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들어가면 다른 건 아무것도 못해요. 대본 받고 날짜 받으면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거든요.” 무릎팍 도사의 상담이 필요할 것 같은 이 사연의 주인공은 배우 강지환이다. 배우로서 연기에 대해 고민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특이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강지환과 스트레스는 왠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최근작인 코미디 영화 <7급 공무원>에서의 작정하고 웃기는 연기를 차치하더라도 강지환은 대본 그대로의 꽉꽉 짜인 연기보단 자신만의 디테일을 덧붙이는 해석 능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가령 ‘깐죽거리다’는 어휘의 모범 용례를 보여주면서도 가슴에 품은 아픔을 문득 드러내야 했던 KBS <쾌도 홍길동>의 홍길동이나 자기 잘난 맛에 살지만 조금씩 조국의 현실에 눈을 돌리며 성장해가는 KBS <경성 스캔들>의 선우완은 브라운관 바깥으로 걸어 나온 듯 생생한 인물이었고, 그것은 다분히 대본에 없는 애드리브로 연기의 디테일을 넓힌 강지환의 공이었다. 여기에 팬 카페에서 교주로 활동하며 포교 활동 혹은 다단계 가입활동을 독려하는 모습까지 본다면 스트레스에 대한 강지환의 토로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런 연기에서의 애드리브가 돌발적인 재치가 아닌 ‘미리 시나리오를 짜는’ 철저히 계산적인 작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의 불면증과 두통을 이해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사실 영화 신인 연기상을 받겠다는 마음으로 고르고 골라 <영화는 영화다>에 출연해 국내 주요 영화제의 신인상을 싹쓸이한 그의 감식안은 그런 계산과 고민 없이는 가능하지 못했다. 더 중요한 건 그가 ‘앞뒤 계산에 머리가 아프겠지만’ 극악하면서도 일말의 동정을 이끌어내는 인물을 연기하고 싶다고 배우로서의 욕심을 숨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의 스트레스는 자신의 직업에 애정을 느끼고 매달리는 배우의 벗어날 수 없는 천형(天刑)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복잡한 머릿속의 열기를 식혀주는 음악을 부탁했다. 다음 곡들은 일에 대한 고민 때문에 뒤엉킨 강지환의 머리와 마음을 영점으로 되돌려 주는, 일종의 아스피린과도 같은 곡들이다.




1. 조하문의 <조하문1>
“아마 요즘 친구들에겐 조하문 선배의 이름이 생소하겠지만 노래를 들으면 누구나 ‘아!’하고 고개를 끄덕일 거예요.” 강지환이 고른 첫 번째 곡은 80년대 대학가요제 출신 가수 조하문의 1집 앨범에 수록된 ‘이 밤을 다시 한 번’이다. 그의 말처럼 소찬휘, 브이원 등 후배 뮤지션들의 리메이크 덕분에 조하문이 해사한 얼굴로 브라운관을 점령하던 시절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도 낯설지 않은 곡이다. 이처럼 세대를 초월하는, 격정적이지 않으면서도 감성을 서서히 자극하는 멜로디와 느릿한 템포는 머리뿐 아니라 감정까지 정화해줄 만하다. 재미있는 건 강지환을 통해 이 보편적 감성이 국경 밖에서도 통했다는 사실이다. “지난 7월 일본에서 진행된 팬 미팅에서 기타 반주에 맞춰 이 곡을 불렀는데 반응이 정말 좋더라고요. 원래 평소에도 즐겨 부르던 곡이었는데 팬 미팅을 위해 연습하면서 이 노래를 더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



2.
<마지막 황제>를 통해 세계적인 영화음악 작곡가가 된 류이치 사카모토의 첫 영화음악 작업은 <전장의 크리스마스>에서였다. 이 영화의 원제와 동일한 제목의 수록곡인 ‘Merry Christmas Mr. Lawrence’는 류이치 사카모토 특유의 동서양적 정서가 혼합된 뉴에이지풍의 연주곡이다. 신시사이저의 몽환적 울림이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는 뉴에이지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강지환 역시 머리를 식혀주는 곡으로 ‘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추천했다. “혼자 있을 때 들으면 좋은 음악 있잖아요. 그런 곡 같아요. 몇 권의 시나리오를 읽고 머리가 복잡해질 때 들으면 그 모든 엉킨 생각과 감정이 가라앉아요. 아마도 희로애락의 감정이 모두 묻어나오는 선율 때문인 것 같아요.”



