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호러다. MBC <밥줘>와 KBS <장화홍련>은 해당 프로그램의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는 ‘밥 한 공기에 사랑 한 숟갈’, ‘사랑과 가족의 따뜻한 의미’ 등의 설명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전개를 보이고 있다. <밥줘>에선 불륜을 저지른 영란(하희라)의 남편이 휠체어 신세를 지고, 진정한 사랑을 약속했던 새 남자에겐 느닷없이 존재도 몰랐던 아이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 정도 비극은 <장화홍련>의 홍련(윤해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친구인 장화(김세아)는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홍련을 납치하고, 폭행도 서슴지 않는다. 일일드라마와 아침드라마라는 평화로운 시간대에 음모와 액션 활극으로 보는 이를 공포스럽게 하는 가족 호러극들. 이들은 친구 혹은 가족을 밟지 않고선 정말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일까? <10 아시아> 윤희성 기자와 김교석 TV평론가가 매일 더 악독해질 수밖에 없는 이 기이한 드라마의 세계를 분석했다. /편집자주

어렵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던 미혼모 홍련(윤해영)은 우연히 버려진 치매 노인 변여사(여운계)를 만나 극진히 돌본다. 그리고 1년 만에 변여사를 찾아낸 그녀의 아들 태윤(장현성)은 홍련에게 연정을 품게 된다. 대형 쇼핑몰의 사장이자, 홍련의 여고시절 짝사랑 대상이었던 태윤은 홍련과 그녀의 딸을 받아들임으로서 백마를 타고 온 왕자님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KBS <장화홍련>은 신데렐라 테마를 답습하는 대신 태윤의 아내인 장화(김세아)를 등장 시켜 가난한 여자와 부자 남자의 사랑에 한층 커다란 시련을 안겨 준다. 덕분에 드라마는 공포물로 변주 된다.

그로테스크함이 전하는 극도의 긴장감

사실 <장화홍련>이 ‘막장’드라마로서 보여주는 수위는 충격적인 수준은 아니다. 살인을 교사하고, 문서를 위조하고, 방기했던 자식이 끝도 없이 출현하는 드라마들에 비하면 두 친구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갈등을 빚고, 혈연을 핑계로 협박이 성립되는 이 드라마의 위기는 애교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화홍련>은 인물들을 얽어 놓는 방식을 통해 이야기의 긴장감을 극대화 시킨다. 장화가 자신의 외도를 목격한 변여사를 유기했던 사실은 변여사가 돌아옴으로서 장화에게 공포의 상황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그 응징은 순차적이라서 먼저 장화의 외도가 들통이 나고, 그 사실을 임신으로 무마하려는 장화는 여전히 비밀로 남아 있는 두 번째 진실 때문에 끝없이 불안한 상태를 보인다. 그런 장화의 입장에서 공포의 대상은 예측 불가능한 시어머니이자, 그런 시어머니를 장악하고 있는 홍련이다.

반면 장화의 이러한 노력들은 홍련과 태윤에게는 그 자체로 공포의 요소가 된다. 이혼을 요구하자 정신병을 얻어 치매와 유사한 증상을 보이고, 하혈을 하는 장면들은 장화의 입장에서는 변여사와 동일하게 되어서라도 태윤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으려는 간절함의 표현이지만, 홍련과 시청자에게는 사상 유래 없이 그로테스크한 장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홍련이 들어와 살고 있는 태윤의 집에 숨어서 몰래 음식을 준비하거나, 사람들 앞에서와 달리 홍련에게만 멀쩡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화의 태도는 홍련에게 폭로하려고 해도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유폐된 진실’로서 공포스럽다. 진실은 숨겨져 있고, 드러나는 징후들은 인물의 주변으로 점점 조여 온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들은 태윤의 집이라는 공간으로 수렴된다. 그리하여 결국은 태윤의 집 자체가 하나의 진실이며, 사건이 되는 것이다.

방관자는 말이 없다

문제는 이러한 공포의 상황이 장화와 홍련, 두 여자 모두에게 각각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장화가 일련의 악행들을 통해 응징 받을 대상으로 묘사되고 있다면, 홍련 역시 친구의 남편인 줄 알면서도 태윤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제 아이의 생부로부터 받게 될 협박을 예상 했으면서도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는 등 미필적 고의에 대한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다. 공포는 죄의식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장화홍련>의 가장 큰 악인은 태윤이 된다. 장화와 홍련이 가족이라는 정체성으로부터 퇴출당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안 그는 이 모든 사실을 방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잘 돌봤기 때문에’ 홍련을 사랑하고, ‘내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에’ 장화를 받아들이는 이 남자는 같은 이유로 장화와 홍련을 외면했다. 즉, 태윤은 가족 이데올로기 그 자체이며 이것이야말로 <장화홍련>이 궁극적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공포의 대상인 것이다. 욕망에 충실한 여자 장화와 용기로 충만한 여자 홍련은 결국 가족의 구심점으로 기능하는 태윤을 만나 불행의 춤을 추게 되었다. 전래동화 속에서 아버지의 독단으로 장쇠를 형제로 받아들인 장화와 홍련 자매는 결국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물에 빠져 죽음을 당했다. 태윤의 진짜 이름이 장쇠라면, 어렵게 돌아왔지만 결국 <장화홍련>은 동화 ‘장화홍련’에 대한 재해석이다.
글 윤희성

