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자 라거나, ‘봉테일’이라는 별명으로 오해되고 있지만, 봉준호 감독은 사실 느슨해서 재미있고, 굵직하게 호탕한 사람이다. 칸에서 조우한 송강호가 엄지를 치켜들고 호들갑스럽게 <마더>에 대한 반응을 표했다는 이야기를 전할 때, 시사회장에 모신 변희봉이 “봉 감독, 뭐-얼 걱정을 해!”라며 특유의 호탕한 목소리로 어깨를 치던 순간을 흉내 낼 때, 김혜자의 소녀 같은 조근조근한 대화법을 따라 할 때, 마치 그는 배우들의 영혼에 빙의된 소년 마냥 실감나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또한 지난 주말, 개봉 열흘 만에 200만 관객을 만난 <마더>에 대해서 말할 때도 “개봉했으니까 이제는 스포일러 신경 안쓰고 말 해도 되지 않냐”며 동석한 홍보담당자의 간을 졸이며 솔직하고 시원시원한 답변을 내어놓고야 말았다. 하여 <10 아시아>가 개봉 2주차를 넘긴 시점에서 전하는 <마더> 봉준호 감독과의 긴 인터뷰는 오롯이 영화를 이미 본 자들을 위한 애프터서비스다. 즉 도저히 안 밟고는 건너 갈수 없는 스포일러 폭탄이 사방 도처에 깔려있으니 알아서 비켜가거나 용감하게 돌진하라는 경고다.

벌써 200만 넘는 사람들이 <마더>를 봤다. 자신이 만든 영화라고 해도 개봉 전과 개봉 후의 느낌이 다를 텐데.
봉준호:
매체 리뷰나 네티즌 글들을 챙겨보는 편이다. 최근에 ‘이 모든 게 도준(원빈)의 복수극이다’ ‘동반자살을 동반살인으로 되 갚은 거 아니냐’ 라는 식의 글이 높은 조회수를 기록한 걸 봤다. 사실 2008년 1월에 시나리오 쓰면서 그런 이야기를 노트에 메모해 놓은 적이 있다. 물론 그 콘셉트를 위해 시나리오를 재배열 하지는 않았지만 어둡게만 보면 그런 해석도 가능하겠다 싶더라. 그런데 그 분 글을 읽어보니 도준이 정말 어마어마한 플랜을 짠 것처럼 써놨더라. (웃음)

<유주얼 서스펙트>의 ‘카이저 소제’처럼 완전범죄를 꿈꾸는 도준?
봉준호:
하하. 다섯 살 이후 20여 년 동안 바보 연기를 해온 거지. 전혀 그런 설정은 아닌데 어쨌든 읽는 입장에서는 엄마가 아들을 통제하려고 하다 실패하고 결국 아들이 엄마를 통제한 이야기다, 라는 틀로도 볼 수 있겠다 싶더라. 나 역시 시나리오 쓰면서 예상해본 건데 그런 반응이 나오니 흥미로웠다. 그나저나 이제 개봉했으니까 이런 말 다 해도 되겠지? 미리 알려 드릴게요. 김혜자가 귀신이에요, 이렇게? 하하.

마지막 고속버스에서의 춤은 맥락이 있는 반면, 영화의 첫 장면, 홀로 추는 춤은 맥락이 없이 등장한다.
봉준호:
그렇게 시작해놓고 나면 이후가 편해질 것 같더라. 백주대낮에 혼자서 춤도 췄는데 뭔들 못하겠나. (웃음) 엄마가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하는 첫 순간이 가장 짜릿한 것 같다. 선전포고 같은 거다. 이 영화 좀 이상하다. 이 여자 미쳤다. 내지는 미칠 것이다. 카메라가 다가가는 게 아니라 카메라를 향해 김혜자가 다가온다. 이건 김혜자 영화다, 이렇게.

