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네들이 주로 웃긴다’는 배역설명에도 불구하고 유난히도 진지한 남자가 있다. 고요하게 앉아있는 시워드 박사의 식구들과는 달리, ‘레자’ 롱코트에 마늘로 만든 거대한 목걸이를 두르고 이리저리 뛰느라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어디선가 갑자기 새총을 가지고 등장해 그동안 웃고 떠들고 즐기느라 정신없던 관객들을 긴장시키더니, 진지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순간 관객 모두를 무장해제시켜버린다. 그의 이름 ‘이새키야 반헬싱’. 뮤지컬 <드라큘라 : 더 뮤지컬?>(Dracula The Musical?)에서 유일하게 뱀파이어의 존재를 알고 그를 뒤쫓는 신념 강한 흡혈귀 퇴치사 닥터 반헬싱은 그동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달고나>, <오! 당신이 잠든 사이>(이하 <오! 당신>) 등의 창작뮤지컬에서 주로 얼굴을 알렸던 정의욱이다. “순박하고 모자란 사람들이 나오는” 작품을 좋아하는 그가 <드라큘라 : 더 뮤지컬?>을 선택한 이유도, “제대로 해내는 게 아무것도 없는 이들이 드라큘라를 퇴치”하는 일련의 과정들 때문이다.

집에서 나와 몇 걸음만 걸으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정의욱의 친근한 외모는 화려한 빌딩숲 사이보다는 허름하지만 백열전구 가로등이 따뜻하게 비추는 골목을 닮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인상은 일상을, 그리고 잊혀진 추억과 아픔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많은 한국의 창작뮤지컬에서 빛을 발했다. “훌륭하고 멋진 직업을 가진, 모두가 선망하는 인물의 세련된 삶을 보여주는 것 보다는 거칠고 모자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좋고, 저한테도 잘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일까. 정의욱은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 알콜중독에 빠진 아가씨, 하반신마비가 된 남자 등이 모여 각자의 슬픔을 서로 감싸 안는 <오! 당신>의 야이기를 들려주었다. “평균적으로 다른 이들의 이목에서 봤을 때는 너무 힘들어보일지 몰라도, 본인 스스로는 나름의 행복이나 보람들을 갖고 살잖아요. 그런 부분들이 잘 그려진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가톨릭 재단의 무료병원에 새로운 병원장인 젊은 베드로 신부가 부임한다. 그는 하반신마비 환자인 최병호의 사연을 방송해 그 기부금으로 열악하고 낙후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애를 쓰지만, 생방송 하루 전 최병호가 사라진다. <오! 당신>은 <김종욱 찾기> <형제는 용감했다>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장유정 작가의 작품으로,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는 6.25 전쟁 당시 포로로 잡혀 들어간 남편의 폭력을, 알콜중독에 걸린 아가씨는 믿었던 사랑의 배신을, 하반신마비가 된 남자는 자신이 짐이 될까 혼자 남겨진 딸에게 편지조차 부치지 못하는 기막힌 사연을 들려준다. “이번 시즌에는 없지만 제가 했던 2007년에는 베드로 신부가 탭댄스를 추는 장면이 있었어요. 한창 하고 있었던 <달고나>와 일정이 겹치면서 연습할 시간이 정말 없었거든요. 그래서 탭댄스를 춘건지 발을 비벼댄건지 도무지 근원을 알 수 없는 탭댄스를 췄던 기억이 나네요.”

정의욱은 <드라큘라 : 더 뮤지컬?>을 마치고 7월부터 다시 창작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의 동욱 역으로 새로운 무대에 오른다. <사랑은 비를 타고>는 14년 동안 이 작품을 거쳐 가지 않은 뮤지컬배우들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이들이 함께했고, 2008년부터는 일본에서도 공연되고 있는 작품이다. <오! 당신> 속 탭댄스의 어려움을 토로하던 그에게 이번에 주어진 도전과제는 바로 다름 아닌 피아노. 극중 피아노는 오랫동안 떨어 지냈던 형 동욱과 동생 동현이 그동안의 앙금을 털어내는 중요한 매개체이지만, “왜 그동안 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을까”라고 그를 자책하게 만드는 악기이기도 하다.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아요. 탭댄스는 음악이랑 같이 나오니까 모양만 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지만, 피아노는 소리가 다 나고 여기선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잖아요. 엊그제는 새벽 2시에 피아노 연습했다가 옆집 아저씨한테 혼났어요. 이걸 해내고 나면 삶의 성취감과 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막 붙을 것 같아요. 으하하” 무대에서 내내 흘리는 땀만큼이나 얼굴 근육을 전부다 써버리며 ‘으하하’라고 웃는 호탕한 웃음에 함께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이다. 이런 형이라면, 이런 오빠라면 그냥 의지하고 싶어지진 않을까?

‘베드로의 고백’
베드로 신부의 집무실, 사라진 최병호의 소식을 방송국에 들키지 않기 위한 그의 노력이 기나긴 전화통화에서 표현된다. “다양한 장르가 혼합되어 있고 베드로의 원맨쇼와 같은 곡이라서 관객들은 굉장히 재밌어하시지만, 배우한테는 부담스러운 면이 있는 곡이에요. 평소에도 땀이 많은데 관객반응이 없으면 땀을 두 배로 흘려서 안쓰러운 마음에 박수를 치도록 만들었었어요. (웃음)” 그리고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 정의욱이 기억하는 에피소드 하나. “마지막 음이 제 키에는 좀 낮아서 그걸 좀 올려서 불렀거든요. 초반엔 괜찮았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도 풀리고 잦은 음주 덕에 (웃음) 격한 감정의 꺾임표인 ‘삑사리’를 자주 냈었죠. 엄청난 놀림들을 받았지만, 자존심 때문에 다시 음을 내릴 순 없었어요. 으하하”

사진제공_MUDIZ

글. 장경진 (thre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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