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분 남짓의 시간 안에서 SBS <태양을 삼켜라>는 드라마가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볼거리를 제공하려 한다.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풍광, 서커스의 강렬함에 아프리카의 내전에서 살아남는 한국 남자들을 보여주며 거친 액션까지 선보이려 한다. 여기에 젊은 남녀들의 엇갈린 사랑과 키스 신의 공격적인 배치, 주인공 친구의 헐벗은 모습을 통해 제작진은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있다. 그러나 풍성한 볼거리와는 반대로 빈약한 이야기는 극의 재미를 삼켜 버리고, 어쩔 수 없는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태양은 삼켜라>는 역시 미국을 주 무대로 했던 <로비스트>처럼 규모로 주목받고 내용으로 외면 받고 말 것인가? <10 아시아> 최지은 기자와 윤이나 TV 평론가가 <태양을 삼켜라>를 복기했다. /편집자주

두 남자가 있다. 고아원에서 자란 가난한 남자는 부잣집 아들인 친구의 살인죄를 혼자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다. 그러나 복역을 마치고 출소한 그에게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고, 또 다른 살인 누명을 뒤집어 쓴 남자는 미국으로 떠난다. 시간이 흐른 뒤 그는 다시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친구와 맞서게 된다. 그 과정에서 라스베가스를 배경으로 하는 VIP 경호와 갬블의 세계가 함께 펼쳐진다. 이것은 2003년 방송된 SBS <올인>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것은 2009년 현재 방송 중인 SBS <태양을 삼켜라>의 줄거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태양을 삼켜라>는 <올인>의 표절작이 아니다. 두 드라마는 모두 최완규 작가의 작품이고 여기서 이루어진 것은 단지 자기복제일 뿐이다. 그러니까 <태양을 삼켜라>는 6년 늦게 태어난 <올인>의 이란성 쌍둥이인 셈이다.

의미를 상실한 소재들의 나열

그러나 같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음에도 <태양을 삼켜라>는 <올인>에 비해 모든 면에서 미숙아에 가깝다. 인하(이병헌)와 정원(지성)의 우정이 쌓이고 또 그것이 정원의 아버지에 의해 허물어지는 과정에서 각자에게 남은 상처를 설득력 있게 그려냈던 <올인>과 달리 <태양을 삼켜라>의 정우(지성)는 단지 성공할 기회를 얻기 위해 장민호(전광렬) 회장의 아들 태혁(이완)의 죄를 뒤집어쓰길 자처한다. 하지만 정우가 성공하고자 하는 이유 자체가 마땅히 제시되지 않으면서 장 회장의 배신과 태혁의 무감동한 반응 역시 이후의 갈등 구조를 어색하게 만든다. 주인공을 둘러싼 친구들 무리의 우정과 의리는 <올인>에 이어 <태양을 삼켜라>에도 같은 구도로 등장하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스토리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던 <올인>에 비해 <태양을 삼켜라>의 강래(마동석)와 세돌(여호민)은 정우를 따라다니는 역할 이상을 하지 못한다. 인간과 이야기에 대한 성실한 고민 없는 드라마에서 4.3이나 국토 개발단, 베트남전 등 현대사의 상흔들 역시 하나의 소재나 배경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 채 소모된다.

앙상한 이야기의 뼈대 위를 채우는 것은 이른바 ‘장중한 스케일’이다. 제작진들이 자신만만하게 밝힌 바 있듯 <태양을 삼켜라>는 제주도와 미국 라스베가스, 아프리카에서 작품의 상당 부분을 촬영했다. 제주도의 고아였던 정우는 라스베가스에 가자마자 아프리카 차차보 왕의 경호를 맡게 되고, 총격전에서 그의 목숨을 구해 준 덕분에 그와 ‘친구’가 된다. 천재적인 갬블러 겸 경호원 잭슨 리(유오성), 게이 용병 지미(홍석천) 등 수많은 인물들이 정우의 글로벌한 인생역정에 동참하지만 문제는 이토록 빈약한 이야기를 그 많은 등장인물이 나누어 갖기에는 모자라다는 사실이다. 결국 잭슨과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집안의 원조가 끊겼던 유학생 에이미(연우현진)가 라스베가스의 스트리퍼가 되거나 매일같이 미녀들과 흥청대던 차차보 왕이 어느 날 갑자기 애끓는 부정을 내보이며 아프리카에 가서 반군에게 잡혀 있는 아들을 구출해 달라고 정우를 설득하는 식의 볼거리를 위한 설정만 남발된다.