“‘봉테일’이란 별명이 지겹고 싫다”

춤이 뭐랄까, 참 괴상망측하다. (웃음)
봉준호:
뜨악해서 웃는 관객도 있더라. 고속버스 춤을 야외에서 춘다고 생각하시라고 주문했다. 직접보신 적이 없다고 해서 관광버스에 같이 타서 아주머니들 춤추는 걸 보여드린 적도 있다. 작가랑 나랑 제작부들도 같이 타서 춤을 추다 보니 아주머니들 손이 젊은 남자 제작부들 티셔츠 안으로 쑥쑥 들어오더라. (웃음) 촬영 때도 혼자 추면 쑥스럽다고 하셔서 카메라 주변 스태프들이 들판에서 다 같이 춤을 췄다. 춤을 추다가 눈을 가리는 동작은 연습하다 우연히 발견한 건데 그건 꼭 넣자고 했다. 빠르게도 추고 느리게도 추고, 결국 편집된 게 4번째 테이크인데 <화양연화>에 나왔던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를 틀고, 선생님, 돌아, 돌아! 뒤로 도시고, 손 올리고! 발 올리고, 겨드랑이 털 뽑기! 그러면 그대로 다 따라 하셨다. (웃음)

엄마가 가슴팍으로 손을 집어 넣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봉준호:
엄마의 손이 작두에 잘릴 것 같은 신들이 있고, 크라이막스에서도 자기 손을 보는 장면이 있다. 손은 죄와 연결이 되고 손을 감춘다는 건 죄를 감춘다는 거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없었던 설정인데 시간이 좀 남아서 이런 저런 컷들을 찍는 도중에, 선생님 손 한번 넣어보세요, 하니까 쓰윽, 묘한 표정으로 집어 넣더라. 그 느낌이 좋아서 타이틀 샷으로 선택하게 된 거다.

김혜자라는 배우를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이 있나?
봉준호: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연기를 한 분이니 TV를 틀면 항상 나왔던 기억이 있다. 특별히 존재감이 느껴진 건 70년대 후반 봤던 일일 연속극 <당신>에서였다. 전형적인 현모양처 역이었는데 최불암 선생님이 남편으로 나왔고 극중 이름이 무려 ‘봉 과장’이었다. 김혜자 선생님은 ‘봉 씨 부인’ (웃음).

김혜자는 그렇게 늘 우리가 눈 뜨자마자 만난 배우였고, 오랫동안 국민 어머니였다. 많은 이들에게 각인된 완고한 이미지를 깬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봉준호:
싫어하시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지만 왠지 좋아하실 거야, 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평생 ‘국민 엄마’라니 아마 지겹지 않았을까? 라고. 사실 문근영 씨도 ’국민 여동생’이라는 타이틀이 얼마나 싫을까, 나도 ‘봉테일’이란 별명이 지겹고 싫다. 사실 부정확하기도 하고. 하물며 나나 문근영 씨도 그럴진 데 김혜자 선생님은 어떨까 싶었다.

“텍스트 외적인 김혜자 선생님의 힘이 작용한 부분이 많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김혜자를 염두에 두고 쓰여 졌나?
봉준호:
물론이다. 순서로 보자면 김혜자 선생님과 꼭 작업을 같이 해보고 싶었고, 찍는다면 미친 여자나 어두운 영화였으면 했다. 어떤 시나리오가 좋을까 하다가 떠오른 이야기가 ‘브레이크가 파열된 엄마’였다. 대한민국에서 ‘김혜자=엄마’인데 곧 ‘김혜자에 대한 파격적인 접근=엄마, 혹은 모성에 대한 파격적인 접근’으로 이어졌다. 2004년 처음 만났을 때는 그냥 선생님과 좀 강한 영화를 하고 싶다, 라는 말만 드렸다. 그러다 2005년에 시나리오를 드렸는데 되게 좋아하셨다. 아, 다행이다, 했다. 그리고 A4지로 74쪽 나온 시나리오를 2008년 3월에 드릴 수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이 시나리오를 보고 마음에 안 드시면 나는 이 영화 접을 꺼다. <마더>는 김혜자를 보고 기획한 거고 김혜자가 없으면 성립할 수 없는 영화다, 라고 말씀 드렸다.

