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오랜 잔영을 남긴 영화들
윤여정│오랜 잔영을 남긴 영화들
1947년 6월 19일 생, 예순 넷의 윤여정은 어떤 세대에게는 여운계인지, 전양자인지 헷갈릴 희미한 노배우의 얼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청자 혹은 관객들에게 윤여정은 대체 불가능한 배우다. 게다가 이런 사포 같은 목소리라니! “요즘엔 개성 있는 목소리들이 많지만 옛날엔 진짜 해괴한 목소리였죠. 나중에 들었는데 사람들이 뒤에서 윤여정 쟤는 목소리 때문에 안 돼, 그랬대요. 그러고 보면 난 참 많은 난관을 딛고 일어선 거지. (웃음)” 그러나 윤여정은 배우에게는 2.0의 시력이 아니라 바늘 하나 떨어지는 것도 느끼는 민감한 촉수가, 성우 같은 낭랑한 목소리가 아니라 걸걸한 한마디의 대사로도 가슴을 치는 살아 숨 쉬는 음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배우라는 바퀴를 쉴 틈 없이 굴려온 윤여정이지만 그녀 앞의 길은 한 번도 만만한 평지였던 적이 없었다. “피부 때문에 출연료를 깎아도 할 말이 없다”고 농담을 할 만큼 그녀의 얼굴 역시 매끈함과는 거리가 멀다. “한때 나는 내가 배우라는 게 자랑스럽지 않았어요. 내가 원했던 일도 아니었고, 주변에 잘나가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인지 이 직업을 멸시도 했었고. 그랬다가 이혼 후 그때 다시 돌아와서 배우가 된 것 같아요. 혹 내가 대기업에 잘나가는 사람이었다 해도 10년 동안 어디 갔다 오면 다시 그 회사가 써주겠어요? 그런 조직은 없죠. 그런데 드라마는 영화는 나를 받아들여주고 일을 줬고, 그리고 내 두 아이를 키우게 해 줬어요. 그때부터 나는 굉장히 감사히 연기를 했던 것 같아요. 어떤 역할이든 가리지 않았고요.”

그녀는 순수의 첫사랑보다는 요부였고, 미련한 현모양처 보다는 애교 많은 애인이었고, 국민 어머니보다는 사고뭉치 엄마였다. 에서는 권력의 총 싸움 속에 자멸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담담한 목소리로 전하는 기록자였고 에서는 “나 섹스도 해”라고 당당하게 말 하는 신여성이었으며, 에서는 “나 섭외하기 전 그 앞에 누가 있었는지 알아줘”라고 질투와 콤플렉스를 숨기지 않는 여배우다. 김수현과 노희경, 김기영과 이재용. 오늘날 배우 윤여정의 다양한 얼굴은 어쩌면 이토록 다양한 작가와 감독들의 손에 의해 빚어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인연 또한 “안경을 벗으면 애비 에미도 몰라볼” 나쁜 시력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관습적 트루기를 거부한 시대의 예술가들을 귀신같이 알아보는 그녀의 밝은 눈이 만든 생존 노하우라고 불러도 좋겠다. 윤여정은 태양 같이 불타오르기 보다는 서늘한 달 같은 배우다. 그리고 윤여정의 머릿속에 오랜 잔영을 남겼다는 이 다섯 편의 영화들 역시 그녀의 온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윤여정│오랜 잔영을 남긴 영화들
윤여정│오랜 잔영을 남긴 영화들
1. (The Pianist)
2002년 | 로만 폴란스키
“저 감독 참 명장이구나 싶었던 이유는 주인공이 덤덤하게 피아노를 치는 마지막 장면 때문이었어요. 울분을 담아 격정적으로 연주를 하기보다 그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에 더 가슴 찢어지더라고요. 보통 ‘신들린 연기’ 좋아하잖아요. 취향의 문제일 수 있지만 난 그런 연기가 싫어요. 예를 들어 옷고름을 풀면서 땅을 치면서 우는 연기보다는 뒤돌아서서 울지도 어쩌지도 못하고 어깨로만 울음을 꾹꾹 참고 있는 쪽이 훨씬 좋아요. 그게 더 아픈 것 같다고. 나 역시 그런 연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고요. 그래서 가끔, 연기 좀 성의 있게 해주세요. 그런 말을 듣는 경우도 있죠. (웃음)”

“당신의 직업은 무엇이었습니까?”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예술마저 집어 삼켜버린 2차 세계대전의 화염 속에 유대계 피아니스트 스필만은 가족과 동료들을 하나 둘씩 떠나보내고 폐건물에 숨어 힘겨운 생존을 이어나간다. 유태인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제 55회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윤여정│오랜 잔영을 남긴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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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e Sound Of Music)
1965년 | 로버트 와이즈
“난 노래도 못하고 뮤지컬 같은 건 아예 꿈도 못 꾸는 배우지만 노래 잘하는 사람이 참 좋아요. 노래 잘하는 사람이 제일 부럽기도 하고. 은 정말 몇 번을 봤던 장면도 TV에서 하면 또 넋을 놓고 보고 있다우. 아이들이 단체로 굿나잇 인사를 하면서 노래 부르는 장면도 좋고. 아마 클래식이란 게 이런 건가 봐요. 특별할 것도 재기를 부리는 것도 아닌데 변하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는 걸 보면.”

