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보다 음지, 앞 거래보다 뒷거래, 딱 질색인 거 정정당당.” SBS 드라마 <시티홀>의 민주화는 매 장면 손짓, 발짓 과장된 제스처까지 섞어가며 목청을 한껏 높인다. 게다가 하는 말마다 백치미와 민폐가 뚝뚝 떨어진다. 그런데 그 모습,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다. 기를 쓰고 음모를 꾸미지만 매번 신미래(김선아)에게 당하는 모습이 오히려 귀엽다. 추상미라는 배우에게 귀엽다는 말을 할 줄이야.

추상미는 한순간도 만만한 여자였던 적이 없다. 따박따박 연하 애인을 혼내는 사빈(<초대>)이거나 책 속에서 그대로 걸어 나온 퇴마사(<퇴마록>) 혹은 남자를 한순간에 바보로 만드는 묘한 여자(<생활의 발견>)였다. 그것은 단순히 강단 있어 보이는 외모 탓만이 아니다. 변호사, 의사 등의 직업이 잘 어울리는 똑 떨어지는 이미지 또한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15년 동안 연극과 드라마, 영화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능력치와 여전히 여배우로서 주목받는 외모를 보존한 자기관리가 획득한 트로피다. 그렇기에 그녀의 강하고 지적인 이미지는 허울이 아닌 추상미를 대표하는 하나의 무기가 되었다.

“일부러 카리스마 있거나 지적인 역만 한 건 아니에요.” 실제로 추상미는 다양한 캐릭터를 섭렵해왔다. SBS <8월에 내리는 눈>에서 이혼 후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 눈물짓기도 했고, SBS <사랑과 야망>에서는 밉상이지만 어쩐지 마음이 쓰이는 정자를 통해 촌스러운 분장에도 빛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여기에 민주화는 추상미의 무기에 귀여움이라는 항목을 보탤 것 같다. “코믹한 캐릭터는 처음이라 두려웠지만 사실 최측근들만 아는 실제 모습과 닮았어요. (웃음)” 그렇게 아무에게나 내밀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고양이 같은 그녀가 즐기는 영화는 의외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나 소통”에 관한 이야기다. 추상미가 말한 다음의 영화들에서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그녀의 진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 <타인의 취향> (Le Gout Des Autres)
1999년 │ 아네스 자우이

“이 영화야 말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에 굉장히 집중된 얘기를 하고 있어요. 처음 누구를 만났을 때는 이 사람이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상대방의 본질을 따지기 보단 취향을 통해 보니까 서로가 왜곡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감독은 영화를 통해 그런 관계 맺기를 비판하고 있죠. 평소에 제가 하고 있던 생각과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많았어요.”

직업에 귀천이 없듯이 취향에도 고저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어떤 노래는 저급한 것으로 어떤 연주는 고급스러운 것으로 치부한다. 그 재단이 얼마나 어이없고 웃음거리가 될 만한 것인지 프랑스 영화 특유의 뒷맛 쓴 농담으로 요리했다. 그림을 모른다고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를 무시하는 여자, 동생의 집 인테리어 사사건건 간섭하는 언니까지. 영화는 차례차례 서브되는 프렌치 코스 요리처럼 다양하게 얽혀있는 사람들의 관계를 통해 취향이라는 것이 보기 좋은 겉치레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2. <밀리언 달러 베이비> (Million Dollar Baby)
2004년 │ 클린트 이스트우드

“예전에는 유명한 복싱 코치였지만 지금은 낡은 체육관을 하는 늙은 남자가 있어요. 그런 그가 남들은 알아주지 않는 한 여자의 재능을 알아보고 선수로 키우는데, 그걸 단순히 한 인간의 인생 성공담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풀잖아요. 특히나 둘이 가족이 아닌데도 실제 가족 이상의 관계를 맺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어요. 진실한 유대는 꼭 혈연이 아니어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줘서 좋았어요.”

제7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을 독식하며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그야말로 그 해의 백만 불짜리 영화였다. 영화사상 가장 처절한 여자의 일생 상위권에 랭크될 만한 매기(힐러리 스웽크)는 마지막까지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없지만 강한 의지와 순수한 열정 덕분에 두려울 것이 없다. 아버지처럼 곁을 지키는 코치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함께라면 더더욱. 그러나 링 위에서 세상을 향해 잽을 날리던 매기의 미소는 예기치 못한 순간 비극으로 뒤바뀐다.

