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사람이 첫 번째 계단부터 오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턱에서, 혹은 정상 가까운 곳에서 출발선을 긋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세상이 불공평한 것은 또한, 아니다. 차근차근 쌓아 올라간 시간, 꼭 그만큼의 노력을 단기간에 쏟아 붓지 않으면 그 높은 곳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이 바로 세상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뷔부터 24부작 드라마 MBC <태왕사신기>의 주연을 맡았던 이지아는 지금껏 브라운관 안에서 언제나 전력투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성큼 뛰어오른 만큼 어깨에 짊어져야만 했던 무게를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SBS <스타일>의 이서정은 그런 이지아의 노력이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들끓는 인물이다. 다사다난한 이서정이 된 그녀는 달리고, 넘어지고, 싸우고, 상사의 구두 굽에 밟히고, 엉망으로 얼굴을 꼬집히는가 하면 물에 빠지기까지 한다. 늘 사고를 만들고 억울함에 울상을 짓는 캐릭터의 성격은 일견 식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인물이 되기 위해 모든 장면에서 망설임 없이 최선을 다하는 이지아의 에너지는 신선하다. 적어도 그녀는 예뻐 보이기 위해, 꽃송이처럼 보여 지기 위해 작품을 선택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더욱 흥미로운 지점은 작품 안에서 요동치는 이지아가 화면 밖에서 진짜 제 얼굴을 드러내는 아주 짧은 순간들에 있다. 사생활을 개인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그녀는 수지니, 두루미, 혹은 이서정이 갖지 못한 특유의 진지함과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가 오랫동안 아껴왔던 다섯 곡의 노래들은 짐작만큼 말랑하거나 유쾌하지만은 않다. 태양의 딸처럼 뛰어다니던 이지아가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녀의 또 다른 모습, ‘깊은 밤을 함께 한 노래들’을 공개했다. 아직 해가 밝다면, 잠시 아껴두었다가 어두운 시간에 감상하기를 권한다.

1. Bjork의
어떤 사람에게 그녀는 백조 한 마리를 걸치고 레드카펫에 등장하는 기괴한 취향의 소유자일 뿐이지만 어떤 사람에게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뮤지션이다. 아이슬란드 출신의 비요크는 밴드 슈가큐브스 시절을 거쳐 1988년 솔로로 전향한 이래 동양과 서양, 과거와 미래,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독보적인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다. 이지아가 첫 번째로 추천하는 곡은 비요크의 두 번째 앨범 의 ‘Army Of Me’로 <이터널 선샤인>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미셸 공드리가 연출한 뮤직비디오로 유명한 곡이기도 하다. “저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음악이에요. 여린 것 같으면서도 강렬한 비요크의 목소리도 인상적이지만 드라마틱한 곡의 구성이 들을 때마다 새로운 곡이기도 하지요”라는 이지아의 말처럼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기묘하지만 눈을 뗄 수 없는 흥미로운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2. Fiona Apple의
많은 사람들이 피오나 애플이 부른 비틀즈의 ‘across the universe’를 좋아한다. 그러나 자신의 앨범 안에서 그녀는 훨씬 깊고, 훨씬 처연한 사람이다. 불과 19세의 나이로 데뷔한 이 싱어송 라이터는 첫 앨범으로 세 개의 그래미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부모의 이별과 성폭행, 따돌림 등 불행한 유년의 추억은 그녀만의 날선 감수성이 되어 공격적이면서도 애절한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1999년 이후 한동안 활동이 없었으나 Apple Cult로 유명한 그녀의 팬들이 자원 집결하여 음반사에 압력을 가한 덕분에 2005년 3집이 발매된 에피소드로 유명하기도 하다. 이지아가 추천한 ‘Sleep To Dream’은 데뷔앨범인 에 수록된 곡으로 이지아는 “고요한 밤 시간에도 어울리지만 혼자서 운전을 하면서 참 많이 들었던 곡이에요”라며 이 곡에 대한 애정을 표했다.