<마더> 촬영 바로 전에 끝난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서 현모양처의 상징이었던 김혜자가 휴가를 선언하고 집을 잠깐 나간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파격적이라고 말했다.
봉준호:
몽키 스패너로 노인 머리를 박살을 내는 파격도 있는데 그거에 비하겠나. (웃음) 젊지만 고집 있고 앞뒤좌우 막혀있는 배우가 많은데 김혜자 선생님은 모던하고 열려있는 배우다. 오히려 엉뚱하고 과감한 시도나 주문을 좋아하셨다. 센 농약을 탔으면 죽었을 텐데 약한 농약을 타서 안 죽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도, 그 집 자장면이 맛이 없어서 짬뽕을 먹었어, 처럼 아무렇지 않게 해보자 했더니 그렇게 연기해 주셨다. 오히려 모니터 보시고 좋아하시더라. 고물상 셋트에서도 보통 영화의 클라이막스와 다르게 가고 싶다고, 눈곱 띄듯이 피를 닦으면서 욕을 해보자고 했는데 흔쾌히 하셨다. “내 아들 발톱의 때만도 못한 새끼가” 하는데 섬뜩하더라. 가끔은 내가 생각해내지 못한 걸 이 배우가 해내면 월척을 낚은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만큼.

그래서 월척을 많이 낚았나.
봉준호:
<괴물>에서 괴물을 존재를 믿게 만드는 건 CG의 퀄리티가 아니라 그 괴물을 만났을 때 송강호가 짓는 표정 덕이다. 시나리오 상의 약한 고리나 불가피하게 후져지는 부분이 생길 때 순간적인 본능으로 그 빈틈을 메워주는 것이 좋은 배우의 힘이다. <마더>의 ‘저주받은 관자놀이’ 같은 경우도 내용 자체가 좀 억지라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관객들이 그걸 받아들이는 건 배우의 설득력 있는 연기 덕이다. 또한 김혜자라는 배우가 가지고 있는 아이콘 적 위치 때문인지, 시나리오에 없는 ‘엄마의 마음’이 드리워지는 장면들이 있다. 본드 부는 고등학생을 취조하다 엄마가 들어가 라이터 불을 쫙 올리는 장면을 보고, 흔히 얼굴을 지지려고 하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 아이 이빨이 많이 상했나 살펴보는 거라고 받아들이는 관객도 있더라. 김혜자가 아니었으면 두 방향의 해석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종팔이랑 마주하는 것도 논리적으로만 보면 도준 엄마가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가증스러울 수 있는데 대부분은 그렇게 안 느꼈다, 그런 것도 텍스트 외적인 김혜자 선생님의 힘인 것 같다.

“엄마와 섹스라는 이미지의 충돌이 필요했다”

봉 감독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나?
봉준호:
외할아버지가 첫째 이모와 함께 6. 25 때 북으로 가셨다. 딸들에게 아빠는 강한 존재인데 사춘기 때 아빠를 떠나 보내고 남매들만 남한에서 살아서인지 우리 어머니는 원초적인 불안이나 걱정이 많으셨던 분이다. 그래서 늘 자식들이 순응자가 되었으면, 약삭빠르게 잘 적응했으면 하는 욕망이 강하셨다. 결국 발생하지 않은 일에 대해 지레 걱정하는 엄마 때문에 거짓말을 많이 했다. 사고를 친 건 아니고 안심시키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 <화니와 알렉산더>에서 말한 것처럼 거짓말은 창작의 기본이었던 셈이다. (웃음)

<마더>에서 엄마와 아들은 점점 색으로나 성격적으로 교차하고 결국 서로 닮아가는 느낌이다. 엄마의 폭주하는 행동도 일방적으로 아들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를 지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이 기묘한 모자관계에 대해 많은 이들이 여러 가지 해석을 내놓고 있는 것 같다.
봉준호:
어느 한 쪽으로 방향지시를 내리고 간 건 아니었다. 나 역시 끊임없이 그걸 궁금해 가면서 찍었다. 영화 속 ‘마더’는 김혜자 선생님, 우리 엄마, 애기 엄마의 모습이 믹스되어있다. 부, 모, 아들, 딸. 이 네 구성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경우의 수 중에 모자관계가 가장 센 조합 같다. 한 몸에서 잉태되어 분리되었지만 성적으로 다른 이성 관계, 집에 같이 살고 잠도 같이 자는 나이든 여자와 젊은 남자,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서로 범할 수는 없는 터부의 남녀. 영화에서는 엄마랑 자, 라는 대사도 있고, 심지어 잠만 자나 떡도 치나, 라는 노골적인 말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그 말을 했던 주둥아리는 바로 순식간에 응징을 당하지만. (웃음)

