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첩보 액션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이다. 대외적으로 존재 자체가 알려져있지 않은 비밀 첩보조직 NSS의 존재와 출생의 비밀을 가진 주인공, 첨단 기술과 육탄 공세가 더해진 추격 신 그리고 외교적으로 민감한 지정학적 위치와 핵무기 개발이라는 테마까지, 과연 이 수많은 떡밥들을 한 작품 안에서 온전히 소화하는 게 가능할지 의심이 들 정도다. 즉 는 그 안에서 가지고 놀 도구를 정말 다양하게 갖춘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의 픽션은 그토록 많은 요소들이 의 그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화학작용을 일으켰을 때 가능한 최악의 시나리오이다. 중간 중간 인용된 할리우드 영화의 장면들은 이 작품이 가진 수많은 요소가 얼마나 다양한 작품들을 불러낼 수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미사일 요격은 실패했다. 이제 30초 후면 모든 것이 끝난다. 백산은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이제 곧 서울은 지도상에서 사라진다. 그러고 보면 ‘그’가 머무르거나 목표로 삼았던 모든 도시는 폐허가 되었었다. 부다페스트도, 뉴욕도. 상념에 빠진 사이 시간은 계속 흘렀다. 12초, 11초, 10초… 백산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핵폭발 때 발생하는 빛은 눈을 멀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아예 모든 것이 끝날 테니까. 4초, 3초, 2초… 죽기 전엔 살아온 날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더니 백산은 이 모든 일의 시작인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김현준, 그를 배신했던 날이.

윤성철 북한최고인민위원장 암살 임무도 성공적으로 끝났다. 북한 요원들과 헝가리 경찰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지만 현준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조직에서 헬기만 지원해주면 해결될 문제다. “TK1입니다.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탈출 지원 부탁드립니다.” “미안하다. 지금 조직은 네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부국장님!” “조국을 위한 길이다. 이해해다오.” “야! 이 자식아!” 전화는 끊어졌다. 어느새 숙소는 적들에게 둘러싸였다. 현준은 숙소의 가스관을 끊고 뿜어져 나오는 가스를 보며 생각했다. 좋아, 죽어주지. 하지만 나는 이 화염 속에서 부활할 거다. 그리고 이 고통을 세상 모두에 안겨주고 지옥에 가겠어! 그는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말해. 보안카드는 어디에 숨겼지?” “여…여기 있습니다.” “필요 없어!” 총구가 불을 뿜자 피투성이의 남자는 그대로 쓰려졌다.

“연락이 끊겼던 TK12가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부하의 보고에 백산은 얼굴을 찡그렸다. 벌써 세 번째다. 행방불명된 NSS 요원이 시체로 발견된 것이. NSS를 노리는 사람들은 많다. 문제는 ‘어떻게’다. 킬러 빅이 데저트 이글을 한 손으로 쏘다 팔꿈치가 골절된 지금, 훈련 받은 정예요원을 세 번이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죽일 수 있는 실력자가 대체 몇이나 될까. “지금 인원수급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공채까진 5개월이나 남았습니다. 하지만 다들 업무량에 과부하가 걸려있기 때문에 특채가 필요합니다.” “각 특수부대에 공문 보내서 실력 있는 애들 리스트 좀 뽑아보고 현직 요원 추천도 좀 받아보도록 해.”

“좋은 아침입니다.” 신입요원 상우의 인사에 보안 담당자도 기분 좋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어디서 저렇게 능력 있는 청년이 숨어 있었는지 모르겠다. 인원 부족 때문에 급하게 실시한 특채에 지원해 역대 최고 점수를 기록하더니 현장 업무에도 초짜답지 않은 적응력을 보여줬다. 인사성도 바르고, 환경을 위해 꼬박꼬박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것도 기특하다.

상우는, 아니 현준은 아직 출근하지 않은 미정의 컴퓨터에 앉아 그녀의 C드라이브 곳곳을 뒤졌다. 진짜 고급 정보를 찾는다면 NSS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것보다 그게 더 빠른 길이니까. 이 천재 해커 아가씨는 기본적으로 첩보요원이 되기엔 보안 의식이 형편없는 타입이다. “찾았다…” 따오기와 가마우지 등을 거쳐 까마귀 폴더에 이르러 그는 각국 특수부대 및 첩보조직에 접속할 수 있는 임시 아이디 및 패스워드 발급 프로그램을 찾아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 다운로드를 마친 그는 이중으로 만들어진 텀블러 바닥에 메모리 키트를 숨겼다. 한 때 강남 상위 10% 산업스파이로 꼽히던 주아란이 가르쳐준 방법이다. 이제 복수만이 남았다. 배신의 아픔, 화염 속에서 온 몸이 불타던 아픔, 뼈와 살을 깎는 전신성형의 아픔에 대하여.

기대를 걸었던 특채 신입요원마저 행방불명됐다. 아직 시체는 찾지 못했지만 분명 같은 패턴으로 진행될 것이 분명하다. 대체 어떤 조직의 짓일까. CIA? 북한 정보부?

