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생각해 봐도 빅뱅의 탄생은 그야말로 ‘빅뱅’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이들의 화력은 가요계를 넘어서 패션 스타일의 주요 코드들을 섭렵했고, 출판계를 휩쓸더니 당연한 수순처럼 광고 시장마저도 정복했다. 스모키 화장보다도 선명한 검은 뿔테 안경을 쓴 탑이 카메라를 향해 눈을 치켜뜨며 휴대폰을 이리저리 들이대자 처음 ‘롤리팝’을 접한 사람들은 이것이 광고인지, 혹은 세련된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지드래곤의 핑크색 점프 수트를 비롯한 총천연색의 의상들도 물론 볼거리였지만, ‘롤리팝’의 가장 놀라운 점은 이 곡이 CM송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완성도 높을 뿐 아니라 트렌디한 노래였다는 점이다. 결국 ‘롤리팝’은 순식간에 온라인 음악 차트를 정복했고, 팬들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라이브를 공중파 방송에서 볼 수 없음을 아쉬워했다. 또한 빅뱅과 함께 등장해 “뢀리팝”이라는 신인류의 발음을 선보인 2NE1은 신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관심을 받으며 이후 이들의 데뷔에 초석을 다질 수 있었다.

거리에 포스터가 나붙기 시작하면서부터 소년들은 밤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청바지에 흰 티셔츠, 막대 사탕과 롤러스케이트로 단순하게 꾸민 소녀들의 모습에 사람들은 허를 찔린 듯 했고, 그것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스타일링임을 알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어 공개된 뮤직 비디오에서 소녀들은 몸의 어느 부분도 숨길 수 없는 선명한 차림새와 맨얼굴보다 자극적인 맨발을 보여주었고, 무대를 통해 드러난 군무의 에너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두 달이 넘도록 차트의 정상을 지킨 이들은 활동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가능한 모든 예능 프로그램을 소화했으며, 이를 통해 가능성을 검증받은 멤버들은 현재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개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의 드라마를 만들듯 정확한 기승전결에 의한 매니지먼트는 결국 올 상반기를 말 그대로 ‘소녀시대’로 만들었고, 소년들의 팬덤은 어느 때보다도 거대하게 성장했다. 이제 음악 방송을 보다가 “반짝반짝 눈이 부셔”라는 달콤한 가사를 따라 부르는 굵직한 목소리들을 듣는 일은 더 이상 낯선 경험만은 아니게 됐다. 물론, 완전히 적응했다는 말은 아니다.

“너, 헛소리 삐약삐약 하다가 맞고 멍멍한디. 오늘 요단강을 보트로 팡팡 건너야겠나”라고 협박을 하더니 “아이고 고마 입 새초롬 하이 돌린다이”하면서 눈을 흘긴다. 자리에 앉아 있던 아줌마, 아저씨 패널들은 눈물을 훔치며 박장대소 하고 흥이 난 김신영의 입에서는 “샤발샤발 사부작사부작”하는 의성어들이 쉼 없이 쏟아진다. <세바퀴>에 출연한 김신영은 이날 함께 출연한 빅뱅보다 더 큰 박수를 받았다. 아이돌의 출연에 반색하며 저돌적으로 애정공세를 펼치는 아줌마들이 진짜 좋아하는 것은 사실 김신영의 천연덕스러운 개그와 같은 구성지고 걸쭉한 입담이었던 것이다. 단지 패널의 연령이 높아진 것에 그치지 않고 <세바퀴>는 그 구성을 원동력 삼아 새로운 차원의 토크를 시도했다. 때로는 위험 수위의 성인용 농담이 오고 갔지만, 솔직한 한마디 말에 인생의 지혜가 묻어나는 것이 아줌마, 아저씨들의 내공이었다. 가식과 위선을 벗어 던진 이 토크 버라이어티는 결국 지난 4월,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독립 편성 되었다. 때마침 <일밤>이 급격한 쇠락을 맞이한 것이 꼭 우연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모름지기 연예인이라면, 특히 예능인이라면 사람들에게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자신의 외모를 특별하게 가꿀 필요가 있다. 개그맨 김경민은 해괴한 의상과 소품을 동원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헤어스타일만으로도 눈에 띌 수 있었다. 특히 올해 최고의 ‘예능 늦둥이’로 부상한 김태원은 참빗으로 빗어 내린 것 같은 긴 생머리를 언제나 질끈 묶은 모습으로 등장해 그의 본업은 록커임을 끊임없이 주지시켰다. 긴 머리카락과 마른 몸이야말로 기타리스트의 생명이라 여기는 그는 무대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위해 머리를 풀어 헤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분신처럼 여겼다. 뿐만 아니라 신인 그룹 2NE1의 산다라박은 하늘로 치솟게 묶어 올린 머리 모양으로 화제가 되었으며, 오래간만에 컴백한 유채영은 참한 새신부의 한계를 돌파하고자 과격하고 화려한 헤어스타일로 투지를 불태웠다. 에 등장한 유채영의 헤어디자이너 친구에 따르면 그녀는 미용 카탈로그가 아닌 ‘동물 달력’의 닭과 말 사진을 보고 머리 모양을 연구한다고 한다.

