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진│휴식의 시간을 채워준 음악들
한혜진│휴식의 시간을 채워준 음악들
가족이 모여 시청하는 일일드라마에 씩씩한 뽀글머리 억척녀로 나와 친근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시청률 50%짜리 사극의 여주인공도 했다. 전문직을 소재로 한 트렌디 드라마에 출연해 시청률 참패도 경험해봤다. 배우 한혜진 이야기다. 결코 길다고 말하기 어려운 경력 안에서 이처럼 다양한 역할과 그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경험해본 배우는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혜진이라는 배우가 흥미로운 것은 쉽게 묶이지 않는 작품들에 출연했었다는 과거형의 사실 때문은 아니다. 중요한 건 출연하고 출연하며 여러 경험을 겪은 그녀가 지금도 출연하고 또 출연한다는 현재진행형의 사실이다. SBS 의 종영 이후 그녀는 명민한 열혈 여형사 역할을 맡아 영화 를 찍었고, 영화가 개봉하고 요즘에는 SBS 촬영을 위해 지방을 오가고 있다. 그리고 좀 더 중요한 건 그렇게 출연에 출연을 거듭하는 일정을 그녀가 원한다는 사실이다.

“ 할 때는 정말 많은 취재진이 몰리는 걸 1년 동안 보니까 그냥 당연하게 여겼는데 때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웃음) 사실 일을 할 때는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야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즐겁게 누리질 못하고 나중에서야 ‘굉장히 행복한 시간이었는데 나는 왜 누리지 못했지?’라고 생각하게 되요.” 사실 일이 없을 때는 혼자 음악을 들으며 하염없이 걷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는 걸 좋아하는 그녀는 워커홀릭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그 휴식이 빈 공간이 아닌 건 그 다음에 그녀가 항상 연기라는 음표를 새기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휴식은 더 역동적인 그루브를 만들기 위한 쉼표에 가깝다. 그래서 그녀에게 그 휴식의 시간을 채워줄 음악을 부탁했고 “장르 불문하고 한 번 ‘꽂히면’ 질려서 안 듣게 될 때까지 음악을 듣는” 그녀는 우연히 귓가를 스치며 마음을 울렸던 다음의 곡들을 추천해줬다.
한혜진│휴식의 시간을 채워준 음악들
한혜진│휴식의 시간을 채워준 음악들
1. < Cinema Paradiso (O.S.T) >
간혹 그럴 때가 있다. 너무나 친숙하고 쉽게 흥얼거릴 수 있지만 그래서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던 음악이 어느 순간 숨겨진 매력을 드러낼 때가. 영화 의 동명 테마인 ‘Cinema Paradiso’가 한혜진에게는 그런 음악이다. “학창 시절부터 익숙하던 이 음악이 좋아진 건 엔니오 모리꼬네의 내한공연에서였어요. 음악이 콘서트홀을 가득 메우며 울려 퍼질 때 영화나 오디오를 통해 듣던 것과는 다른 전율과 감동이 느껴지더라고요. 그 때 엔니오 모리꼬네가 괜히 영화음악의 거장으로 불리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주인공 토토의 마음을 누가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겠어요?” 보통 이라고 하면 엔딩곡인 ‘Love Theme’와 토토의 유년기 시절 흘러나오던 ‘Childhood And Manhood’를 떠올리지만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곡은 역시 메인 테마인 ‘Cinema Paradiso’이라 할 수 있다.
