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런 남자가 어디 있을까. 처음 본 가난한 자매를 제 방에 재워주는 MBC <지붕 뚫고 하이킥>의 줄리엔은 벽안의 천사다. 난생 처음 맛 본 아이스크림에 환희의 탄성을 내지르는 소녀를 무등 태워 주고, 외로운 명절을 위로하기 위해서 분수 쇼를 보여주는 모습은 영락없이 동화 속의 키다리 아저씨를 떠올리게 한다. 아니나 다를까 스튜디오로 들어서는 그의 훤칠한 키가 새삼 놀랍다. 설치해 둔 조명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높은 어깨를 꾸벅 숙이는 모습 위로 초원의 기린이 겹쳐진다. 그 순간 활짝 웃는 얼굴로 줄리엔 강이 인사를 건넨다. 그것도 아주 또렷한 목소리로 말이다. “아! 안녕하세요?”

잘 생긴 얼굴보다 마음을 끄는 어떤 것

이제는 입에 익은 문장이지만, 편안하게 한국식 인사를 할 수 있기까지 그에게는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버지를 만나러 한국에 왔다가 모델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처음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출연 했을 때는 “현영 누나랑 남희석 선생님이 한국말 하는 거, 나는 하나도 몰라서” 그냥 자리만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카메라 앞에서 구체적인 연기를 하는 대신에 애드리브로 코믹한 춤을 선보였던 SBS <헤이헤이헤이2>의 헬스 트레이너, 외국인 배우로 등장했던 SBS <스타의 연인>, 취미로 해 오던 격투기 선수의 외모를 보여주는 것이 주된 역할이었던 SBS <드림>을 거치는 동안 줄리엔에게 한국말 대사는 언젠가 해 내야 할 연습의 내용이었을 뿐이었다.

준비가 결실을 맺은 것은 <지붕 뚫고 하이킥>의 김병욱 감독을 처음 만난 날. “너 잘생겼다”는 칭찬을 가장 먼저 건넨 감독은 그에게 한국어 대사를 읽어보도록 시켰다. 스스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은 했지만 기회를 잡기 위해 그는 솔직한 이야기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금 걱정 했어요. 아마도 잘 못하면. 그래서 감독님한테 나 1일 전에 연습 더하면 더, 완전, 잘할 수 있어요, 라고 했어요. 그걸 감독님이 믿었어요.” 노력에 대한 다짐 말고도 감독이 믿은 것은 그동안 섹시하거나 터프한 모습에 숨겨져 있었던 그의 눈빛이었다. 그리고 연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그 분위기야말로 줄리엔의 진짜 재산이었다. “줄리엔 착해보여서, 그런 역할 만들고 싶다고 했어요. 캐릭터가 부드러운 사람인데, 원어민 선생님이, 아마도 잘 어울린다고 그랬어요.”

“인생은 여행하는 거고, 나는 지금도 여행하고 있어요”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 계획했던 짧은 여행은 어느새 친구를 만들고, 동료를 만드는 긴 체류로 바뀌었고 그 과정을 줄리엔은 “그냥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어요”라고 요약하며 어깨를 으쓱 한다. 그래서 그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누구와 러브라인이 형성되며, 어떤 방식으로 자신이 더 웃긴 장면을 소화해 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일 뿐이다. “내 미래? 어떻게 될지 몰라요. 하지만 영화 하고 싶어요. 먼저 한국에서! 그리고 그 다음에 외국에서도 도전 할 거예요. 너무 빨리 가는 건 아니에요. 모든 건 스텝 바이 스텝! 계속해서 내 미래에 무엇인가 올리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그는 꿈을 꾸는 사람이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건 꿈이 아니라, 꿈 위해 가면서 배우는 것들이에요. 경험하는 거요. 여행하면서 문화는 달라도 사람들의 안에 있는 마음, 그거 다 똑같다는 것 알았어요. 인생은 여행하는 거고, 나는 지금도 여행하고 있어요. 아마도 죽을 때까지”라고 세상의 비밀을 슬쩍 알려주는 그는 꿈을 붙들기 보다는 그것을 향해 발돋움 하는 과정을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제야 그의 모습에 겹쳐 보이던 기린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끝없이 초원을 여행하는 이 동물은 누구보다 하늘에 가까운 곳에 눈을 두고 살아간다. 그리고 두 발은 언제나 땅을 딛고 있다. 날지 않아도 달려서 별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근력과 투지, 이만하면 슈퍼 기린의 탄생이다.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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