현준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금 백산의 머릿속에선 현준도, 상우도 산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건 자신의 움직임이 NSS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 자신이 벌일 일에 대해서도. 그는 자신의 옆에 놓인 대전차 무반동 로켓포를 바라봤다. 총이라면 연사가 가능하지만 로켓포는 단발이라 한 번에 끝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현준은 미리 봐둔 첨탑을 겨눴다. 살면서 뉴욕에 악의를 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복수를 위해서라면… 굉음과 함께 탄두가 발사되자 무반동 화기답게 엄청난 후폭풍이 등 뒤를 휩쓸었다. 하지만 그것은 명중된 첨탑이 부서진 이후 인류에 불어 닥친 후폭풍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S.W.A.T이 출동했지만 NSS 안에서도 최고의 날렵함을 자랑하던 현준을 쫓기엔 역부족이었다. 일부러 민간인이 밀집해 있는 백화점을 선택했기 때문에 높은 명중률을 자랑하는 S.W.A.T도 감히 그를 저격하지 못했다. 아마 그가 바깥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계산 안에 있었다. 심지어 날씨마저도. 문 밖으로 나가기 직전 현준은 하나, 둘, 셋을 세고 발을 내딛는 동시에 우산을 폈다. 마침 내리는 비에 행인 대부분이 우산을 폈고, 옥상에서 그의 움직임을 쫓던 S.W.A.T와 저격 팀은 그를 찾길 포기해야 했다.

청와대를 나온 백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대통령은 미국을 비롯한 우방으로부터 비공개 첩보부서 공개를 요구받았다. 무반동 로켓포를 이용해 각 도시의 랜드마크를 부수고 사라지는 저격수 A 때문이다. 백산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진작 테러의 위협을 받았을만한 서울에 아직 아무런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NSS 요원 중 자신의 감시 바깥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적어도 산 사람 안에서는. 비록 핀치에 몰렸지만 백산의 두뇌는 결코 녹슬지 않았다. S.W.A.T도 쫓지 못할 그 날렵함은 거치적대지 않는 복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는 살아생전 링클프리 바지를 즐겨 입던 한 요원이 떠올랐다.

현준은 이제 NSS와 백산을 굴복시키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분명 자신의 정체에 대해 각국 첩보기관은 한국을 의심할 것이고, 그에 반해 자신이 죽은 줄로 아는 NSS는 대충 얼버무릴 정보조차 없다. 결국 NSS의 존재는 밝혀질 것이고, 지난 윤성철 암살의 배후가 백산이라는 사실도 밝혀질 것이다. 그가 서울로 돌아온 건 마지막 계획을 위해서다. 똑똑. 노크 소리에 그는 별다른 의심 없이 문에 다가갔다. 적어도 서울에서 그를 위협할 존재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안렌즈에 눈을 대기도 전에 총알이 문을 뚫고 그의 몸을 스쳤다. “김현준! 거기 있는 거 다 안다!” 낯익은 목소리, 죽음의 위협을 느낄 때 자신의 도움을 거부하던 그 목소리다. “현준아, 너 아직도 잭필드를 입나 보더구나. 아무리 방심을 해도 그렇지 홈쇼핑으로 3종 세트 구입이 왠 말이니.” 이것저것 챙길 시간 따위 없었다. 그는 주저 없이 창문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NSS가 내려다보이는 J빌딩 옥상에 올랐다. 분명 시간 문제였다. 문제는 이제 시간이 없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계획을 짜기에 현준은 너무 지쳤다. 이렇게 된 이상 준비해둔 로켓포로 NSS 건물을 쏴서 조금이라도 분을 푸는 방법 밖에 남지 않았다. 만약 그가 그 마지막 방법을 포기했다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현준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저격수 A의 활동은 한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미사일 방어 체제 등급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로켓포를 겨눴다. 하나, 둘, 셋. 탄두가 날아갔지만 미처 NSS에 닿지 못했다. 요격용 미사일이 어느새 탄두를 차단한 것이다. 아마도 이때까지는 백산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방어 개념에서 선제공격으로 등급을 올린 일본의 이지스함에서 한국의 미사일 발사를 감지하고 바로 서울을 향해 미사일 요격에 들어간 것이다.

그 이후의 폭죽쇼는 말하자면 인류 역사 최대의 비극이자 코미디였다. 자동화된 미사일 방어, 아니 선제공격 시스템은 멈추지 않았다. 일본의 미사일에 대한 한국의 리액션, 그리고 그에 대한 일본의 리액션에 중국 공군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하지만 첫 핵미사일이 어느 나라에서 먼저 쏘아 올려 졌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그것이 인류 멸망의 신호탄이었다는 사실이다. 서울 중심에서 뻗어나간 새하얀 빛 안에서 백산의 반 쯤 남은 뇌는 외쳤다. 나는 사신을 키웠노라고.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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