도준(원빈)의 뒷모습이 진태(진구)로 바뀌고, 귀가한 엄마를 진태가 강압적인 방식으로 몰아붙이는 장면부터 뭔가 불편함이 슬슬 수면위로 올라오긴 했다.
봉준호:
어떤 아주머니 관객들은 엄마랑 진태랑 한 두어 번 잔 거지? 라고 질문하기도 하더라. (웃음) 컴퓨터 앞에 앉은 도준이 진태로 바뀌는 장면은 레이어 하나 아래로 가면 잘 수 없는 젊은 남자에서 잘 수 있는 젊은 남자로 바뀐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진태랑 민아가 섹스 하는 장면을 보고 온 이후라서 그 느낌이 더 강할 거다. 그렇게 영화에서 점점 엄마를 여자로 인식하게 만든다. 처음엔 도준이 엄마와 한 침대에서 자다가 가슴을 만지고, 이후 엄마가 진태의 섹스를 훔쳐보고, 여고생과의 생리대 에피소드가 나오고, 결국 자신을 여자로 희롱하는 노인이 있는 고물상의 창고로 간다. 본 내러티브에서 빠져 나온 것 같지만 그것 역시 하나의 큰 흐름이다. 더 이상 생리를 하지 않는 여자, 엄마의 약재상은 건조하고 진태의 공간은 습하다. 그러다 엄마가 노인의 몸 위에 올라타서 마치 섹스 체위처럼 앉는다. 그리고 마침내 클라이막스에서, 얼굴에 피를 뒤집어쓴다. 꿀럭꿀럭해진 바닥을 닦는다. 피와 물기가 동시에 찾아오는 거다.

그건 어쩌면 우리가 김혜자란 사람에게 묻지 않아온, 아니 물을 수 없었던 지점이다.
봉준호:
모든 엄마에게 묻지 않았던 거겠지. 엄마와 섹스를 분리시키려고 했으니까. 그래서인지 진태와 민아의 섹스를 엄마가 커튼 뒤에서 지켜보는 장면을 찍을 때는 묘한 쾌감이 느껴지기도 하더라. 가슴이 나오지 않았으면 15세 관람가가 될 수도 있었는데 (웃음) 거기서는 어느 정도의 적나라함, 노골성이 필요했다. 결국 김혜자 선생님 본인이 섹스 신을 찍는 것도 아닌데 목격만으로도 불경스럽고 새롭게 느껴졌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엄마라는 존재를, 김혜자란 사람을 섹스와 격리시키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사실 아들은 결국 아빠랑 섹스를 통해서 나은 건데 말이지. 그게 상당한 아이러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일부러 불편 하라고 만든 건 아니고 이런 충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엄마의 모습과의 충돌.

“전국팔도 로케이션에는 비운의 알바생이 있었다”