수녀원 출신의 명랑하고 다정한 가정교사 마리아(줄리 앤드류스). 원칙주의자지만 아이들에게는 무한한 사랑을 가진 트랩 대령(크리스토퍼 플러머). 그리고 7명의 사랑스러운 아이들. 이들의 짧지만 즐거운 동거는 2차 세계 대전의 포화 속에 점점 위협받는다. 하지만 ‘도레미송’을 합창하던 푸르른 잘츠부르크의 언덕과 짧은 커트머리의 톰보이로 등장한 줄리 앤드류스의 건강한 매력은 전쟁의 어두운 기운마저 날려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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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e Fall)
2006년 | 타셈 싱
“이재용 감독, 고현정과 같이 본 영화였어요. 영화의 주인공이 아주 어린 여배우인데 연기를 정말 기가 막히게 하는 거예요. 흔히 말하는 똘똘하고 예쁜척하는 아역 연기 톤도 없고 말이죠. 이재용 감독은 그 아이 연기를 보려고 두 번째 본다면서 “어디서 저런 배우 좀 만날 수 없나”라고 하더라고. 그 말을 들은 고현정이 “아, 나도 저런 감독 만나고 싶어”라고 맞받아치더라고. 그 아이의 얼굴이 영화를 보고 한참 지난 지금도 잘 잊혀지지가 않아요.”

남자의 말은 소녀의 눈으로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CF감독 출신의 타셈 싱은 이미 전작 을 통해 강력한 비주얼 충격을 던진바 있다. 그리고 은 한발 더 나간다. 컴퓨터그래픽이 아니라 자연이 축조하고 인간이 발견한 전 세계 26곳의 기괴하리만큼 아름다운 풍광은 시각 매체로서의 영화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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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Love Letter)
1995년 | 이와이 ㅅㅠㄴ지
“요즘은 기운이 떨어졌는지 강한 것 보다는, 잘 늙는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요. 영화도 온몸으로 뛰어들어 정신없는 것보다는 바라보고 관조 할 수 있는 게 좋고요. 그런 면에서 는 정말 멀리서 지켜보고 있지만 오랜 잔영을 남겼던 영화예요. 특히 여주인공이 “오 겡끼 데스까-”할 때의 눈동자를 보면서 아, 나도 한때 저런 눈동자가 있었지. 라는 생각이 들었죠. 슬프게도 더 이상 나에게는 없는 눈동자지만. (웃음)”

사랑하는 남자를 잃고 마음의 문을 꼭꼭 닫고 살아가던 여자 와타나베 히로코(나카야마 미호)는 어느 날 약혼자와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 후지이 이츠키(나카야마 미호)의 존재를 알게 된다. 두 여자의 오가는 편지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두 개의 이야기 속에 누군가는 미처 알지 못했던 첫사랑을 복원시키고, 누군가는 차마 떠나보내지 못했던 사랑에게 치유의 인사를 건넨다. 1인 2역을 소화한 나카야마 미호의 눈꽃 같이 순수한 이미지와 함께 일본영화 붐의 선두에 섰던, 이와이 ㅅㅠㄴ지 월드로 가는 가장 감미로운 설국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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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he Widow Couderc)
1971년 | 피에르 그라니에-데페르
“어려서도 그랬고 지금도 멜로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에요. 그런데 이 영화는 보통 멜로와는 참 다른 느낌이었어요. 젊은 남자와 늙은 여자의 사랑이야기라면 좀 이상할 수 있는데, 그 늙고 뚱뚱한 여자가 꽃같이 예쁜 남자와 나누는 사랑이 어쩐지 흉하지 않더라고요. 특히 시몬느 시뇨레가 알랑 드롱의 속옷 빨래를 자랑스럽게 하던 그 장면이 유독 기억에 오래 남아요. 사실 멜로 영화치고는 열정적인 장면도 별로 안 나오는데, 이런 장면의 은유가 오히려 나는 좋더라고.”

남편과 사별 후 시아버지, 시누이 부부와 함께 살아가던 쿠데르 부인(시몬느 시뇨레)의 집에 이방인 장(알랑 드롱)이 찾아온다. 탈옥수라는 신분을 속이고 쿠데르 부인의 집 일꾼으로 머물게 된 이 젊고 잘생긴 청년은 지치고 피로한 미망인의 삶에 잔잔한 파고를 일으킨다. 프랑스 추리작가 조르주 시므몽의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
윤여정│오랜 잔영을 남긴 영화들
윤여정│오랜 잔영을 남긴 영화들
작년 개봉했던 영화 은 결국 배우 윤여정으로 수렴되는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배우의 일생’이라는 화려하고 고단한 삶에서 본다면 5명 여배우의 현재는 모두 이 예순 넷의 배우가 이미 거쳐 온 삶의 어느 순간이었을 테니까. 윤여정 역시 스물넷의 김옥빈처럼 엉뚱하고 당돌한 아가씨였고, 김민희처럼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스물여덟의 터널을 통과해야 했으며, 서른다섯의 최지우처럼 자존심을 하이힐처럼 곧추세웠던 적도, 오십의 이미숙처럼 만사 명료하고 거침없던 시절도, 세상과 흥미로운 전쟁을 벌이고 있는 서른아홉 고현정의 전사 같은 얼굴을 한 적도 있었으리라. 어쩌면 이 나이 든 여배우의 삶에서 태양의 서커스는 이미 막을 내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이 어둠으로 접어들고 나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달, 그 월광 소나타는 이제 막 연주를 시작했다. 여행자의 길, 여자의 길, 여배우의 길. 이 ‘여정’의 앞날은 은은한 달빛만으로도 충분히 밝다.

글. 백은하 on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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