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독립영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동일한 고정관념 중 하나는 굉장히 ‘자의식 강한’ 영화라는 이미지다. 말하자면 독립영화는 감독의 천재적 재능이 만개한 걸작, 혹은 혼자만의 형식 실험에 도취되어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얼치기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올해 옴니버스 영화 <숏!숏!숏! 2009: 황금시대>로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은 윤성호 감독의 작품을 만난다면 이런 고정관념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글을 읽는 당신은 윤성호 감독을 아직 만나지 않았을 확률이 더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윤성호는 인디와 메인스트림의 경계에 가장 근접한 감독이다. 즉 독립영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겐 전혀 생소한 이름이지만, 그 경계에 한 걸음 걸치는 즉시 만날 수 있는 이름인 것이다. 2001년 <삼천포 가는 길>로 데뷔해 다양한 독립영화를 찍은 그지만 그런 경계에 서게 된 건 2007년 개봉한 <은하해방전선> 역할이 크다. 이젠 <과속스캔들>의 찌질한 민폐 캐릭터로 더 많이 알려진 임지규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에서 그는 “진보연하는 사람들의 대화 능력 부재를 이야기”하고 싶어 무의미한 말들로 영화를 가득 채운다. 가령 영화에서 독립영화감독으로 등장하는 영재(임지규)는 관객과의 대화를 앞둔 배우 혁권이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자 “그냥 소통 얘기만 하세요”라고 귀띔한다. 남과 ‘무언가’에 대해 소통해야 하는데 소통 그 자체를 주제로 삼는 본말이 전도된 상황. 그래서 독립영화감독 영재나 민중을 위한 영화를 이야기하는 병장, 권위 의식에 사로잡힌 영화평론가 등 영화 속 수다쟁이들의 말은 번드르르하지만 그 안에 알맹이가 없다. 이런 모습을 어깨 힘 뺀 가벼운 태도로 코믹하게 비판하는 것이 <은하해방전선>의 힘이다.

이렇게 소통이란 말에 갇히기보단 소통 그 자체의 과정을 중시 여기는 그가 영화를 혼자만의 작업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래서 그가 추천하는 영화들은 감독들의 팀플레이가 살아있는 옴니버스 영화들이다. 그가 추천하는 영화들을 통해 우리 역시 “단편의 서사가 하나하나 배치되면서 장편과 같은 기승전결이 만들어지는 신기한 순간”을 경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그들 각자의 영화관>(To Each His Own Cinema)
2008년 │ 테오 앙겔로플로스 외 34명

“칸 영화제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스타 감독들의 콩트 모음집인데 사실 처음에는 거장들의 명성에 지레 황홀해지지 말자고 다짐했다가 결국 반해버리고만 최고의 옴니버스 영화죠. 아마 콘셉트가 확실하고 물리적인 제한이 확실했기 때문에 산만하게 퍼지지 않고 찰진 완성도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영사실이 불타는 등 귀여운 소동이 벌어지는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에피소드와 옆자리에서 떠드는 평론가에게 테러를 저지르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에피소드 등을 자주 언급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만든 세 컷짜리 에피소드와 무성영화에 가까운 아키 카우리스마키와 엘리야 슐레이만의 에피소드를 좋아해요. 제 영화엔 대사도 많고, 제스처도 많지만 오히려 그 반대급부로 정자세로 영화를 볼 땐 정중동의 화면을 좋아하거든요.”

10분도 길다고 생각한 듯 5분 정도의 정말 짧은 에피소드들이 모인 영화관에 대한 거장들의 옴니버스 영화다. 칸 영화제 6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답게 모든 감독들은 역대 황금종려상 수상자들로 한정되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 코엔 형제, 로만 폴란스키 등등 그 이름에 기가 죽어 제대로 영화를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들 거장도 영화와 영화관을 좋아하는 영화 키드였다는 걸 떠올리면 충분히 상식선상에서 영화를 이해하고 즐길 수 있다. 영화와 극장이란 공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2. <원피스 프로젝트>(One Piece!)
1999년 │ 야구치 시노부 외 1명