한혜진│휴식의 시간을 채워준 음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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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Karla Bonoff의 < Restless Nights >
프루스트의 를 보면 남자 주인공이 마들렌의 맛을 매개로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장면이 있다. 때론 음악이 비슷한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기아체험 방송을 위해 라오스를 방문했던 한혜진에게 Karla Bonoff의 ‘The Water is Wide’는 그 때의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때 묻지 않은 사람들과 동물들이 전체 풍경 안에 녹아있는 아름다운 곳에 아직도 베트남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어 가슴이 아팠어요. 그런데도 그곳의 아이들은 너무나 순수한 표정이죠. 방문 당시 우연히 ‘The Water is Wide’를 들었는데 지금도 이 음악을 들으면 강물 위에서 포탄으로 만든 배를 맨손으로 저으며 나를 건너편 마을로 데려다 준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요.” 어쿠스틱 기타의 반주와 칼라 보노프의 살짝 번지는 느낌의 보컬이 더없이 서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이 곡이라면 저녁노을이 진 라오스의 강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한혜진│휴식의 시간을 채워준 음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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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풍경 혹은 영상을 보며 그에 어울리는 음악을 들을 때 그야말로 ‘꽂히는’ 경험을 한다는 한혜진은 유독 영화 삽입곡을 많이 추천해줬다. 물론 대부분은 ‘Cinema Paradiso’처럼 영화를 위한 음악이 아닌 영화에 삽입된 음악들이지만 영상과 음악이 결합할 때의 울림은 결코 그에 못지않다. 한혜진이 매트 몬로의 올드팝 ‘What To Do’를 한국 영화 과 함께 기억하는 건 그래서다. “한국에서 다루지 않은 사교댄스라는 소재를 코믹한 한편 진지하게 풀어내서 굉장히 재밌게 본 영화에요. 춤 자체에 집중하면서 굉장히 아름다운 장면도 많았어요. 대중적으로 큰 호응을 얻지 못해 많이 안타깝지만 눈 오는 날 연인과 함께 보면 참 좋을 영화에요. 그만큼 로맨틱해요. 삽입곡인 ‘What To Do’는 유독 반주가 굉장히 로맨틱한 곡인데 그만큼 영화의 분위기와 참 잘 어울리죠.”
한혜진│휴식의 시간을 채워준 음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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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Simon and Garfunkel의 < The Sounds Of Silence >
한혜진의 추천 곡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을 만한 곡이다. 흥미로운 건 그녀가 곡들을 좋아하게 된 계기다. 국민 팝송이라 해도 무방할 사이먼 앤 가펑클의 ‘The Sound Of Silence’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이먼 앤 가펑클 정규 앨범이나 추억의 올드팝 모음집, 혹은 영화 의 삽입곡으로 기억되지만 그녀를 이 올드팝에 빠지게 만든 건 2008년 개봉작인 이다. “확실히 영상이 인상적일 때 거기에 맞춰 흐르는 음악도 마음에 확 들어오는 거 같아요. 영화 속 영웅 중 한 명인 로어셰크가 비를 맞으며 공동묘지에 서 있는 장면에 이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제목 그대로의 ‘침묵의 소리’가 그 장면과 영화의 어두운 시각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거 같아 좋았어요.”
한혜진│휴식의 시간을 채워준 음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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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는 영화의 순수한 이야기에 끌려서 몇 번이나 다시 본 작품이에요.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여주인공인 맨디 무어가 피아노 선율에 맞춰 ‘Only Hope’를 부르는 장면인데 그 진심에 남자주인공도 저도 반해버렸죠.” 가 주목을 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1999년 10대의 나이에 앨범으로 플래티넘을 기록했던 가수 맨디 무어의 첫 영화 출연작이기 때문일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순수한 소녀와 나름 놀 줄 아는 남학생 사이에 피어나는 로맨스를 그린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높지 않지만 영화 곳곳에 박혀있는 맨디 무어의 곡들은 그 아쉬움을 상쇄시킬 만하다. 특히 ‘Only Hope’는 맨디 무어의 맑은 목소리와 역시 맑은 어쿠스틱 피아노의 조합을 통해 극 중 제이미의 마음을 투명하게 비추는 매개체가 된다.
한혜진│휴식의 시간을 채워준 음악들
한혜진│휴식의 시간을 채워준 음악들
“만약 가 잘 됐으면 1년 정도 쉬었을 거예요. 저나 회사나 다음 작품을 고르는데 더 신중해졌을 테니까요.” 타이틀롤을 맡은 배우로서는 결코 즐거울 수 없는 시청률 부진에도 불구하고 는 그녀에게 오히려 약이 되었다. 덕분에 그녀는 저예산 영화도 좋고 연극도 좋으니 최대한 많은 기회를 원하게 되었고, 를 통해 어쩌면 남자 형사보다 더 전형적이라 위험 부담이 있는 여형사 역할에 주저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었다. “한 작품의 흥행 여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배우로서의 연륜을 쌓고 싶다는 욕심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한혜진이라는 배우를 온전히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여태 기록한 들쭉날쭉한 성적표가 아닌 그녀가 앞으로 열어나가야 할 수많은 가능성들이다. 두 작품 이후에도 그녀는 출연하고 또 출연할 것이고, 어느 날 우리는 금순이와 소서노에서 벗어난 ‘배우’ 한혜진을 만나게 될지 모른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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