최완규 작가가 스스로 채워버린 족쇄

그래서 <올인>은 물론 <폭풍 속으로>와 <로비스트>에서도 드러났던 스케일과 스펙터클에 대한 최완규 작가의 강박은 <태양을 삼켜라>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족쇄가 되었다. 라스베가스의 화려한 스트립, 제주도의 골프장과 대저택, 아프리카 줄루족 전사들의 전통춤, 태양의 서커스를 종횡무진 하는 카메라는 세계풍물기행을 하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키게 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다. 지금은 에버랜드로 변신한 테마파크 ‘자연농원’의 80년대 가장 인기 있는 놀이기구 가운데 하나는 ‘지구마을’이었다. 보트를 타고 한 바퀴 돌면서 세계 각국의 전통복장을 한 인형들과 만나는 것만으로 당시의 어린이들은 열광했다. 지금 <태양을 삼켜라>는 바로 ‘최완규식 테마파크’의 지구마을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의 시청자들은 더 이상 80년대의 어린이가 아니다.
글 최지은

“언제까지 과거에 갇혀서 유치한 넋두리만 할 거야. 이젠 더 참아줄 인내심이 내겐 없다.” 과거 자신이 받았던 상처를 털어놓는 태혁(이완)에게 내뱉는 장 회장(전광렬)의 일갈은 SBS <태양을 삼켜라>의 등장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과거에 대한 강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비단 자신과 어머니를 내팽겨 쳐 두고 오지를 떠돌며 아귀같이 돈을 긁어모았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태혁 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왕국을 세웠을지언정 자신에게 드리운 젊은 시절의 짧은 사랑 미연(임정은)의 그림자를 벗겨내지 못하는 장 회장을 비롯해 이 드라마 속 어떤 인물도 과거에서 자유롭지 않다. “더러운 핏줄”을 타고난 비극적인 운명에 자기를 내던진 정우(지성)나, 제주도 밀감농장의 하나 뿐인 손녀딸로 공주처럼 살았던 그 시절을 되돌리고자 하는 수현(성유리) 모두에게 과거는 현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족쇄가 된다.

운명을 배반하지 않는 인물들의 롤플레잉 게임

<태양을 삼켜라>의 독특한 점은 그 과거라는 것이 이들의 현재 처한 사회적 위치 변화와는 별개로 등장인물들을 계급화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정우의 기억 속 어린 수현의 모습은 영락없는 공주님이다. 현재의 상황은 그렇지 않을지라도 수현은 여전히 그 기품과 자존심을 잃지 않고 있는 공주님처럼 묘사되면서 자연히 천애고아에 부둣가의 양아치로 살아온 정우는 그 반대의 자리에 서게 된다. 그 결과 결국 깡패와 해녀의 핏줄을 타고 난 정우는 수현 앞에서 이해하기 힘든 수치심과 죄의식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내 더러운 핏줄이 죈데 누굴 원망하겠어요”라는 정우의 대사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이 이해할 수 없는 사고의 전개를 등장인물들은 자연스럽게 수용한다.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이라며 인생을 어떻게 될지 모르는 도박에 비유하던 정우의 내레이션과는 달리, <태양을 삼켜라> 속 등장인물들의 계급과 운명은 처음부터 완벽히 결정되어 있었고, 누구도 그 운명을 배반하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태양을 삼켜라>에는 질문이 없다. 마치 ‘수현을 사랑해야만 한다’는 지상명령을 받은 것 같은 태혁이나, “꼭 내 쇼를 만들거야”라는 말만 반복하며 예쁜 펜으로 열심히 공부만 하는 수현에게 ‘왜’라는 질문은 허용되지 않는다. 운명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위해 아버지와 꿈을 배신했던 에이미(연우현진)가 다시 아버지에게 납치를 당하자 ‘그게 정혜가 행복한 길’이라며 보내주는 잭슨(유오성)은 이 드라마 속 인물들이 얼마나 운명에 수동적으로 반응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신의 삶에 놓인 문제들, 운명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 앞에 직면한 사건들을 그 때 그 때 헤쳐 나가기만 하는 것은 롤플레잉 게임이지 드라마가 아니다. 이러한 인물 설정에서 비롯된 <태양을 삼켜라>의 짜임새 없는 서사구조는, 이 드라마가 원작이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배경을 위해서 이야기가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이를테면 수현에게 ‘쇼’에 대한 꿈이 있어서 라스베이거스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야경을 비추기 위해 수현을 그 곳에 데려다 놓은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이다. 잭슨과 정우 일행의 아프리카행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아프리카로 갈 당위가 존재하지 않은 상태로 무의미하게 벌어지는 총격전은 단지 공허한 울림에 불과하다.

<태양을 삼켜라>가 올인해야 하는 마지막 도박

“아프리카의 오지를 헤매고 다니면서 난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 인생이 도박이었음을.” <태양을 삼켜라>는 11회에 이르러 1회의 오프닝 시퀀스였던 아프리카 내전 장면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를 배경으로 한 정우의 내레이션처럼, 인생과 목숨을 걸어야 하는 마지막 도박은 이름을 바꾼 아버지, 더러운 핏줄의 근원인 장 회장에 대한 복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이야기 속에서 쌓아올린 정우의 복수심은 오직 김일환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23년 이라는 긴 시간을 버텨온 이수창(안내상)의 그것만큼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너무 일찍 “영혼을 팔아버린” 탓인지, 정우의 인생을 건 도박은 그다지 흥미진진하지 않다. 너무 늦기 전에 여전히 ‘운 좋은 양아치’에 불과한 정우를 ‘돈이 아니라 목숨을 건 겜블러’로 만들어, 야차의 가면 뒤에 숨겨진 장 회장의 ‘인간’의 표정과 대결하게 해야 한다. 반복되는 과거타령에 ‘더 이상 참아줄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글 윤이나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글. 윤이나 (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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