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5월의 어느 밤, TV에서는 서정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단막극이 방송되고 있었다. 어릴 때는 천재라는 소리를 듣다가, 머리가 굵어진 중고등학교 시절엔 수재라고 불리다가 대학에 들어가서는 ‘범생이’가 되고 사회에서는 낙오자가 되어 버린 늙은 대학생이 고향 친구의 결혼식에 함을 지러 내려갔다가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과정이 그려졌다. 주인공은 자신의 옛 모습과 꼭 닮은 고향의 중학생에게 술에 취해 중얼거렸다. “인생이 이런 거다. 어릴 땐 수재여도 범생이 되고…낙오자가 되는…” 산울림의 ‘꼬마야’가 BGM으로 흘렀다.

“그날 밤을 잊을 수가 없어요.” 86학번인 이태곤 감독은 그때 대학 2학년이었다. 기자가 되고 싶어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갔지만 그의 20대는 꿈이 깨지면서 시작되었다.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이 열렸고, 학생들은 반대 시위를 벌였고, 대학은 휴강을 했다. 기자 역시 무기력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던 시절이었다. “내 인생을 뭐로 탕진하고 살까 고민하던 때에, 드라마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몇 해 뒤 그는 그 <베스트셀러 극장>이라는 단막극을 방송했던 MBC에 입사했다. 장수봉, 이관희, 최종수 등 ‘드라마 왕국’ MBC를 이끌던 감독들의 조연출로 일하며 현장 경험을 쌓고 인문학을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그 전까진 정말 천둥벌거숭이에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었는데 제 인생에서 최대의 행운이고 기쁨인 게, 직장 생활을 통해 사람 됐다는 거예요. (웃음)”

그 이후 ‘해서는 안 되는 사랑을 할 수 있는가, 그 사랑을 했을 때 어떤 비극을 감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12월의 열대야>와 ‘용서할 수 있는 것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며 나는 거기서 얼마나 자유로운 인간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변호사들> 등 장르와 스타일을 불문하고 인간의 정서를 충실하게 그려낸 드라마들을 만들며 MBC에서 13년을 보낸 그는 2006년 회사를 나왔다. “한 집단에서 그렇게 오래 지낸 건 처음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차장을 달고 나니 겁이 나더라구요. 간부사원이 되고, 운이 닿으면 국장도 되고 임원도 되겠지만 그런 걸 할 자신이 없었어요. 내부에 있으면 자연스레 프로듀서를 맡게 되니까 앞으로 3년 이상 연출을 하기가 힘들 것 같았는데, 저는 관리자의 성품은 못 되거든요. 연출을 하고 싶었어요.” 고향 같던 MBC를 그렇게 떠난 이태곤 감독은 지난해 봄 마흔 살 주부의 신데렐라 스토리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로 수많은 여성 시청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가 <그대 그리고 나>의 조연출 시절 친해져 함께 일하기까지 인연이 닿은 배우 故 최진실의 마지막 로맨스였다.

MBC <베스트셀러 극장 – 강>
1987년, 극본 최인석, 연출 이관희

“제 인생을 바꿔 놓은 그 단막극이에요. 학교에서 놀다가 술에 취해 들어왔더니 이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었어요. 86년 MBC 공채 탤런트로 들어온 박상원 씨의 데뷔작이자 첫 주연작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어릴 땐 공부 잘한다는 소리도 들었고 대학에도 들어갔지만 점점 꿈을 잊고 초라해지는 주인공의 처지가 저와 정말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조금 비참하기도 하고, 인생의 어두운 면이 보이기도 하고, 그게 슬프면서도 카타르시스 비슷한 감정이 느껴졌어요. 나중에 이관희 선배의 <아들의 여자> 조연출을 맡게 됐을 때 고백을 했죠. 나를 MBC로 이끌었던 사람이 바로 형이라고. (웃음)”

MBC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1990년, 극본 주찬옥, 연출 황인뢰

“세 여자의 이야기에요. 김혜자 씨가 엄마, 김희애 씨는 자아가 강한 언니, 하희라 씨가 날라리지만 정 많은 여동생을 연기하면서 한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드라마였는데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독특했고 영상이 예뻤어요. 특히 황인뢰 선배의 감성이 여자 얘기를 참 잘 담아냈죠. 예전에 MBC의 한 프로듀서와 이진석 선배 사이에 오간 대화가 있었어요. ‘감독님은 왜 연출을 시작하셨어요?’ ‘황인뢰’. ‘네?’ ‘황인뢰!’. 그래서 또 다른 감독에게 같은 질문을 했더니 ‘어, 황인뢰.’ 그리고 저한테도 물어보길래 ‘어, 이관희, 황인뢰.’ 그랬죠. (웃음) TV를 보는 많은 사람이 한국에서 저런 영상과 드라마트루기를 가지고 드라마를 만드는 황인뢰라는 감독에 대해 궁금해 하던 시절이었거든요. 말은 안 하지만 황인뢰 선배도 알고 있을 거예요. 누구나 다 사랑 고백을 했을 테니까. (웃음)”

MBC <아줌마>
2000년, 극본 정성주, 연출 안판석 이태곤

“2000년은 요즘 어떤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리는 시기의 초반이었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던 시절이었고, 안판석 감독과 정성주 작가는 시사와 문학은 물론 지금 한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연구를 끊임없이 했던 분들이었죠. 이 드라마의 야외 연출을 제가 해서가 아니라 (웃음), 그분들이 너무 훌륭했어요. 직설적으로 교훈을 주는 대신 ‘왜 이렇게 사나’라는 의문을 유머러스하게 던졌죠. 엔딩에서 삼숙이(원미경)는 식당 차려 성공하지만 장진구(강석우)는 교수직에서 물러나고 집에서 쫓겨나 조그만 아파트를 얻어 ‘장 선생 영어교실’ 플래카드를 걸어요. 그야말로 지극히 한국적이고 현실적인, 땅에 두 발을 탄탄히 디딘 작품이었고 여전히 제가 만들고 싶은 드라마의 전형이에요.”

“대중과 뭘 맞출 필요는 없어요”

이태곤 감독은 요즘 SBS <스타일> 후속으로 10월 방영 예정인 <그대 웃어요>를 준비 중이다. 하루아침에 몰락한 재벌가 가족들이 검소하고 충직한 자가용 기사의 집에 얹혀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과 로맨스를 코믹하게 그릴 가족 드라마다.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의 문희정 작가와 다시 파트너가 되었다. “시청자들에게 거부감을 주거나 욕 듣지 않고 칭찬받으면서 온 가족이 진짜 재밌게 볼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어요. 마침 가족극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문희정 작가의 대본도 재미있게 나왔구요.” <그대 웃어요>에는 <그대 그리고 나>의 최불암은 물론 <아줌마>의 강석우, <베스트셀러 극장 – 강>의 송옥숙 등 그와 다양한 인연이 있는 중견 배우들과 이민정, 이천희, 이규한 등 젊은 배우들이 출연할 예정이다. 과연 ‘막장’의 요소가 없는 가족 드라마가 요즘 같은 때 무엇으로 대중과 코드를 맞출 수 있을까. 우문에 망설임 없는 현답이 이어진다. “대중과 뭘 맞출 필요는 없어요. 내가 제대로 된 이성과 판단력을 가지고 이 드라마에 수긍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죠.” 자신만만함이 허황되게 들리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그의 작품은 언제나 그만한 자격이 있었다.

사진제공_MBC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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