<마더>는 수미상관으로 배치된 장면도 그렇지만 어디 하나 빠져나갈 구석이 없이 구성적으로 꽉 짜여진 느낌이다. 유머도 전작에 비해 일부러 배제된 느낌도 있고.
봉준호:
나사를 꽉 조이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조잡해지는 게 싫었다. ‘단순성’에 대한 고민이나 집착이 있었다. 김혜자란 한 사람에 포커싱된 영화고, 인물구조도 더 심플하다. 물론 구성적으로 완결되어 있다고 하지만 인물이나 과거사는 설명 안 하고 비워진 부분이 오히려 더 많다. 설명하지 않음으로 구성적으로 심플하지만 상상력을 자극하자는 게 콘셉트였다. 아예 확 끓어낸 부분이 많다.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같은 전작이 이야기나 상징이 주가 되었다면 <마더>는 이미지로 설명한다. 미니멀리즘이랄까. 명암의 콘트라스트, 클로즈업과 롱샷의 배치 등 텍스트로 설명이 안 되는 것을 극단적 이미지로 나누는 식으로.
봉준호:
결정적인 사건들이 집약적으로 이루어지는 그 폐가만 하더라도 외부나 내부나 구조적으로 더 복잡하게 갈수가 있는데 오히려 단순하게 만들었다. 살인이 일어나는 순간 그 안에 웅크리고 있었던 하나의 시선 때문에 모든 사건이 뒤집히게 되는데 그 순간의 화면을 최대한 단순화 시키고 싶었다. 거의 시커먼 어둠 속에 구멍이 뻥 뚫려져 있을 정도로. 결국 레이어드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후반으로 갈수록 선연한 이미지나 단순성에 더 의존하게 되었던 것 같다. 초반의 화장터의 아수라장이라던가, 현장검증 장면은 비교적 레이어가 많은 화면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고립되고 혼자 헤집고 다니는 후반부터는 점점 단순해지더라. 샷의 수를 줄이고, 적은 샷 속에서 하나 하나를 세게 가는 걸 지향했다.

레이어가 있었다고 말한 <마더>의 현장검증 신 역시 <살인의 추억>과는 확연히 다르다. 거의 원 신 원 컷으로 송강호를 따르던 카메라의 역동성에 비하면 <마더>에는 유난히 픽스 샷이 많고 큰 움직임이 없다. 홍경표 촬영감독의 기존 스타일을 생각한다면 조금 의외였다.
봉준호:
홍경표 하면 흔히 <태풍>이나 <태극기 휘날리며>를 많이 기억하지만, <하우등>처럼 정적이고 선연한 이미지에도 강한 사람이다. 특히 예민한 색채들에 있어서 <마더>와 잘 맞을 것 같았다. 김형구 촬영감독이 아버지 영화를 찍는 거장의 터치라면, 홍경표 감독은 섬세한 어머니 영화에 더 적합할 것 같은, 나 나름의 막연한 분류가 있었다.

의 동네는 거의 전국팔도를 재조합해서 하나의 새로운 마을로 만들었다고 들었다.
봉준호:
멀미도 많이 하고, 오래 차 타는 것도 싫어해서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다. (웃음) 하지만 찾고자 하는 이미지를 까다롭게 고르다 보니 전국을 다니며 찍게 되었다. <살인의 추억>은 80년대나 화성이라는 구체적인 시대와 공간이 중요했고, <괴물>은 한강이 필연적인 무대이자 캐릭터였다면, 이 영화에서는 공간이 지시하거나 드러내는 점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공간 자체가 캐릭터화 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오로지 인물만이 남기를 바랬다.

그런 로케이션이 더 어려울 것 같다.
봉준호:
4월부터 9월까지 반년을 헌팅에 쏟았다. 원빈이 방뇨하는 군산의 벽은 마침 이상적인 벽을 찾아서 기뻐했는데 촬영 2주 전에 “아시아의 허브 군산”이란 표어와 함께 샛노랗게 칠해져 있었다. 결국 그것과 똑 같은 벽을 찾기 위해 고용한 아르바이트 생은 일주일에 CD하나씩을 보내왔다. 그 ‘비운의 알바생’이 전국의 모든 벽 앞에서 도준이처럼 오줌을 누는 포즈로 뒷모습 셀카를 찍었더라. 나는 아직도 그 친구 얼굴을 모른다. (웃음) 결국 그 벽은 나무 셋트로 만들어서 일부만 찍었고, 와이드 샷은 CG로 만들어 넣었다.

