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희│사랑의 다양한 면을 일깨워 준 연인들
김민희│사랑의 다양한 면을 일깨워 준 연인들
김민희는 훌륭한 기억의 서랍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수히 많은 컷들로 이루어진 모래성을 한 알 한 알 분리할 수 있을 만큼 정교하고, 영화의 장면들을 사진처럼 찍어 한 장씩 보관할 수 있을 만큼 넓다. 그래서 그녀가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말할 때, 듣는 이는 기묘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녀 뒤로 펼쳐진 벽은 스크린이 되고, 거기에는 그녀가 이야기 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어제 본 의 브레드 피트의 익살스러움을 묘사하는 김민희의 턱은 어느새 브레드 피트의 그것처럼 과장되게 나와 있고, 의 마틸다의 대사를 읊을 때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나온다. 말하는 장면과 주인공이 몸 전체에 번지는 김민희의 얼굴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새로운 모습이었다.

그것은 김민희라는 이름에 떠올려 지는 몇 가지 이미지들 때문일 것이다. 패션화보에서 발견되는 시크함 혹은 KBS 나 에서 보여준 당돌함. 김민희는 언제나 멋들어진 피사체였다. 그리고 그 스타일리시함은 종종 패셔니스타라는 팬시상품 같은 이름에 갇혀 배우의 역동을 방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민희는 “재미있는 장면을 따라하는 걸 좋아한다”며 몸 개그를 아끼지 않고, 오래 전 미숙했던 작품을 떠올리며 담담하게 “제가 연기를 못 한 거죠. 그 때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잘 몰랐어요”라며 군더더기 없이 인정한다. 그런 그녀의 간단명료함이 에서 “옥빈 씨는 하나 끝내고 쉬는 거지만 난 계속 쉬잖아” 같은 여배우로서는 쉽지 않은 대사를 내뱉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선 꽤 객관적인 판단으로 일관하는 김민희라 해도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선 한없이 편파적인 애정을 쏟아낸다. 행복한 얼굴로 쉴새없이 영화에 대한 수다를 쏟아내는 그녀에게선 어린아이의 천진함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고른 영화들까지 천진할 거란 섣부른 짐작은 접어두시길. 이별의 쓴 맛과 첫사랑의 열병, 죽음까지 초월하는 운명 등 사랑의 다양한 면들을 일깨워 준 연인들을 김민희가 말한다.
김민희│사랑의 다양한 면을 일깨워 준 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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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et The Right One In)의 ‘이엘리와 오스카’
2008년 | 토마스 알프레드슨
“뱀파이어라는 소재는 자극적일 수 있지만 제게는 너무나 순수하게 느껴졌어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두 아이의 외톨이 같은 사랑이 너무 예뻤죠. ‘누가 널 때려? 그럼 내가 가서 때려줄게’ 식의 사랑이 얼마나 둘에겐 큰 힘이 됐을까요? 하얗게 나온 입김이 호- 하고 화면 가득 퍼지면, 그냥 보고만 있어도 예뻐서 저절로 영화에 빠질 수밖에 없었어요. 둘이 떠나는 마지막 장면도 어디에선가 또다시 살아가겠구나, 둘은 사람들한테서 멀리 떨어져서 보호 받으면서 살았으면 하는 마음, 둘의 사랑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먹먹했어요.”

작년 겨울 어떠한 요란한 홍보도 없이 조용히 관객을 찾았던 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많은 이들을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서늘한 북유럽의 풍광을 닮은 영화는 뱀파이어물일수도, 남과 여의 지독한 사랑을 담은 멜로 영화일수도, 참수가 이루어지고 피가 튀므로 호러 영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은 장르적인 선 긋기를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답게 완결된 사랑에 대한 찬가 혹은 송가다. 그러니 현재 있는 틀에 끼우려 하지 말고 그저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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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의 ‘조엘과 클레멘타인’
2004년 | 미셸 공드리
“(공)효진 언니랑 극장에서 같이 봤어요. 도 그렇고 미셸 공드리 감독의 영화를 좋아해요. 기억을 지워주는 서비스라는 설정이 정말 기발하지 않나요? 어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정말 캡인 것 같아요! (웃음) 영화는 너무 슬펐지만 사랑이 어떤 것인지 정말 잘 보여줬어요. 그렇게 서로를 아끼던 사랑은 식어서 변해버리고, 지우고 싶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되는 게 바로 사랑이잖아요. 여자라서 그런지 사랑 이야기는 볼 때마다 아름답고 푹 빠져들고, 보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생각나요. 물론 사랑하고 싶은 마음도 들게 하구요. (웃음)”

