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로부터 좋아하는 드라마에 대해 듣는 것이 내 일이지만 누군가 나에게 ‘내 인생의 드라마’를 묻는다면 나는 망설일 것 없이 <웨스트 윙>을 택하겠다. 민주당 출신 미국 대통령 제드 바틀렛(마틴 쉰)과 백악관 참모들의 바쁜 일상과 미국 정치의 다양한 단면을 보여주는 이 드라마는 그저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한, 존경을 넘어 질투가 샘솟는 작품이다.

2006년 시즌 7로 완결된 <웨스트 윙>의 주옥같은 에피소드 가운데서도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시즌 2의 ‘스택하우스 필리버스터’ 편이다. 가족복지법안 통과만을 앞둔 상원회의장에서 78세의 노의원 스택하우스가 단상에 올라 요리책과 소설책을 읽기 시작한다. 필리버스터(의사진행방해)다.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이상 먹을 수도, 마실 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앉거나 기댈 수도 없다는 규정에도 그는 열 시간 가까이 선 채로 쉬지 않고 말을 한다. 마침내 스택하우스에게 자폐증에 걸린 손자가 있으며 그가 어린이 자폐증 치료에 관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한 필리버스터를 감행하고 있음을 알게 된 대통령과 참모들은 그가 발언권을 유지한 채 조금이라도 쉴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다. 그리고 이 날 아버지의 칠순 잔치에 늦은 언론담당 보좌관 CJ는 이런 이메일을 쓴다. “아버지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일이 일어나는 날이 많아요. 정치가 사람들의 나쁜 면을 초래한다면 사람들은 좋은 면을 이끌어낼 거예요.”

이렇듯 때로는 더럽고, 때로는 비굴하고, 때로는 거짓투성이인 정치 바닥을 다루면서도 <웨스트 윙>은 ‘선의’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지는 순간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감동과 희열을 담아낸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좋은 정치가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단순하지만 실현 가능성 낮은 희망이 어쩌면 언젠가 현실이 될지 모른다는 즐거운 꿈을 꾸게 만든다. 아마 청와대에서 <웨스트 윙>을 즐겨 보았다던 전직 대통령도 같은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좋은 사람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하지. 나는 그렇게 믿지 않네” 라는 대사를 보며 과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점이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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