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없는 소녀였다. 곰곰이 돌이켜 봐도 장기라곤 오래 매달리기와 오래 달리기 정도. ‘미스 레모나 선발대회’에 나가 받은 ‘상큼상’이 학창 시절 받은 가장 큰 상이었다. 친구가 방송국에 보낸 프로필 사진 덕에 청소년 드라마로 데뷔했고, 스무 살에 ‘아역상’을 받았다. 성년이 지나고도 오랫동안 교복 차림으로 TV에 나왔다. 셀 수 없이 많은 작품에 출연하지는 않았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뉴스의 주인공이 된 적도 없다. ‘여신’도 아니었고 ‘톱스타 C양’도 아니었다. 대신, 그렇게 15년을 꽉 채웠다. 오래 매달리기를 할 때처럼 가만히 숨을 참고 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리고 데뷔 15년 만에 타이틀 롤을 맡은 영화 <애자>에선 또다시 교복을 입었다. 이 요란스럽지 않으면서도 독특한 성장사는 배우 최강희의 역사다.

15년차 여배우, 장애물을 넘기로 결심하다

지난 해 SBS <달콤한 나의 도시>를 통해 칙릿 드라마의 새로운 신데렐라로 떠올랐던 최강희가 1년 만에 <애자>로 돌아왔다. 비 오는 날엔 시 쓰러 다니느라 학교 안 가고, 자신을 혼낸 선생의 차 백미러를 발로 차버리는 열아홉 ‘돌아이’ 여고생에서 접촉사고로 시비 붙은 남자와 길거리에서 ‘맞장’을 뜨는 스물아홉 소설가 지망생으로 자라는 박애자가 그의 새 이름이다. 억센 부산 사투리는 물론 “이 새끼, 저 새끼” 따위 욕설을 숨 쉬듯 내뱉고 수틀리면 닥치는 대로 가운뎃손가락을 펴 날리는 왈패 애자의 모습에서 지금까지 최강희의 그림자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캐릭터는 물론 의상과 스타일까지 ‘사랑스러움’을 그대로 그려낸 듯했던 <달콤한 나의 도시>의 오은수에서 이마를 드러내 짧게 깎은 머리, 비쩍 마른 몸에 커다란 코트를 걸쳐 입고 겅중겅중 골목길을 걷다 맞닥뜨린 깡패 여고생들을 향해 “계급장 다 까고 다이다이 완빵 붙을래?”라며 각목을 휘두르는 애자라니 이만한 변신이 또 있을까.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채우는 무심한 호흡

하지만 <달콤한 나의 도시>를 마친 뒤 “지금까지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캐릭터에 입혀서 연기했는데 이제는 내가 캐릭터를 입고 싶다. 넘어야 할 장애물에 지금은 약간 겁을 내고 있다”고 털어놓았던 최강희는 <애자>에서 단지 ‘변신을 위한 변신’에 머무르는 대신 전무후무한 개성을 지닌 여성 캐릭터를 입으며 자신의 영역을 한 발 더 넓혔다. 세상에 겁내는 것 없이 ‘욱’하는 성미대로 살던 애자는 ‘부산의 톨스토이’로 불리던 여고 시절과 달리 10년이 지나도 작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면서 벽에 부딪히고, 얼굴만 마주하면 시집가라며 잡도리하는 통에 죽도록 싸워대던 엄마(김영애)의 죽음이 다가오자 패닉에 빠진다. 그래서 ‘4차원 돌아이’가 현실과 마주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은 <애자>는 누구보다 최강희를 위해 준비된 장애물로 보인다.

사실 몇 년째 학교에 다니고 있는 귀신(<여고괴담>)이나 자신이 죽인 남자의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태연히 김치 냉장고를 주문하는 살인자(<달콤 살벌한 연인>), 40대 유부남의 가슴에 봄바람을 불어넣지만 ‘꽃뱀’과는 거리가 먼 구내식당 식권 판매원(MBC <떨리는 가슴>), 세 남자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무엇 하나 쉽지 않은 30대 초반의 인생을 헤쳐 나가는 편집회사 에디터(<달콤한 나의 도시>) 등 최강희가 연기한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대개 허구성과 현실의 미묘한 경계를 오가며 긴 잔상을 남겼다. 열연을 드러내기보다는 무심한 호흡에 가까운 최강희의 연기는 그 독특한 지점들을 찬찬히 채워나갔고 “휴대폰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발언이나 백혈병 환자를 위해 조혈모세포(골수)를 기증하는 등의 행동은 배우로서 뿐 아니라 최강희라는 ‘인간’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누구와도 닮지 않은 최강희의 또다른 시작

그래서 그동안 어느 누구와도 닮지 않은 길을 걸어온 최강희는 이제 여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역할모델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이상 ‘최강 동안’으로 손꼽히기는 힘들어졌지만 대신 그는 여전히 다양한 가능성에 가깝게 열려 있는 배우다. 지금 현실과 4차원, 여성과 소년, 미소와 ‘썩소’의 경계에서 최강희가 눈을 반짝인다. <애자>는 아마도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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