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그 여자의 여정
윤여정│그 여자의 여정
“어? 여운계 선생님이다!” 배우 윤여정이 나타나자 까마득한 후배 김옥빈은 이렇게 외친다. 영화 의 이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등장은 실화에서 나왔다. 1947년 6월 19일 생, 예순 셋의 이 배우는 그렇게 어떤 세대에게는 여운계인지, 전양자인지 헷갈릴 희미한 노배우의 얼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청자 혹은 관객들에게 윤여정은 대체 불가능한 배우다. 게다가 이런 사포 같은 목소리라니, 다른 이와 혼동하기 너무 어려운 일이 아니던가.

뜨거운 모성보다 쿨한 동료애가 필요할 때
윤여정│그 여자의 여정
윤여정│그 여자의 여정
“개성으로 똘똘 뭉친 획기적인 아이”라 불렸던 범상치 않은 등장, 김기영 감독의 , 같은 작품을 선택하는 독특한 취향, 유명가수와 결혼해 미국으로 떠났다가 이혼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던 순탄치 않은 개인사. 김수현 드라마 속 세련된 도시여성으로 제 2의 배우 인생을 시작한 윤여정은 이후 SBS 의 고상한 엄마, KBS 의 친구 같은 엄마, MBC 의 철없는 엄마까지 드라마 속에서 수많은 어머니를 연기해 왔다. 그러나 정작 윤여정,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방황하는 나의 영혼을 따뜻한 밥으로 보듬어 줄 눈물의 어머니보다는, 이그 미친년, 하고 등 짝 한번 후려치고 스파게티를 사줄 것 같은 멋진 이모에 가깝다.

KBS 의 여자들은 힘들고 지칠 때면 노배우 오민숙(윤여정)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패기 넘치지만 미숙한 20대 여자(송혜교)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까칠한 표면으로 위장한 30대 여자(김여진)가, 성공의 높이만큼 피로의 깊이를 감내해야 하는 40대 여자(배종옥)가 이 60대 큰언니와 함께 와인을 마시고, 남자를 흉보고, 세상을 욕하고, 눈물을 흘린다. 영화 의 이재용 감독이 말한 “여자 후배들과 어울려서 이런 영화를 할 수 있는 배우가 누굴까 생각했을 때, 윤여정 선생님 밖에 없었다”는 증언을 덧붙이지 않아도 윤여정은 여인천하의 든든한 구심점이 되는 배우다. 그녀가 제공하는 이 ‘여자의 방’은 안락하지만 폐쇄된 자궁이 아니라 마음껏 울고 웃고 소리 지를 수 있도록 열린 크고 넓은 마당이다. 서슬 퍼런 복종보다는 평화로운 연대가 어울리는 세계다. 100도 씨의 끈적끈적해진 포옹이 아니라, 차지도 덥지도 않은 위로 속에 조용히 내미는 빈 어깨다.

배우 윤여정의 생존 노하우
윤여정│그 여자의 여정
윤여정│그 여자의 여정
배우라는 바퀴를 쉴 틈 없이 굴려온 윤여정이지만 그녀 앞의 길은 한 번도 만만한 평지였던 적이 없었다. “피부 때문에 출연료를 깎아도 할 말이 없다”고 농담을 할 만큼 그녀의 얼굴 역시 매끈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순수의 첫사랑보다는 요부였고, 미련한 현모양처 보다는 애교 많은 애인이었고, 국민 어머니보다는 사고뭉치 엄마였다. 에서는 권력의 총 싸움 속에 자멸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담담한 목소리로 전하는 기록자였고 에서는 “나 섹스도 해”라고 당당하게 말 하는 신여성이었으며, 에서는 “나 섭외하기 전 그 앞에 누가 있었는지 알아줘” 라고 질투와 콤플렉스를 숨기지 않는 여배우다. 김수현과 노희경, 김기영과 이재용. 오늘날 배우 윤여정의 다양한 얼굴은 어쩌면 이토록 다양한 작가와 감독들의 손에 의해 빚어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인연 또한 “안경을 벗으면 애비 에미도 몰라볼” 나쁜 시력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관습적 트루기를 거부한 시대의 예술가들을 귀신같이 알아보는 그녀의 밝은 눈이 만든 생존 노하우라고 불러도 좋겠다.

그녀의 월광 소나타, 이제 시작이다
윤여정│그 여자의 여정
윤여정│그 여자의 여정
12월 10일 개봉을 앞둔 은 배우 윤여정으로 수렴되는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배우의 일생’이라는 화려하고 고단한 삶에서 본다면 5명 여배우의 현재는 모두 이 예순 셋의 배우가 이미 거쳐 온 삶의 어느 순간이었을 테니까. 윤여정 역시 스물넷의 김옥빈처럼 엉뚱하고 당돌한 아가씨였고, 김민희처럼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스물여덟의 터널을 통과해야 했으며, 서른다섯의 최지우처럼 자존심을 하이힐처럼 곧추세웠던 적도, 오십의 이미숙처럼 만사 명료하고 거침없던 시절도, 세상과 흥미로운 전쟁을 벌이고 있는 서른아홉 고현정의 전사 같은 얼굴을 한 적도 있었으리라.

어쩌면 이 나이 든 여배우의 삶에서 태양의 서커스는 이미 막을 내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이 어둠으로 접어들고 나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달, 그 월광 소나타는 이제 막 연주를 시작했다. 여행자의 길, 여자의 길, 여배우의 길. 이 ‘여정’의 앞날은 은은한 달빛만으로도 충분히 밝다.

글. 백은하 on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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