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수십 번, 방송 횟수로만 치자면 단연 으뜸이다. 강호에 입문한지도 벌써 수년, 경력으로 따져도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언더그라운드 힙합 신의 슈퍼 루키에서 통신사 광고 음악의 주인공이 된 지금을 슈프림 팀은 출발선이라고 말한다. “지난 주말에 그거, ‘아송페’ 식전 행사에 나갔거든요. 사람들이 몇 만 명 있었나. 지금껏 서 본 가장 큰 무대였어요. 그런데, 뭐, 반응은 썩……” 그래도 웃는 입 꼬리에 장난기가 주렁주렁 달린 이 센스는 주눅 들지 않는다. 예상한 일이라서 당혹스럽지도 않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좀처럼 웃지 않는 사이먼 디는 우렁우렁한 저음으로 한술 더 뜬다. “어떤 팬들은 나만의 슈프림 팀이라고, 오버그라운드로 나가지 말라고 하기도 하더라고요. 그런 말씀이야 고맙지만 그럴 수 있나요. 우리도 먹고 살아야지.”

오버그라운드에서 슈프림 팀으로 살아남기

먹어야 산다. 그 당연한 명제 때문에 두 사람은 숱한 상처와 고생을 감수해야 했다. 마이크만 쥐면 펄펄 날던 부산 남자 사이먼 디는 사람에 지친 마음을 가사로 풀어 놓기도 했고, 계약금의 일부라고 쥐어든 20만원으로 반년을 버티던 대구 소년 이 센스는 막노동으로 생활을 연명하는 날이 많았다. “서울이 뉴욕이라고 치면 부산은 LA, 그리고 대구는 시카고인거죠. 하하. 그래서 공연 할 때 서로 왕래 하면서 교류 하고, 각자 지역에서 저변을 넓혀 나가자 했던 아름다운 시절도 있었어요”라고 복기 되는 추억을 만들던 무렵에는 음악에 꿈과 희망을 실었지만, 현실은 냉정했고 서울은 차가웠다. 그러나 이미 우물 바깥의 세상을 본 개구리들은 다시 그 좁고 작은 세계로 돌아 갈 수 없었다. 두렵고 고달프지만 그저 믿는 수밖에 없었다. 우물 벽을 뛰어 넘고, 세상의 편견을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있다고. 그리고 삼킨 분노를 가사로 뱉어내는 동안 이 둘은 혀와 목소리의 무장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산전수전 끝에 나온 첫 앨범 이건만, 메이저에서 맞이하는 첫 무대는 이들에게 축하의 샴페인을 터트려 주기 전에 각오와 의지를 다지는 교훈을 한 꾸러미 안겨 주었다. 속사포처럼 터지던 랩이 부드러워진 자리에 까딱까딱하는 안무가 들어서자 변했다고 원망하는 팬들도 있었다. “어유, 옛날처럼 랩 하면 다 방송 금지에요. 하하”라고 이 센스가 엄살을 떨자 “그리고 안무 하면서 저희도 즐거웠어요”라고 전혀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얼굴의 사이먼 디가 입장을 정리 한다. “이번 앨범은 첫걸음 같은 거예요. 그 전에는 각각 이 센스와 사이먼 디, 둘의 프로젝트 같은 느낌이었다면 작업을 하면서 슈프림 팀의 누구라는 정체성이 확실히 생겼거든요”라고 자신만만한 쪽은 형인 사이먼 디, “새 집에 이사를 와서 짐을 막 부려놓은 상태가 첫 앨범이에요. 이제는 위치와 크기에 익숙해 졌으니 훨씬 자유롭고 편안하게 슈프림 팀만의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세심하게 상태를 짚어 주는 쪽은 동생인 이 센스다.

“우린 서서히 올라가는 느낌을 받고 있어요.”

걸어온 길, 그리고 그 길의 배경이 되고, 장애물이 되고, 때로는 이정표가 되어 주었던 한국 힙합 신에 관해 열변을 토하던 두 사람의 이십대 초반이라는 나이는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얼굴을 내민다. 카메라 앞에 서자 사이먼 디는 흘러나오는 자신들의 노래에 “어, 음악 좋은데에~”하며 큰 웃음을 터트리고, 이 센스는 “아, 가만히 있어도 멋있는 사람이면 좋겠다”며 응석을 부린다. 스스로도 “킵 잇 리얼”이라고 자부할 만큼 순탄치 않았던 성장사, 그 시절의 의문과 분노를 화려하게 풀어놓을 수 있는 랩 스킬, 절충은 하되 변절은 않는 고집과 균형감으로 이 자리까지 온 두 사람에게 위로보다는 기대를 보내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직 두 사람은 젊디 젊다. “우린 서서히 올라가는 느낌을 받고 있어요”라는 말에서 방점을 찍을 것은 ‘서서히’보다는 ‘올라가는’이라는 말이다.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