격정적인 음악이 끝나고, 스핀을 멈춘 소녀는 세월을 거스른 듯 깊고 섬뜩한 눈빛으로 프로그램을 마무리했다. 관중석에서는 환호가 터져 나왔고, 소녀의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그녀는 여자 싱글 사상 첫 200점 돌파라는 대 기록의 주인공이 되었다. 김연아는 그렇게 또 큰 한걸음을 내딛었다. 겨우 스무 살의 나이에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누구보다 철저한 자기 통제와 끊임없는 연습, 그리고 유난히 의연한 태도로 더욱 빛나는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녀에게 더욱 열광하는 순간은 그토록 담대한 그녀가 시상대 위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끝내 삼키지 못하거나, 에어컨 광고의 말미에서 제 풀에 그만 푹 웃음을 터트릴 때다. 빈틈없이 재단된 선수로서의 김연아는 존경스럽지만, 그 사이로 엿보이는 가공된 모습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사람 김연아는 너무나도 친근하다. 그리고 그 간극이야말로 우리가 그녀에게 감사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지점이다. ‘사람’으로서 도달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을 향해가고 있는 그녀는 가장 생생한 현재 진행형의 꿈이다.

신랑이 두 명이면 ‘실랑이’, 박스 옆에 사다리가 붙은 것은 ‘(일지)매’. 어설픈 넌센스 퀴즈 같지만 문제를 출제하는 니콜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하다. 상대방이 얼른 맞추지 못할까봐 빨리빨리 설명을 반복하는 목소리와 팔랑거리는 손짓은 애석하게도 문제 해석에 집중을 방해 할 지경이다. 신인들과 중견들의 시시한 집단 토크쇼에 불과했던 <스타 골든벨>은 니콜의 영입으로 긴장과 몰입의 순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 더 많은 이익을 본 것은 니콜과 그녀가 속한 그룹 카라일 것이다. 그동안 ‘생계형 아이돌’로서 산전수전을 겪어 온 이들은 올해 ‘프리티 걸’과 ‘허니’의 연속 히트로 데뷔 이래 가장 큰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니콜과 더불어 <스타 골든벨>에 종종 출연하면서 규리는 ‘미의 여신’이라는 캐릭터를 얻었고, 승연은 보기보다 야무진 성격을 드러낼 수 있었다. 고정 출연으로 ‘생계’에 보탬이 되는 동시에 멤버들의 캐릭터 설정에도 도움을 받았으니 <스타골든벨>은 카라에게 없는 것 빼고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화개장터나 다름없었다.

