정체 되지 않으려면 매번 새로울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해야 하는데, 25년 동안 매번 새로운 작품에서 조금씩 나아지기 위해 준비하려면 고통스럽지는 않나.
정보석 : 사실 그게 제일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일단 연기하려는 인물이 누구에게 얘기를 해도 “그런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어떤 근거를 찾아내야 한다. 이것만 찾으면 캐릭터에게 섬세하게 빠져드는 건 훈련을 통해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근거가 드러나지 않으면 괴로워진다. 아무리 그 캐릭터에 대해 상상을 하고 살을 입혀도 그건 본질이 아니니까. 이 인물이 왜 지금 내 눈 앞에 이런 모습으로 서 있을까, 왜 이렇게 섰을까 하는 걸 잡아내는 게 가장 큰 일이다. 예전에 에서 사도세자를 할 때는 처음에는 이 사람의 생각이란 걸 몰라서 고민하기도 했다. 접근 하려면 그 사람을 이해할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잘 잡히지 않으니까. 그래서 그 분 무덤에서 고사까지 드리러 가서 곁에서 하루 자기도 했다. 꿈에서라도 나와서 좀 힌트 좀 달라고. (웃음)

그렇게 계속 늘어가고 고민하다 보면 본인이 생각하는 어떤 연기의 완성이란 게 있을 것 같다.
정보석 :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순재 선생님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나는 내가 구축한 캐릭터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큰 몸짓을 사용한다. 의식해서 그러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캐릭터를 관객한테 전달할 때는 상당히 크게 동작을 한다. 그래야만 내가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표현이 제대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순재 선생님은 어떤 작품에서든 큰 동작이 없다. 그런데도 어떤 작품이든 캐릭터가 다 다르다. 그래서 아, 경지에 서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작은 움직임을 갖고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게 연기의 이상 아닐까 싶다.

글. 강명석 two@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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