“일본에서 가장 유희정신에 투철하다고 할 수 있는 감독 야구치 시노부가 동료인 스즈키 다구치와 함께 만든 원 신, 원 숏 에피소드 모음집이에요. 만화로 치면 4컷 만화 모음집인 거죠. 스스로 필름이 아닌 비디오로 그것도 일체의 카메라 무빙이나 편집, 후반의 사운드 작업을 하지 않는다는 제한을 두고 연출한 작품인데, 옴니버스들은 종종 이런 제약이 있을 때 더 신선한 시도들이 나와요. 영화의 장면들에 너무나 많은 효과가 개입하는 요즘, 그런 일체의 액세서리를 제거하고 배우의 연기와 대사의 호흡, 그리고 화면 안에서의 원근감을 이용한 움직임, 프레임 안의 엄폐물 등등을 최대한 이용하며 맨 얼굴로 승부하는 프로젝트인 셈인데 그 와중에 이런 승부에는 유머가 필수라는 것을 아는, 심지어 영리하기까지 한 프로젝트죠.”

몇 년 동안 주위 공원이나 아파트에서 실험적 작품들을 정기적으로 만들어왔던 두 감독이 그 중 비디오로 작업한 14개의 작품을 모은 옴니버스 영화다. 사실 영화에 있어 형식실험은 비웃음이 되어선 안 되지만 너무 형식에 천착할 경우 다른 걸 놓칠 수 있다. 이 영화의 진정한 장점은 화려한 기교를 배제하면서 그 밋밋함을 상상력으로 채운다는 점이다. 교통사고를 당하지만 몸의 고통보단 가방 안의 포르노 잡지를 들키지 않으려 하는 남학생의 이야기를 그린 ‘에로스 온 더 런’ 등에서 이런 발칙한 상상력을 듬뿍 느낄 수 있다.

3. <유토피아>(Utopia-Nobody is perfect in the perfect country)
2002년 │ 마틴 아스파우그 외 8명

“2002년 노르웨이 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의 현황을 살펴보기 위해 기획된 영화인데요, 노르웨이 내 8개 정당을 은유하는 8개의 에피소드가 이 모두를 관통하는 일종의 브리지 격인 ‘프레임 스토리’와 엮여 하나의 장편처럼 부드럽게 이어지죠. 특히 노르웨이 노동당에 관한 우화 ‘대동단결’은 끌레르몽페랑 등 유수의 단편영화제에 독립적으로 출품, 초청되어 수상하는 등 인기를 끌었는데 단편들이 모여 옴니버스 장편으로 공개된 후, 시간차를 두고 각각 별개의 작품으로 돌아다니는 방식도 괜찮겠다는 힌트를 얻었어요. 또 상업영화 감독들과 프로필에 아직 단편밖에 없는 연출자들이 프로젝트에 함께 섞여있다는 점도 흥미로워요. 최근 <세 번째 시선>, <시선 1318> 등 우리나라 옴니버스 영화도 충무로와 독립영화를 아우르며 다종 다기하게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이 작품이 그 선례가 아닐까 싶어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영리한 프로젝트다.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각 정당의 현황을 영화로서 설명한다면 과연 누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특히 끌레르몽페랑 국제단편영화제 대상,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푸르지오상을 수상했던 ‘대동단결’의 경우 2002년 최고의 단편으로 꼽히기도 한다. 단순히 좌파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그 안에 잠재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조금은 우직하게 드러낸다는 점이 더욱 가슴을 자극한다.

4. <뉴욕 스토리>(New York Stories)
1989년 │ 마틴 스콜세지 외 2명

“마틴 스콜세지에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에 우디 앨런이 합심한 프로젝트예요. 말이 더 필요할까요? 특히 앞의 두 감독님의 영화야 예전에도 국내에 꽤 소개되어 왔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디 앨런의 영화들은 극장 개봉은커녕 비디오로도 몇 편 소개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던지라 이 옴니버스를 비디오로 보며 이 작가에 대한 호기심을 달랬던 것 같아요.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터무니없는 판타지에 기대어 자기 포지션의 고민을 늘어놓는 모습에 많은 영감을 받은 듯하고요. 사실 그에 반해 스콜세지와 코폴라가 연출한 에피소드들은 조금 밋밋하게 봤었는데, 조금 나이를 먹은 지금 또 생각해보면 세계적인 중견 미술가가 상대적으로 약자였던 젊은 동거녀에게 뒤늦게 집착하는 스콜세지의 작품이 드러내는 사람 사이의 어떤 비의가 맘에 박혀오기도 하고, 뭐 그러네요.”