3. <순수의 시대> (The Age Of Innocence)
1993년 │ 마틴 스콜세지

“미셸 파이퍼란 배우는 참 특별한 것 같아요. 느낌이나 이미지가 강인하고 섹시한데, 연기에도 진실성이 있어요. 그러면서도 어떤 순간에도 여성성을 잃지 않고, 귀엽기도 하고. 물론 지금도 여전히 신비롭구요. 다양한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배우인 것 같아요. 예뻐서 예쁜 게 아니라 그녀만의 묘한 아름다움이 있죠. <순수의 시대>에서는 그녀의 그런 이미지가 극대화된 것 같아요. 더욱이 엘렌을 사랑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뉴랜드의 모습이 답답하면서도 안타까웠어요.”

세상에서 가장 진부하기 쉬운 관계는 삼각형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뉴랜드와 메이, 엘렌을 통해 본 위선과 사랑, 현실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진부하지 않다. 완벽한 커플을 갈라놓기에 충분한 매력을 뿜어내는 미셸 파이퍼와 무미건조한 위노나 라이더, 갈팡질팡하다 결국 일생의 여인과 인생을 흘려보낸 다니엘 데이 루이스까지. 배우들은 그대로 세 사람의 인생을 살았다. 여기에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우아하지만 위선적인 뉴욕의 상류사회를 정교하게 복원해냈다.

4. <나의 왼발> (My Left Foot: The Story Of Christy Brown)
1989년 │ 짐 쉐리단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실제로 진정한 관계를 맺는 경우는 극히 드물잖아요. 영화 속 주인공이 인생에서 중요한 관계를 맺은 사람이 딱 세 명이에요. 엄마, 첫사랑, 마지막 사랑. 굉장히 심플하죠? (웃음) 어떻게 보면 불행하고 외로울 수 있는 사람인데, 다 보고 나면 그래도 이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했으니까요. 그리고 다니엘 데이 루이스라는 배우를 참 좋아하는데, 여기서도 역시 엄청난 연기를 보여줬죠.”

실제 뇌성마비를 앓았던 아티스트 크리스티 브라운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아일랜드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크리스티는 짐짝 같은 존재였지만 강인한 어머니와 의사의 도움으로 새로운 삶을 얻게 된다. 자신의 감정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 크리스티는 모든 편견을 향해 비로소 첫 걸음을 내딛는다. 제8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데어 윌 비 블러드>로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먼저 이 영화로 제62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5. <눈먼 자들의 도시> (Blindness)
2008년 │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어렸을 때는 잘 몰랐는데 성인이 되니까 가족 외의 인간관계도 가족 못지않게 깊어지는 것 같아요. 인간들은 누구나 정을 나누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존재잖아요. 그래서 서로 헌신하고 사랑하는 게 혈연이 아니라고 해도 얼마든지 진실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를 찾게 되요. <눈먼 자들의 도시>도 줄리언 무어가 이끄는 사람들은 남편을 제외하고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인데 엄마처럼 보살피잖아요. 그 모습이 저한테는 크게 다가왔어요.”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눈이 멀게 되었다. 정부는 눈먼 자들을 격리시키고, 그들이 갇힌 병동은 점점 지옥으로 변해간다. 생존본능과 약육강식만이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그곳에서 눈이 보이는 한 여자(줄리언 무어)가 주변을 돌본다. 인간의 추악함과 숭고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영화는 마음 편히 보기가 쉽지 않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주제 사라마구의 동명 소설을 충실하게 영상으로 옮겼다.

“김혜자 선생님 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김혜자 선생님 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선생님의 연극을 보면 정말 엄청나거든요. 다양한 이미지와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는 출중한 배우세요. 특히 무대에서 보이는 에너지는 광기라고 할 만큼 대단해요. 어머니 역할만 하시는 게 제가 다 안타까울 정도죠.” 최근작 <마더> 뿐 아니라 오랜 시간 브라운관에서 “접신의 경지에 이른”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배우 김혜자는 60대, 추상미는 이제 겨우 30대다. 여배우로 살아가는 어려움을 토로하다가도 아무도 예상치 못한 ‘웃기는’ 모습을 꺼내놓은 그녀의 30대는 접신으로 가는 튼튼한 사다리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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