‘예능 유망주’라는 그럴듯한 소개로 시작했지만, 스캔들과 송사, 성형 등등 초반부터 공격은 제법 수위가 높았다. 초대 손님에게 단도를 직입하는 ‘라디오 스타’의 화법은 3주에 걸쳐 붐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때릴수록 단단해 지는 쇠처럼, 붐은 맹공을 맨 몸으로 받아내며 오히려 자신의 캐릭터를 더욱 선명하게 단련시켜 나갔다. 급기야 그는 영턱스 클럽의 ‘타인’을 개사한 어필송을 통해 자신의 구설수와 싸구려 이미지를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본인만의 매력을 강렬하게 소구하는 정반합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월화수목금토일, 녹화장 5분 거리 항상 붐이가 있어”라고 읊조리던 그는 결국 이날의 랩 플로우를 KBS <뮤직뱅크>에 출연한 나비의 곡에 피처링을 하면서 다시 한 번 선보이기에 이른다. 모두가 1등이 되려고 발버둥 치는 사회에서 확고한 삼류가 되고자하는 붐의 판단은 어쩌면 현명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큰 방송의 패널이자 작은 방송의 진행자로 종횡무진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그를 볼 때마다 “나인틴 나인티 나인!”을 떠올린다. 오래가는 사람이 강한 것이라는 말을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얗게 모든 것을 태운 순간의 전율이 중요하다. 사실 승패는 그 전력질주 후에 따라오는 부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WBC의 결승전은 뜨겁고 찬란했다. 파죽의 기세로 결승에 진출한 흥분과 숙적 일본과 대결한다는 긴장감은 선수들 뿐 아니라 경기를 관람하는 전 국민들을 한마음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결국 스코어는 2대3. 일본에 한 점을 밀리고 있던 한국 팀은 ‘9회 말 2아웃’의 상황을 맞이했다. 정근우의 삼진 이후 주자 두 명이 볼넷으로 출루한 상황에서 일본의 마무리 투수 다르빗슈와 마주 선 이범호는 묵직하게 팔을 휘둘렀다. 그의 방망이에 맞은 공은 천금 같은 안타가 되어 날아가고, 덕분에 점수는 3대3.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결국 연장전에서 다시 2점을 내주고 아까운 준우승에 그쳤지만, 짧은 순간 온 국민은 희망이라는 감격의 극단에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승부가 끝난 후에도 이범호는 역시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팬들의 ‘꽃범호’로 활약하고 있다. 생애 최고의 순간은 완성되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다음을 기약할 때 더욱 빛나는 것이다. 3회 WBC까지 ‘범호 꽃’이 시들지 않기를.

가장 안정적으로 예능 프로그램에 입성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유재석에게 그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다. 실제로 유재석은 자신의 방송에 출연한 게스트들의 예능감을 눈 여겨 봤다가 다른 프로그램에 패널로 추천하기도 하며, <패밀리가 떴다>의 초기 멤버 구성을 살펴 볼 때 이런 이야기는 확실히 신빙성을 얻는다. 그래서 <놀러와>에 출연한 길과 이하늘은 ‘유라인’에 속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뻔뻔한 캐릭터를 통해 <무한도전>입성에 성공한 길과 달리 이하늘은 욕심을 부려도 좀처럼 개그가 풀리지 않는 날이 많았고 그럴 때 마다 무대를 주름답던 거리의 악동은 자꾸만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욕심을 버리자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욕심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놓아 버린 듯 스판덱스 슈퍼맨 의상을 입고 출연해 길과 없는 머리채를 붙들고 뒹굴며 싸우는 요즘의 이하늘은 <놀러와>의 중요한 웃음 포인트다. 이제는 그 차림으로 김연아를 만났다며 우울해 하는 그의 소심한 모습조차 이빨 빠진 호랑이의 캐릭터로 보일 정도니, 이하늘이 차세대 예능 유망주가 될 가능성은 한층 커 보인다.

총상의 충격은 그렇게 쉽게 가시는 것이 아니었다.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의 충격은 해를 넘겨 계속 되었다. 그녀의 후속곡 ‘입술을 주고’는 선정성 논란에 휘말렸으며, 신인 가수 소리는 마치 이란성 쌍둥이 같은 노래 ‘입술이 정말’로 데뷔를 했다. 그런가하면 에이트의 ‘심장이 없어’는 제목을 가사에 반복하면서 절절한 이별의 심정을 표현했고, 태원은 ‘이불을 빨았어’라는 제목에 충실한 가사로 헤어짐의 아픔을 노래했다. 하지만 노래 제목을 보고 가장 아연실색 했던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이불의 ‘사고치고 싶어’, 그리고 마치 이 곡과 대구를 이루듯 연이어 발표된 다비치의 ‘사고 쳤어요’였다. 물론, 신인의 입장에서 보다 빨리 대중에게 기억되기 위해 자극적이고 강렬한 제목을 선택하는 것은 하나의 마케팅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철이 최근 발표한 10집의 타이틀 곡은 ‘손톱이 빠져서’다. 아니, 이분이 그동안 <아내의 유혹>을 열심히 시청하기라도 하신 것일까.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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