<섹스&시티>의 맨해튼과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등 뉴욕은 다양한 픽션의 배경으로 더할 나위 없는 장소다. 그래서 마틴 스콜세지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감독 3명이 어떤 주제가 아닌 이 도시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만든 건 우연이 아니다. 예술에 대한 정열과 여제자에 대한 육체적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예술가의 이야기(마틴 스콜세지)나 뉴욕의 최고급 호텔에서 혼자 쓸쓸히 사는 12살 소녀에 대한 이야기(프란시스 코폴라), 죽어서도 쫓아오는 어머니의 영혼 때문에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는 남자의 이야기(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하나로 묶일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뉴욕이 다양한 삶을 담을 수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5. <숏!숏!숏! 2009: 황금시대>(Shot! Shot! Shot! 2009)
2009년 │ 윤성호 외 9명

“제가 참여한 작품이지만 민망함을 무릅쓰고 추천할게요. 솔직히 준비하는 시간도 짧고 견적도 워낙 작았고 참여하는 감독님들의 스펙트럼도 좀 좁지 않나 생각해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프로젝트였는데 모두 개성 있고 세련된 작품들을 뽑아냈어요. 그 중 최익환 감독님의 에피소드는 바로 앞에서 얘기한 <원피스 프로젝트>에 가까운 콩트인데 아주 그냥 뒤집어져요. 이송희일 감독의 ‘불안’은 짧은 러닝타임으로도 시대의 공기와 사람의 정서를 이렇게까지 전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탁월한 소품이고요. 뭐, 제가 연출한 에피소드도 지루하진 않아요. 하하하.”

2007년, 전주국제영화제가 김종관, 손원평, 함경록 세 명의 감독을 선정해 제작한 디지털 단편영화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2008년에 이어 올해에 이르렀다. 앞선 두 개 작품의 경우 세 명의 감독이 형식과 소재에 얽매이지 않은 반면 이번 프로젝트의 경우 10명의 감독이 돈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참여해 좀 더 옴니버스 영화다운 밀도를 만들어냈다. 이 중 윤성호 감독의 ‘신자유청년’은 52주 연속으로 로또에 당첨된 주인공의 이야기를 페이크 다큐 형식으로 풀어내며 인생 한 방의 욕망이 얼마나 강렬하면서도 허망한 것인지 이야기 한다.

“옴니버스 영화는 이어달리기에 가깝다”

“저도 <은하해방전선>으로 좀 유명해지면서 투자를 좀 받을 줄 알았는데 바로 불황이 오더라고요. 대신 아르바이트가 많아져서 생계엔 도움이 됐어요.” 독립영화계의 주목할 만한 신예로 떠올랐지만 제대로 장편을 찍을 기회 없이 강연, 칼럼, 옴니버스 영화 참여 등 다양한 작업을 했던 지난 1년은 그에게 “영화에 집중하기 어려웠지만 나중엔 결국 영화에 도움이 될 경험을 쌓는” 기간이었다.

<시선 1318>을 비롯해 이번에 개봉한 <숏!숏!숏! 2009: 황금시대>까지 다양한 옴니버스에 참여했던 그는 이제 좀 더 몰입도가 강한 장편을 기획 중이다. 어찌 보면 혼자만의 작업을 추구하는 듯 보이지만 “보통 여러 감독이 연출을 맡은 옴니버스 영화에 대해 사람들은 1000m 달리기와 같은 일종의 경주로 보지만 사실은 이어 달리기에 가깝다”고 말하며 옴니버스 영화에 참여했던 시간에 대해 “이어 달리기에 있어 혼자 잘 뛰는 것보다 바통 터치를 잘하는 게 중요한 걸 깨닫는” 경험이라 하는 이 명민한 젊은 감독이 혼자만의 천재성에 만족하는 함정에 빠질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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