3. 전람회의
“원래 김동률 씨의 중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를 좋아해요. 그의 음색을 거치면 사랑 이야기도, 이별 이야기도 모두 절절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특히 전람회의 2집 앨범은 마치 추억을 되살아나게 하는 타임머신 같아요. 기억 속에 남은 감정들이 고스란히 환기되거든요.” 이러한 전람회 2집에서 강지환이 추천하는 곡은 1집에 수록된 ‘기억의 습작’과 함께 가끔 노래방에서 부르곤 하는 ‘취중진담’이다. 술기운을 빌어 좋아하는 여자에게 고백하는 이 곡에서 격정적 사랑의 언어를 발견할 수는 없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그 흐름에 쉽게 마음을 맡길 수 있다. 그 때문일까. 김동률 특유의 다분히 재즈의 향취가 살아있는 고급 가요에 속하면서도 매우 높은 대중적 인기를 얻은 곡이기도 하다.



4. Stevie Wonder의
강지환이 추천하는 네 번째 곡은 스티비 원더의 ‘Isn`t She Lovely’다. 과거 MBC <무한도전>의 콘서트에서 정형돈이 부르면서 독음 그대로 ‘이즌쉬 러블리’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해진 이 곡은 선천적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던 스티비 원더가 딸을 보기 위해 시력 회복 수술을 시도했음에도 결국 실패하자 안타까운 마음과 딸에 대한 애정을 담아 부른 노래다. ‘그녀처럼 사랑스러운 생명을 가지게 될 줄 결코 생각하지도 못했죠’라는 가사를 통해 그의 절절한 부성애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눈이 안 보이지만 탁월한 청력으로 최고의 가수가 된 이력 때문인지 스티비 원더의 노래는 참 따뜻한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앨범을 선물해야 할 때 ‘Isn`t She Lovely’가 수록된 를 선물한다면 누가 받더라도 기뻐할 거라 생각해요.”




5. Glen Hansard, Marketa Irglova의
한동안 어쿠스틱 기타깨나 친다는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영화 <원스>에 수록된 ‘Falling Slowly’의 전주를 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유독 한국에서 선풍적이었던 영화의 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글렌 핸사드가 들려준 서정적이면서도 맑은 기타 연주는 인상적이었고, 마치 영화처럼 우리의 삶을 치유해주는 듯했다. 강지환 역시 영화를 보고 이 곡을 연주하고 싶어 하게 된 수많은 남자 중 한 명이다. “제 생각에 영화와 음악이 최고의 궁합을 보여준 음반인 것 같아요. 특히 ‘Falling Slowly’가 좋아요. 들으면서 한동안 안치던 기타를 오랜만에 꺼내서 다시 연주해볼 정도였으니까요. 남자들이 연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곡 1위를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모두 저와 비슷한 감정이지 않을까요.”




강지환│복잡한 머릿속의 열기를 식혀주는 음악


무릎팍 도사의 해결책은 대부분 상대방의 고민이 오히려 그를 현재의 위치까지 오르게 해준 원동력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스트레스로 고민’이라는 강지환에게 내려질 처방도 어쩌면 같은 식일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 M.net Japan과 리얼 다큐멘터리 쇼인 <강지환의 어느 날 어딘가>에서를 촬영하면서도 쉴 새 없이 떠오르는 아이디어와 콘셉트 때문에 ‘머릿속이 간질간질했던’ 그에게서 스트레스란 열정과 의욕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팬 미팅과 촬영을 마치고 일본에서 돌아와 그동안 못 보던 시나리오를 보고 새로운 캐릭터를 고민하는 그는 아마 앞으로도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고민과 불면의 시간에 비례해 다시 한 번 강지환이 만들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는 선명한 디테일로 우리 앞에 뚜벅뚜벅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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