“<설국열차>는 엄청나게 다이나믹하고 야만적인 영화”

칸 영화제에서 체감한 반응은 어떠했나.
봉준호:
전반적으로 좋은 평가를 해주어서 다행이었다. 타란티노가 영화를 봤다고 하던데 그 사람 반응이 궁금하기도 하다. 하지만 “몇 분의 기립박수” 이런 기사는 좀 민망하다. 잠수부 기록도 아니고 계량화 하는 건 좀 웃기는 것 같다. 영화제에서 반응이라는 건 좀 실체가 없다. 설마 영화제에서 돌을 던지겠나. (웃음) 프랑스 개봉이 오는 가을이니까 그 때쯤 외국의 진짜 반응을 알 수 있겠지.

봉준호라는 감독의 그간 행보를 봤을 때 장르적인 몰두보다는, 한국사회에서 더 많은 흥미와 모티브를 얻어내는 것 같다.
봉준호:
장르자체에 대한 쾌감을 강렬하게 느끼는 동시대 감독들에 비하면 나는 장르에 대한 흥미가 별로 없는 편이다. 오히려 미국이나 일본에서 만든 장르를 욕보이려는 불순함을 갖거나 장르의 법칙들을 깨는데 더 쾌감을 느끼는 것 같다. <마더> 역시 스릴러, 미스터리의 면모가 있지만 사실 나는 그냥 엄마를 찍고 싶었던 거다. 한국사회, 까지는 잘 모르겠고, 인간에 대한 영화를 찍고 싶은 건데, 그 인간이 늘 한국사회의 인간이었던 거다. <설국열차>에서는 그걸 처음 벗어나게 되겠지.

차기작 <설국열차>는 그간 그렸던 사회나 시대 혹은 공간적인 것들을 훌쩍 뛰어넘는다.
봉준호:
그 점이 지금 나를 가장 흥분시킨다. 지구전체가 얼어붙어있는 가운데 기차 하나가 달리고 있고 그 안의 사람들 사이에 어두운 갈등이 벌어진다.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오직 ‘인간의 조건’만이 남는 거다. 엄청나게 다이내믹한 영화가 될 것이다.

고립된 기차라니, 얼마 전 <10 아시아>에 추천한 영화들처럼 지하 공간 같다.
봉준호:
그렇다. 개인적으로 폐쇄공간을 좋아하고 각이 진 공간에 대한 콘티를 짤 때 성적인 흥분을 느낀다. (웃음) <설국열차>의 기차 같은 곳은 물을 만난 고기처럼 뛰놀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달부터 시나리오를 슬슬 쓰기 시작 할 텐데 1년 후엔 어떤 이야기가 되어 있을지 아직까지는 모르겠다. 물론 지난 몇 년간 누적시켜온 아이디어, 인물, 전체구조, 단편적인 장면 같은 건 이미 저 노트북에 다 있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지 않나. 구슬들은 이미 한 가마니 모여 있다. (웃음)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압도적으로 꿰어 낼 수 있을까 고민 중이다.

5년 전, 이미 노을이 지는 가운데 고속버스에서 춤추는 <마더>의 마지막 장면을 그려놓았던 것처럼 <설국열차>에도 이미 구상한 선연한 이미지가 있나. 있다면 <10 아시아> 독자들에게 살짝 말해 줄 수 있을까.
봉준호:
구체적으로 그리긴 힘들지만 기차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장면이 될 것이다. 기차는 산업화를 상징하는 무시무시한 쇳덩어리다. 그렇게 거칠고 난폭하게 돌진하는 물체가 반면 기차 안에서 창 밖을 바라볼 때는 로맨틱한 느낌이 있다. 그 상반된 느낌과 이미지가 순식간에 교차되거나 뒤섞이는 순간을 떠올리고 있다. 야만과 서정이 공존하는 그런 장면 말이다.

<괴물>이 남성적, <마더>가 여성적인 영화였다면 <설국열차>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봉준호:
남성, 여성을 떠나 아주 야만적인 영화가 될 것이다.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러시아로 후송되던 한 유태인의 수기를 읽은 적이 있다.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는 그 콩나물 시루 같은 기차 안에서 똥싸고 오줌 싸는 가운데 목격한 것들. 아트 슈피겔만의 <쥐>에서도 잠시 언급되지만, <설국열차>를 통해 인간이 과연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보고 싶다.

글. 백은하 (one@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