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사실 동수(현빈) 씨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잘생겨봤자, 폼 잡아봤자, 지가 깡패지 별 거냐? 하는 생각이었어요. 그게 그렇더라고요. 일단 한번 밉게 보고 나니 음침한 표정하며, 삐딱한 시선하며, 내리 까는 음성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어째 하나 없었어요. 의리니 우정이니 말은 번드르르 해도 머리보단 주먹이 앞서는 통에 그처럼 밤낮 싸움질이나 한다 싶었던 거죠 뭐. 그런데 왜 그 고등학교 때 권투 시합 하던 날 말이에요. 다 이겨 놓은 게임이 승부 조작으로 엎어졌었잖아요. 입시 비리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막상 제 눈으로 목도하니 어찌나 기막히던 지요. 어쩜 어른들이 작당을 해 한 아이의 꿈을 그리 무참히 짓밟을 수가 있답니까. 게다가 하소연이라도 할 곳이 있는 아이라면 또 모르겠어요. 이럴 때 도맡아 싸워야 할 어머니는 일찍이 바람이 나 가정을 내팽개친 지 이미 오래고, 준석(김민준)이를 비롯한 어릴 적부터의 친구들이 여럿 있지만 자존심 강한 동수 씨가 속내를 털어 놓을 리 만무하니 말이에요. 다 의지가지없는 아이인 거 알고 꾸민 일일게 뻔한지라 더 분통이 터지지 뭐에요.

불쌍한 우리 동수는 사랑도 짝사랑이네요

더구나 어이없는 판정패를 당한 후 난동을 부릴 법도 하건만 그저 홀로 분을 삭이다 포기해버리는 모습에 제 억장이 다 무너졌습니다. 그 후 지켜본 바에 의하면 과연 동수 씨는 제 성미를 못 이겨 주먹을 쓰는 일은 결코 없더라고요. 거짓말처럼 억울한 일이 자주 벌어지지만 남을 원망하기보다는 자신이 재수 없어서 일이 꼬인다고 여기는 것 같았어요. 제 말이 맞죠? 주먹을 써도 매번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위험에 빠진 친구를 구하고자, 엄마와 바람난 인간을 아버지를 대신 해 응징하고자, 또는 은인의 복수를 위해 주먹을 썼을 뿐이잖아요. 그렇거늘 원인 제공을 한 친구는 멀쩡히 대학 진학을 하는데 동수 씨만 퇴학을 당하질 않나, 어머니로부터 따귀까지 맞으며 원망을 듣질 않나, 급기야 감옥까지 가는 등 책임은 온통 동수 씨에게만 돌아오니 이렇게 황당할 데가 있나요.

어머니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요. 엄마라는 사람이 왜 그리 매번 아들 발목을 잡는답니까? 자식이 그 힘든 뱃일로 모은 알토란같은 돈을 한 몫에 털어 잡수신 일은 차지하고라도, 그림에 대한 재능을 알아봐준 은지(정유미)가 그림 도구를 사 들고 찾아와 고백했던 날, 어머니를 꼬여낸 날건달이 주위에서 얼찐거리지만 않았더라면 두 사람의 감정이 달리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 아쉽더라고요. 사람들은 동수 씨의 진숙(왕지혜)이에 대한 일편단심을 두고 보기 드문 순애보라며 감탄하지만 저는 동수 씨가 애초에 은지의 마음을 받아주는 편이 옳았다고 보는 쪽이거든요. 진숙이가 전에 준석이(김민준)에게 농담 삼아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자기는 만화 <캔디>의 남자 캐릭터 안소니와 테리우스, 알버트 중 누구 하나도 버릴 수가 없다나요. 진숙이가 동수 씨 당신과 준석이, 그리고 상택(서도영)을 두고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 모르겠어요? 동수 씨에게는 단 하나의 소중한 사랑이지만 진숙이에게 동수 씨는 유일무이한 사랑이 아닌 걸 어쩌겠어요.

제가 응원하고 있단 게 도움이 될까요?

얼마 전 KBS <인간극장>에 5일장을 돌아다니며 어묵 장사하는 젊은 부부가 나왔어요. 처지는 좀 다르지만 외롭고 미래가 불투명하던 한 청년이 긍정적이고 밝은 처자 만나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는 얘기였어요. 그거 보면서 동수 씨 생각을 했습니다. 동수 씨에게도 저처럼 사랑스럽고 순수한 아내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요. 하지만 우직한 동수 씨가 진숙이에 대한 마음을 쉽사리 접을 리 있겠습니까. 그리고 아무리 남의 일에 말려들지 말라, 오지랖 좀 줄여라 말린다 한들 그 성정이 바뀔 리도 없고요. 어쨌거나 동수 씨가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된대도 저는 끝까지 동수 씨 편이 되어줄 생각이에요. 선발전에서 억울하게 판정패 당하던 때의 그 외로운 눈빛을 잊을 수 없어서 말이죠. 누군가가 믿음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면 좀 기운이 나려나요?

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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