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간의 부산국제영화제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니 서울은 마치 그간의 부재에 화내는 냥 꽤 쌀쌀해졌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난 후의 무대처럼 힘찬 박수도 분주히 돌아가던 세트도 이제 다 사라진 무대 위엔 손석희 교수의 엉덩이를 걷어찬 미친 세상과 몇몇 아이돌 스타들의 안타까운 소식만이 우울한 애프터 파티처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살인면허 빼고는 다 선사하고 싶은 ‘연아신’의 완벽에 가까운 ‘007 무대’였달까요.

세상에나, 007이 피겨스케이팅의 소재가 되는 날이 오다니. ‘소련’을 절대 악의 캐릭터로 만들어 낼 수 있던 시대에 007 시리즈는 입이 쩍 벌어지는 최첨단 무기와 숨 막히는 추격전 그리고 제임스 본드와 본드 걸의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스타일로 전 세계를 휘어잡았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냉전의 시대의 종결과 함께 21세기의 첩보전은 새로운 요원을 찾아냈습니다. 그는 바로 <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의 본. 그 이름도 ‘제임스 본드’와 비슷한 ‘제이슨 본’이었습니다. 그는 악과 싸우는 멋진 영웅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시대에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혼란 속의 인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달력은 제이슨 본보다는 제임스 본드의 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징후가 아니라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는 여러 사건들을 비롯해, 남과 북의 분단, 그 사이에 흐르는 긴장과 이완을 여전히 정치적 카드로 써먹을 수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니까요. 그것이 KBS <아이리스>가 단 2회 만에 25%넘는 시청률을 동원 할 수밖에 없는 원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엄청난 제작비와 화려한 스타를 내세운 블록버스터 드라마 <아이리스>의 흥행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드라마 속 공포를 매일 피부로 느껴야 하는 우리는, 그렇게 행복하지 않은 국민인 것 같습니다. 007의 시대는 정말 죽지도 않습니다.

글. 백은하 (on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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