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영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첫 5분은 무척 느리게 흘러갔다. ‘여신’이라는 별명에 대해 정작 그 자신은 “여배우들한테 다 쓰는 말 아닌가요?”라고 무심히 반문했지만 강한 비현실성을 동반한 외모와 직선처럼 쭉쭉 뻗어 나오는 말투의 간극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하지만 인터뷰가 진행되던 스튜디오 옆방에서 자신이 출연한 MBC 이 방송되기 시작하자 ‘여신’의 얼굴은 에서 어느 날 갑자기 아홉 살짜리 아들과 재회한 트랜스젠더 미혼부 지현(이나영)처럼 당혹감에 물들었다. 그래서 “아, 너무 떨려요. 체할 것 같아” 라고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자신과 연기와 작품에 대해 냉철할 정도로 가감 없는 대답들을 내놓는 이나영과 이야기하며 알게 되었다. 연기하지 않을 때의 이나영은 아무 것도 연기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작품을 선택할 때 신중한 편으로 알고 있는데 (이하 )는 여러모로 파격적인 선택이었어요.
이나영
: 사실 이나 (이하 )은 굉장히 결정을 빨리 했는데 는 주위 우려가 많아서 결정에 좀 시간이 걸렸어요. 그 전까지는 작품을 선택할 때 ‘이미지’라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는 소재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 여배우의 이미지와 떼어놓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주위에선 ‘여배우가…’ 하는 걱정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결국 마지막에 결정할 때는 이미지보다 캐릭터와 장르를 봤어요.

“누가 그러던데, 너는 애랑 찍어도 버디무비라고”
이나영│“<하이킥>? 웃음을 주면 정이 생기잖아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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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를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뭐였나요.
이나영
: 조심스럽고 위험할 수 있는 소재와 코미디의 결합이 좋았어요. 우리나라에서 성전환은 특히나 익숙하지 않은 소재고 사람들도 정보나 지식이 별로 없잖아요. 그래서 이 소재와 장르의 결합에 가장 크게 끌렸고, 또 하나는 남자를 연기하고 싶었어요. 에서 밥 딜런을 연기한 케이트 블란쳇을 봤을 때 충격이 컸거든요. 그 전까지 단 한 번도 내가 ‘남자’를 연기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못해봤는데 그 때 문득 ‘와, 저런 기회가 우리나라에서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이 시나리오를 처음 만났을 땐 고민을 하면서도 결국 이런 걸 또 언제 해볼까 싶었던 거죠. 그래서 과거의 모습이든 아빠로서의 모습이든 저한테 중요한 건 ‘남장’이 아니라 남자였어요.

그럼 에서 남자였던 대학 시절 지현의 모습은 의 케이트 블란쳇에 대한 오마주인가요?
이나영
: 네, 그걸 꼭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원래는 더 파마 머리였어요. 그리고 영국 애처럼 만들고 싶었어요. 에서 빨간 중절모를 쓰고 나왔던 것도 어떤 영국 락그룹 멤버가 바지에 티셔츠를 걸치고 빨간 중절모를 쓴 걸 보고 한 거예요. 에서도 그런 영국 남자애 같은 스타일, 브이넥 스웨터도 그래서 입은 거고, 저는 이상하게 남자를 따라하게 될 때가 많아요. (웃음)

극 중에서 성별이 남자이던 시절의 지현과 여자로 살 때의 지현은 상당히 분위기가 다른데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어땠나요.
이나영
: 영화 전체에서 똑같아요. 처음부터 제일 복잡했던 건 제 선입견과의 싸움이었어요. 여자가 되고 싶었던 애니까 남자일 때는 더 여성스러워야지, 여자가 되고 나서는 남자 앞에서 더 애교 부려야 되는 게 아닐까, 아빠가 되었을 때는 그래도 예전엔 남자였는데 몸에 밴 남성다움이 좀 있겠지. 이런 생각들을 했지만 성전환 하신 분들을 만나 뵙고 인터뷰한 자료나 책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다양하듯 그분들도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분들도 화장하는 게 귀찮고 다이어트 열심히 하고 이성을 만나는 일로 고민하는 보통 여성들하고 비슷하지만 그걸 눈에 보이는 ‘스타일’로 표현하기는 어려운 거예요. 운동을 못해서 따돌림을 당하니까 굳이 잘 하려고 애쓰다가 몸이 아팠던 사람이 있는 반면 그냥 나는 운동이 싫으니까 안 한다고 쿨하게 넘겼던 사람도 있는 것처럼, 다들 다르거든요. 그렇다면 지현이는 어땠을까 생각했는데 에서 동구가 립스틱을 바를 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듯 얘는 남자 속에 갇혀 있던 과거에도 그냥 천상 여자였던 걸로 봤어요.