MBC <밥줘>는 새롭지만 참신하지 않다. 아니 불쾌하다. 어느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비평적으로 파산한 드라마다. 아니 수다조차 아깝다. 이건 남기남 감독에게도 따귀 맞을 대본이다. 데리다나 가타리를 데려다놓아도 이 요상한 ‘작품’을 분석하기란 힘들 것이다. <밥줘>에서는 반전이 곧 전개를 의미한다. 이 반전들이 모여 줄거리를 이루는데 한 회 30분 분량의 드라마가 90회를 바라보는 지금 진행된 이야기라고는 바람난 한 부부가 이혼하려다 행정상의 문제로 실패했고, 계속 싸우고 있다 여기까지다. 물론 그 사이 숨겨둔 자식들도 몇몇 등장했다.

같은 막장이라도 SBS <아내의 유혹>은 굉장히 빠른 전개가 돋보인 드라마였다. <밥줘>는 패륜과 막장을 논외로 치더라도 드라마에 드라마가 없다. 서사를 이끌어야 할 캐릭터들에게서 일관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70회 가까이 바람난 아빠와 내연녀에 분노하던 딸 은지(하승리)는 어느 날 한순간에 엄마를 싫어하고, 내연녀 차화진(최수린)과 그의 아들 토미(이현우)와 친해진다. 모두가 궁금해 하는 그 이유를 엄마 영란(하희라)이 묻는다. 그에 대한 답은 이렇다. “내가 친해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나를 위해서라도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했더니 그냥 그렇게 됐어.”

분노의 공감대는 <밥줘>의 힘

동생 영미(오윤아)가 영란에게 하는 대사를 통해서 작가는 말도 안 되는 이런 상황에 합리성을 부여한다. “사람들은 다 자기 원하는 데로 자기를 이롭게 하기 위해 살아. 세상이 원래 그런 거라고. 그래서 큰언니도 은지도 다 자기를 위해 선택한 것일 뿐이야. 세상이 그런 걸 어쩌겠어.” 그냥 그렇게 됐고, 먹고 살자고가 캐릭터가 180도 돌변하는 이유의 전부다. 정말 실용적이다. 그런데 영란의 다음 대사가 더 중요하다. “그럼 여자가 엄마, 아내, 주부, 아주머니로 불리며 가족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봉사하며 사는 것도 자기가 좋아서 하는 거야?” 바로 이 대사에서 노골적으로 아주머니들에게 말을 건다. 서사와 설정이 막장일지라도 아주머니들이 공감하고 같이 분노할 상황들만 도출하면 된다는 발상의 출발점이다.

남편 때문에 속상해, 애 때문에 속 터져, 친척 간 분쟁도 생기고, 돈 앞에서 비굴해져, 며느리도 속 썩여, 이런 현실에서 짜증났던 상황을 최대한 극단적으로 만들어 분노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밥줘>의 힘이다. 가끔 상처를 받고 집안을 벗어나고 싶은데 딱히 갈 곳이 없는 아주머니들과 달리 영란은 돌아가 안길 남자도 있다. 연하에다가 자상하고 심지어 돈도 많다. 나름 로망과 울분이 저렴하게 다 담겨 있다.

하지만 저렴한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니 문제다.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어가는 방식이 불륜에, 맞바람, 납치와 감금 숨겨놓은 자식 여럿 등장, 집단 폭행, 부부강간, 남편과 내연녀의 동침 목격, 백마 탄 연하남이 사실은 애 아빠, 낙태, 물질 만능주의 등이다. 이런 작가의 도덕불감증은 엉뚱하게도 본처와 내연녀의 아이들이 식구처럼 잘 지내고 전 남편과 그 내연녀와 갈라선 아내의 언니 부부가 화목하게 손잡고 사업을 하는 유럽에서도 아직 건설 못 했을 대안가족 공동체를 탄생시켰다.

아주머니들, 정말 이런 상황에 공감하시나요?

이런 극단적인 상황들 속에서도 아주머니들이 공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 공감대를 형성하는 설정이 너무도 그릇된 인식에서 출발했고, 드라마라는 장르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법칙마저 무너뜨렸다. 이 정도면 영란 역에 하희라와 신애라가 번갈아 출연한다고 해도 설명이 가능할 수준이다. 다시 말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겠는데 너무 심한 반칙을 범했다. 그래서 극이 끝날 때쯤, 알고 보니 사랑이 최고였네, 돈보다 중한 것이 있었네, 라며 따뜻한 결말을 맺는다고 해도 이미 용서의 허용치를 넘어섰다. 그런데 이런 걱정도 필요 없을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줄밥이 아니라 엎을 밥상도 없어 보이는데 예고편을 보니 작가의 생각은 또 다른 모양이다. 정말 큰일이다.
글 김교석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글. 김교석 (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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