서로의 기억을 지웠다 만들었다를 반복하며 매번 다시 사랑에 빠지는 조엘(짐 캐리)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은 천생연분일까? 아니면 익숙하고 편한 것에 자연스레 손이 가는 본능적인 현상을 겪는 것일까? 무수히 많은 연인들이 처음 사랑을 느낀 것과 같은 이유로 이별을 맞이하고, 조엘과 클레멘타인 역시 그렇다. 그러나 잊고 싶은 기억을 소거해주는 회사로 연인의 부재가 빚어내는 이별 후 스트레스 장애를 줄여보고자 하는 이 둘의 노력은 또 다른 사랑을 빚어낸다.
김민희│사랑의 다양한 면을 일깨워 준 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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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Leon)의 ‘레옹과 마틸다’
1994년 | 뤽 베송
“저 사실 마틸다 팬이에요. (웃음) 마틸다 콘셉트로 화보를 찍은 적도 있는걸요. 에서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한 마틸다를 보고 있으면, 어쩜 꼬마가 이렇게 잘하나 싶어요. 사실 오디션 영상에서 나탈리 포트만은 그저 새침하고 똘똘한 예쁜 아이였거든요. 영화 속의 섹시하기까지한 마틸다랑은 전혀 달랐어요. 그런데 그 어린 나이에 감독과 함께 자기에겐 전혀 없는 모습의 캐릭터를 만들어냈다는 게 정말 놀라워요. 또 은 순애보적 사랑,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사랑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보면서 참 많이 울었어요.”

화분, 선글라스, 우유 그리고 마틸다. 킬러 레옹을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다. 마틸다가 나타나기 전 레옹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인 화분 한 개와 알고 보면 티끌 하나 없이 순수한 그의 마음씨처럼 하얀 우유뿐이었다. 그러나 교통사고처럼 그의 인생에 쾅 하고 들어온 마틸다는 모든 것을 바꿔 놓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목숨을 기꺼이 내놓을 만큼. 영화 속에서의 사랑은 이렇게도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현실을 빛 바라게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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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e Brown Bunny)의 ‘버디와 데이지’
2003년 | 빈센트 갤로
“너무 좋아서 세 번이나 본 영화예요. 처음에는 영화가 뭘 얘기하고 있는지 잘 몰랐어요. 그런데 그런 영화들이 있잖아요. 특별하게 설명을 안 해줘도 혼자 느끼고 생각할 여지가 있는 영화들. 가 그랬어요. 사랑했던 여자와 헤어진 남자가 느끼는 이별 후의 괴로움이 그대로 전해질 정도였으니까. 특히 빈센트 갈로가 침대에서 우는 장면에선 정말 많이 울었어요. 남자 배우가 그렇게 펑펑 우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저도 모르게 따라 울고 있는 거 있죠.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감정, 괴로움, 아픔, 그리움이 그대로 느껴졌나 봐요. 사실 좀 선정적이기도 한 장면이었는데 그런 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너무 슬펐어요.”

2003년 칸 영화제를 경악으로 몰아넣었던 . 선댄스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며 데뷔한 빈센트 갈로 감독의 두 번째 영화는 그렇게 야유를 받으며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칸 이후 재편집된 영화는 모든 이들이 좋아할 수는 없어도, 많은 이들을 깊게 끌어들였다. 감독으로 하여금 다시는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끌어낸 문제작은 ‘죽은 애인을 잊지 못하는 한 남자의 방황’이라는 빈곤한 뼈대를 이보다 더 강렬할 수 없게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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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로리타 (Lolita)의 ‘험버트와 샤롯트’
1997년 | 애드리안 라인
“저 좀 이상한가요? 도 그렇고, 계속 부녀관계라고 할 만큼 나이 차가 많은 연인들 영화를 고르게 되네요. (웃음) 에서는 사랑을 할 때 짓는 표정이 어떤지를 볼 수 있었어요. 제레미 아이언스가 아직 아이에 불과한 소녀를 너무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거예요. 그 눈에서 남자가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게 느껴졌어요. 또 아슬아슬 선을 넘을 듯 말듯 한 야한 분위기도 재밌었어요. (웃음) 자신한테 반한 아저씨를 꼬마가 발가락으로 살짝살짝 건드리잖아요. 그런 모습들이 너무 예뻐 보였어요.”

뜨거운 여름 볕에 못 이겨 얻은 일사병처럼 의 매 순간은 현기증을 불러 일으킨다. 도덕적인 관념을 뛰어넘은 사랑의 감정은 단순명료한 것이지만 그것은 지켜보는 이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사랑과 욕정, 순수와 탐욕 등 당신이 생각하는 정과 반의 기준을 헤집어놓는 에드리안 라인 감독은 , 에서 보여줬던 아찔한 에로스를 소녀와 중년 남자를 빌어 쏟아놓았다.
김민희│사랑의 다양한 면을 일깨워 준 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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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옥빈 등 세대를 아우르는 쟁쟁한 여배우들과 을 함께한 김민희의 머릿속은 전에 없는 의욕으로 가득하다. “여배우라 불리고 싶었던” 김민희는 을 찍고 난 뒤에도 겨우 시작이라고 말한다.

“아직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은 여러가지 모습이 있어요. 주장이 강하고 똑 부러지는 역할들은 했지만 아주 약한 모습, 아픔이 많은 여성스러운 역할도 하고 싶구요. 사실 다음이 중요할 텐데 기다리고 있어요. 기다려서 정말 좋은 작품이 제게 왔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나이는 스물아홉. 스무 살도 서른 살도 아닌, 앞으로를 생각하면 사춘기처럼 불안하기만 한 나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대로 기다림은 그 불안함의 괴물을 다스리고 여배우를 만개시킬 수 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자에게 기다림은 고문이지만,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자에게 기다림은 숙성 혹은 발효의 시간이다. 그윽한 향기와 곰삭은 깊이를 가졌을 때 김민희는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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