3. Smashing Pumpkins의
너바나와 함께 얼터너티브 록 시대의 양대 산맥이었던 스매싱 펌킨스의 앨범 가운데에서도 무려 28곡을 담고 있는 는 당대의 기념비적인 앨범으로 평가되는 명반이다. ‘얼터너티브의 얼터너티브’라는 찬사를 들었으며 감성적인 넘버들이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스매싱 펌킨스는 멤버간의 불화를 시작으로 2000년 그룹이 해체되었으며, 2007년 새로운 멤버 구성으로 부활하는 곡절을 겪기도 했다. 새로운 스매싱 펌킨스에 합류하지 않은 기타리스트 제임스 이하는 영화 <린다 린다 린다>의 음악 감독으로 새로운 활동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이 무렵의 노래들을 참 좋아해요. 특히 ‘Here Is No Why’는 베이스를 따라서 칠 정도로 몹시 빠져 있었던 곡이죠. 빌리 코건의 목소리도 좋지만 곡 자체의 분위기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곡입니다.”

4. Madeleine Peyroux의
1996년 데뷔한 마들린느 페이루는 당대 최고의 재즈 싱어였던 빌리 할리데이에 비견될 정도로 촉망받는 재즈 보컬리스트다. 나이에 비해 깊은 음색과 뛰어난 곡 해석력을 자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드러운 서정을 보여주는 그녀의 세 번째 앨범인 는 재즈로 재해석한 팝 넘버들로 구성 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이지아가 특히 아끼는 노래는 ‘blue alert’. 캐나다의 음유시인이자 싱어 송 라이터로 유명한 레너드 코헨의 노래를 마들린느 페이루의 목소리로 다시 부른 곡이다. “자기 전에 듣기에 참 좋은 앨범입니다. 차분하고 감미로우면서도 적당히 무드가 있거든요. 마들린느 페이루의 목소리 자체가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어요. 특히 ‘blue alert’는 촛불을 켜 놓고 들으면 금상첨화랍니다.”

5. Nine Inch Nails의
이지아가 마지막으로 추천한 곡은 지난 8월 15일, 국내에서 공연을 갖기도 한 인더스트리얼 록의 대부 Nine Inch Nails가 2007년 발표한 앨범 의 마지막 곡인 ‘Zero Sum’이다. 공연 투어를 하는 도중 세상의 종말에 대한 꿈을 꾸고 그 내용을 테마로 삼아 작업한 앨범으로 알려져 있으며, 따라서 앨범 전체가 하나의 서사시처럼 구성되어 있는 대작이다. 90년대 이후 전성기가 지났다는 평가를 들었던 밴드의 핵심이자 전부인 트렌트 레즈너는 2005년 발매한 와 이 앨범의 연속적인 성공으로 인해 다시금 장르의 중요한 현역으로서 부활을 인정받았다. “과거의 헤비하고 열정적인 이들의 음악도 좋지만 최근 앨범의 초월적인 느낌도 상당히 좋아합니다. 의외로 이 곡은 요리를 할 때도 제법 어울린답니다.”

드라마 <스타일>의 제작발표회에서 이지아는 “이서정을 연기하면서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들이 겪는 일에 대해 공감하고 배우는 부분이 많아요. 무조건 정면으로 부딪치기 보다는 때로는 돌아가는 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특히 깨달았어요”라고 소감을 밝혔다. 인물에 몰입하면서 배울 점을 찾는 태도는 물론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지아의 다음 선택이 우회로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겨우 세 개의 작품을 했을 뿐이다. 비난과 칭찬을 포함한 모든 평가가 아직은 섣부르다.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는 그 기세 그대로 한 번 더 정면으로 승부할 만하다. 그녀는 다음번에도 여전히 밤이면 조용한 음악에 마음을 맡겨도, 낮이 되면 온 힘을 다해 달리는 전력투구의 사이클을 놓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열심히 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잘하게 된다. 그것 또한 세상의 법칙이다.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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