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신라의 땅, 경주에서 열렸던 MBC <선덕여왕> 제작발표회 취재를 끝내고 일행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지 않고 그곳에 남았다. 여름의 짙은 초록으로 변하기 전, 연두 빛으로 가득 찬 이 천년고도의 풍경은 숙연해질 만큼 아름답다. 특히 안압지에서 첨성대로 향하는 길은 고즈넉하면서도 운치가 있는데, 경주에 대해 쓰인 시들이 길을 따라 전시되고 있었다. 잠시 발을 멈추고 그 중 하나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늦점심 후 마루 끝, 구두 끈 매다 차양을 뛰어다니는 빗소릴 듣네/ 석류꽃 환한 그늘에 반쯤 가린 간판 ‘ㅡ’가 떨어져나간 ‘숙영식딩’에 어룽어룽 빗방울들, 매달리네/ 천마총 돌담 길 반백년도 넘게 지킨 밥집 우물가 숙영이라는 이름 다홍치마 할머닌 여즉 그 흰 손으로 푸성귀 씻고 있고/ 안방 벽에는 안강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문의 광대뼈가 나온 사내 무겁게 훈장 매단 채 이 쪽을 인자한 웃음으로 건너다보네… (후략) ” – 손진은 作 ‘숙영식당’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마총 돌담길을 걷다가 건너편에 실재하고 있는 이 식당의 간판을 발견했을 때의 짠함이라니. 깔끔하게 단장한 ‘숙영식당’의 새 간판에서는 이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지만, 산채에 3가지 양념을 더해 비빈 보리밥, 논 고동이 듬뿍 들어간 된장국, 갖가지 반찬이 그득한 소박한 밥상만큼은 그 옛날 다홍치마 할머니의 손길이 ‘여즉’ 느껴진다. 든든하게 늦은 점심을 먹고 신발을 신으려 마루 끝에 앉으니 시처럼 비가 온다. 주인 아저씨가 권하는 자판기 커피 한잔을 들고 건너편 왕릉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천 년의 세월이 모두 꿈같다. 김해 봉하마을에서 경주는 그리 멀지 않다.

글ㆍ사진. 백은하 (on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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