그래서 ‘남자’를 연기하면서도 진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여자가 ‘연기하는’ 남자가 된 것 같아요.
이나영
: 이 작품을 결정하고 나서 사람들의 얼굴을 많이 봤어요. 저 남자가 여자라면, 혹은 저 여자가 남자라면? 그런데 그냥 다 그 얼굴인 채로 가능할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성별이 바뀌는 데 따라 얼굴을 많이 고친다던가, 아빠가 되었을 때 턱을 좀 붙인다던가 하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그런다고 해서 리얼리티가 살지는 않을 것 같았고 오히려 관객들에게 부담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현이는 다른 사람한테 남자로 보여야 하는 게 아니라 유빈이에게만 아빠로 보이면 되는 거니까. 지현이가 생각하는 ‘아빠’라는 존재 역시 보통 여자들이 생각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어설픈 거였고, 그래서 사람들이 보면서 ‘그냥 이나영이네’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동안 양동근, 정재영, 강동원, 오다기리 조 등 정말 다양한 남자배우들을 상대로 연기해봤지만 에서는 아들 유빈 역의 김희수 군과 파트너였던 셈인데 느낌이 사뭇 달랐을 것 같아요.
이나영
: 제가 아이들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어서 긴장을 좀 했어요. 처음에 대본연습을 하러 만났는데 제가 낯을 가려서 말을 못 놓고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고, ‘아우, 남들이 이거 보면 미쳤다고 그러겠다’ 싶으면서도 어리다고 말을 툭툭 놓는 게 너무 힘들더라구요. 그래도 유빈이가 다른 애들처럼 막 끼를 보여주고 그런 편이 아니라 극 중에서처럼 굉장히 쿨한 성격이라 서로 좀 맞았던 것 같아요. 나중에 아빠 분장하고 같이 노는 신을 찍으면서 많이 편해졌어요. 누가 그러던데, 너는 애랑 찍어도 버디무비라고. (웃음)

“사람들이 날 보고 재미있어 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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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영│“<하이킥>? 웃음을 주면 정이 생기잖아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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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지만 지현과 유빈이 가지고 있었던 외로움이나 상처가 하나씩 드러나는 순간도 있는데 그런 면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어떤 거였나요?
이나영
: 여자 관객들은 의외로 많이 우시던데, 각자 느끼는 포인트가 다른 것 같아요. 저는 이걸 찍으면서 감독님께 “관객들하고 같이 울기 싫어요” 라고 말씀드렸어요. 이나 다른 작품을 찍을 때는 ‘나 이렇게 상처받았는데 당신들도 알아줘야지. 나 이렇게 아파요. 같이 울어야지’ 라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똑같이 울더라도 남에게 매달리거나 강요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 영화에서 제가 생각하는 주제는, 편집되긴 했지만 “이해는 안 되겠지만 인정해 줘. 나 지금 행복해” 라는 대사인 것 같아요. 나를 이해시키려는 건 아니지만 약간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굳이 그렇게 밀어내지 말아 달라는 거죠. 그래서 오히려 제가 슬펐던 장면은, 지현이가 아빠로 분장을 하면서 남자친구 준서(김지석)가 가발을 씌우고 분장해줄 때 나오는 뒷모습이에요. 저 여자애가 처음 사랑하고 이루어지고 싶은 사람 앞에서 커트 머리 가발을 쓰고 수염 붙이는 게 얼마나 싫을까를 생각하니까 가슴이 찡했어요.

는 대중성이 강한 작품이기도 하고 원톱을 맡았다는 점에서 흥행에 대한 부담도 어느 정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나영
: 사실 예전까지는 정말 죄송하게도, 그런 걱정이 별로 없었어요. 그리고 저는 항상 고를 때마다 흥행이 될 줄 알았어요. 도 저는 너무 재밌었거든요! 그런데 제 작품들은 스코어에 영향 안 주고 나중에 흥행이 되더라구요. 는 DVD가 잘 나가고 는 자꾸 재상영하고. 좀 앞에 반응이 있어주지. (웃음) 그런데 저는 그냥 제가 진짜 재밌어서 한 거니까, 다들 많이 노력했고 제가 이만큼 정을 줬으니까 많이 보면 좋겠죠. 하지만 흥행이라는 건 예측할 수가 없는 거니까, 그냥 이번에는 코미디라서 그런지 주위 반응이 너무 궁금해요. 이나 때는 제 연기에 대한 반응이 궁금했다면 에서는 관객과의 호흡이 어떤지 궁금하죠.

영화 홍보의 일환이긴 해도 출연 역시 재미있는 선택이었어요. 보통은 ‘무릎 팍 도사’에 출연하거나 하는데 으로는 뭘 하고 싶었나요.
이나영
: 라는 워킹 타이틀 영화가 있어요. 70년대 배를 타고 다니면서 로큰롤 라디오 방송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얘긴데 진짜 별 거 아닌 코미디에서도 제가 너무 웃었어요. 누가 실연에 대한 노래를 틀면서 미친 듯이 립싱크를 하고 있는 중 바로 옆에서는 다른 남자애가 그걸 불쌍하게 바라보면서 울고 있는 장면 같은 걸 보다 웃겨서 쓰러졌거든요. 그런 웃음을 좋아해서 을 한 것 같아요. ‘꼭 저렇게까지 홍보를 해야 되나’ 라고 하실 수도 있고 제가 콧수염 붙이는 나오는 게 안타깝다는 분도 계시지만, 그래도 웃음을 주면 정이 생기잖아요. 얼굴이 좀 일그러지고 그러더라도 사람들이 저를 보면서 재미있어 하면 좋을 것 같았어요.

지금 방송 중인데 보고 싶지 않으세요?
이나영
: 네. 창피해서요. 방송을 오랜만에 해서 그런가. 아니, 드라마를 할 때는 누가 뭐라 해도 제가 판단해서 캐릭터에 몰입하고 연기하는 거니까 남이랑 같이 보더라도 제 연기 보느라 정신없거든요. 그런데 은 왠지 도마 위에 올려진 기분이에요.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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