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자살을 고민하는 남자, 인생에서 되는 일이 없는 남자. 누군가에게 이런 설정으로 영화를 만들어보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각한 분위기의 작품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 설정을 이렇게 뒤튼다. 형사는 옆에서 도와주고 싶을 만큼 무능하고, 자살은 번번이 실패하며, 되는 일이 없던 남자는 하다하다 못해 탑승한 택시 기사가 길을 모른다. 그 영화의 제목은 <기막힌 사내들>이었다. 장진 감독의 이 기막힌 데뷔작은 한국 영화계의 가장 독자적인 코드를 가진 남자의 등장을 알렸다. 그는 살인 사건으로부터 분단(<간첩 리철진>), 살인 청부업자(<킬러들의 수다>), 시한부 인생(<아는 여자>) 등 한 없이 무거운 소재를 다뤘지만, 그것을 한 없이 ‘기막힌 수다’로 풀어냈다.

누군가는 그가 영화를 만들기 전 이미 유명한 연극 연출가였다는 사실을 이유로 그의 영화 세계를 연극과 연관 짓기도 하지만, 삶과 죽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아이러니를 빛나는 성찰과 농담으로 그려내는 장진 감독의 세계는 이제 그만의 ‘영화’ 세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진 감독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조금은 다른 스타일의 영화였던 <아들>과 <거룩한 계보> 이후 연출한 <굿모닝 프레지던트>에 쏠리는 관심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의 독특한 세계 때문일 것이다. 한국 감독 중 누가 ‘장동건이 대통령으로 나오는 코미디’를 만들 생각을 하고, ‘로또에 당첨된 대통령’의 이야기를 생각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스스로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힘들고 무거운 이미지”라는 대통령을 “부담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내가 다루면 다른 방향에서 다룰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태연하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가장 진지한 것들을 무겁지는 않지만 보는 사람에게 성찰의 기회를 주는 장진 감독. 그가 삶과 죽음의 문제가 담겨 있는 영화 다섯 편을 골랐다.

1. <기쁜 우리 젊은 날> (Our Joyful Young Days)
1987년 │ 배창호

“아마 제가 네 번쯤 본 영화일 거예요. 20년도 더 된 전 작품이지만 지금도 전혀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 당시 배창호 감독님이 왜 충무로에서 천재 감독이라는 이야기를 듣는지 이 작품을 보면 단 번에 알 수 있죠. 캐릭터의 감정선을 끌고 가면서 관객을 거기에 빠져들게 하는 능력이 정말 대단해요.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황신혜 씨와 안성기 씨의 연기가 잊혀지지 않네요.”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죽음은 지고지순한 사랑을 완성시키도록 만든다. 영민(안성기)은 대학 시절 처음 혜린(황신혜)을 만난 뒤 그녀를 짝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은 다른 사람과 결혼한 혜린이 이혼하고 결국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순간까지 계속된다. 스토리만으로는 영화가 만들어졌던 1980년대에 볼 수 있던 신파극 같지만, 배창호 감독은 전형적인 러브스토리에서 벗어나 불멸이라 해도 좋을 사랑의 감정으로 그려냈다.

2. <하얀 전쟁>(White Badge)
1992년 │ 정지영

“1990년대에는 원작 소설을 배경으로 했던 작품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정말 뛰어난 작품이에요. 우리나라에서 베트남전을 그렇게 직접적으로 다루는 작품도 없었고, 시간이 지난 뒤 베트남전의 상처를 안은 채 그 시절의 악몽을 떠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전쟁을 그리는 몇 몇 이미지가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네요.”

월남전을 소재로 한 소설을 연재 중인 소설가 한기주(안성기)에게 월남전에 함께 참전했던 변진수(이경영)가 찾아오면서 그에게 감춰져 있던 월남전에 대한 정신적 상처들이 하나 둘씩 드러난다. 베트남에서 직접 촬영을 시도해 화제가 된 것은 물론, 월남전을 참전 군인의 시각에서 다뤄 그 당시에는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90년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알린 작품 중 하나.

3. <그녀에게>(Hable Con Ella)
2002년 │ 페드로 알모도바르

“사랑에 관대하지 않은 영화에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 그 사랑에 타협하거나, 이런 이유로 사랑 못해라는 건 안 되는 거죠. 사랑은 사랑이야, 죽을 때까지. 그렇게 말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닌데, <그녀에게>는 너무 좋아서 극장에서 세 번쯤 봤어요.”

‘독특한 감독’이라는 말 밖에는 설명이 안 될 것 같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그녀에게>에서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관객이 흠뻑 빠져들 수밖에 없는 사랑 이야기를 그려냈다. 영화에서 기억과 시간, 시점은 계속 달라지지만, 사랑에 관한 이야기만 들어도 눈물 흘리게 되는 끝없는 사랑에 대한 감정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어디까지 사랑할 수 있나요?

4. <러브레터>(Love Letter)
1995년 │ 이와이 슌지

“<러브레터>는 정말 독특한 멜로 영화였어요. 어떻게 손 한 번 안 잡고 그렇게 사랑을 멋있게 그리지? 흔히 상투적으로 “죽어도 잊지 못하는 사랑”이라고 하잖아요. 바로 그 감정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잘 만든 청춘 멜로라고 생각해요 (혹시 본인의 영화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랑 이야기가 있냐는 질문에) 저요? 아직 없어요.”

와타나베 히로코(나카야마 미호)는 자신의 약혼자 후지이 이츠키를 추억하던 중 그와 이름이 똑같은 그의 중학 시절 여자 동창 후지이 이츠키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명이인과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기억이라는 설정으로부터, 이와이 슌지 감독은 각자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사랑의 아릿함을 완벽하게 그려냈다. 국내에 일본문화 개방 직후 개봉돼 화제를 모았던 작품.

5. <스쿠프>(Scoop)
2006년 │ 우디 알렌

“우디 알렌은 정말 대단해요. 노장이면서도 여전히 현란한 농담과 장난들이 있고, 영화 안에서 진중한 이야기를 그렇게 무겁지 않게 다루는 것도 대단해요. 영화 안에서 늘 자신만의 일관성을 지키고, 영화를 즐겁게 찍는다는 게 느껴져요. 상업적인 문제에 타협하지 않고 자기만의 영화세계를 죽을 때까지 유지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존경스러워요.”

영화에서 늘 기막힌 유머에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을 담아내는 우디 알렌은 장진 감독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영화감독일 듯하다. 우디 알렌이 여전한 감각을 자랑하는 <스쿠프>에서 죽음은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이 된다. 잘 생긴 젊은 갑부가 사실은 연쇄 살인범일지도 모르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여기자가 점점 그를 사랑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죽음, 미스터리, 코미디가 우디 알렌의 영화 세계 안에서 멋지게 버무려진 소동극.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역대 대통령을 보고 느낀 대중 작가의 작품”

“글쎄요, 감독이 관객에게 영화를 어떻게 봐달라고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굿모닝 프레지던트>를 볼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냐는 질문에, 장진은 이렇게 말했다. 다만 그는 영화를 “선입견 없이 봐줄 것”을 부탁할 뿐이었다. 사실 연극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때론 코미디를 많이 선보인 감독이라는 이유로 그의 작품에 대해 단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도 했다. 그런 장진이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 자기 특유의 코미디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그만큼 자신의 ‘기막힌 수다’에 자신감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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