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람이 있다. 수첩의 질문지를 흘끔거리며 놓친 질문은 없는지 하나씩 체크하며 인터뷰하기보단 보이스 레코더를 끄고 그냥 오프더레코드로 편하게 대화하자고 말하고 싶은 사람, 아메리카노보단 소주 한 잔을 놓고 얘기하는 게 어울리는 사람. 배우 정재영이 그렇다. <김씨 표류기>라는 개봉 예정작의 홍보를 염두에 둔, 다분히 서로의 목적이 뚜렷한 인터뷰 중에도 그 명확한 경계선을 조금씩 지워나가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배우는 배우, 기자는 기자라고 구분 짓지 말고 그냥 한 잔 마시면서 마음 편하게 하세요. 그래야 재밌는 기사가 나온다니까”라는 걸쭉한 말투와 함께. 다음은 바람이 은근히 쌀쌀한 4월의 어느 저녁, 따뜻한 정종 한 잔씩을 놓고 진행한 그와의 대화 기록이다.

설정이 흥미롭다. 밤섬에 사람이 표류한다니.
정재영:
이해준 감독이 한강을 오다가다 밤섬을 보며 ‘저기 사람이 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어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나라면 밤섬을 수십 번 봐도 그런 생각이 안 들 텐데. 배우들은 사람들을 보며 그 사람의 마음 상태가 어떨까 그려보는 것처럼 작가는 어떤 얘기가 나올지 생각하는 것 같다. 촉수를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 다른 거지.

“이렇게 좋은 시나리오를 왜 자기한테 주지?”

이번 작품의 시나리오가 좋아서 선택했단 말을 많이 하던데 그 ‘좋다’는 기준은 무엇인가.
정재영:
사실 되게 애매한 건데 우선 내 취향을 근거로 설명하자면 스케일이나 이런 걸 떠나서 내용이 새롭고 신선해야 한다. 본 적이 없는 이야기. 그러면 당연히 거기서 독특한 걸 느낄 거고. 과거 선택했던 작품들도 그랬다. <바르게 살자> 같은 거 보면 한 번도 비슷한 게 나온 적 없는 스토리고, <웰컴 투 동막골> 같은 것도 되게 신선하지 않았나. 비록 <실미도>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픽션보다 더 거짓말 같은 실화였고.

일반 관객의 눈으로 평가하기 위해 아내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준다고 하던데 이번에도 그랬나.
정재영:
항상 무조건 보여준다. 이번에 평가가 좋다. 신선하고 지루하지 않고 사람 냄새 난다고. 심지어 ‘이렇게 좋은 시나리오를 왜 자기한테 주지?’라고도 했다.

그럼 출연 결정은 쉬웠나? 비록 재밌는 시나리오지만 실제로 표류 연기를 하는 것에 대한 육체적 부담도 있었을 거 같은데.
정재영:
톰 행크스 같은 할리우드 배우가 <캐스트 어웨이> 찍다가 야자수 먹고 배탈 나는 건 큰일일 수 있지만 우리나라 배우들에게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다. 사실 육체적으로 따지면 <신기전> 때가 더 힘들었다. 무려 8개월을 찍었으니까. 그리고 특히 액션이 너무 많았다. 영화에선 그냥 휙휙 지나가 버리는 장면들이지만 난 정말 힘을 쏟아 부었으니까. 오히려 이번 영화는 정신적으로 힘든 게 더 컸다.

정신적으로 힘든 면이라면?
정재영:
상대 배우 없이 나 혼자 무인도의 사물을 이용해 이야기를 끌어가야 하는 게 쉽지 않았다. 내가 어느 정도 할당하고 넘어가서 다른 사람 나오고 또 내가 나오는 식으로 진행되면 리듬이 맞춰지는데 20분 동안 계속 내가 나오면 지루하지 않게 리듬감을 만들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촬영분량 중 어디 한 군데만 삐그덕거려도 다른 장면으로 메울 수가 없다. 심지어 메워도 나다. 그러니까 디테일에 훨씬 신경 써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로서 일종의 도전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다.
정재영:
그럴 수도 있는데… 사실 도전이란 말을 쓰면 안 된다. 상업적으로 프로들이 모여서 돈 받고 볼 영화를 만드는 건데 그걸 내 개인적인 도전의 장으로 만들면 문제가 되지 않나. ‘너 도전하는 걸 내가 돈 내고 보란 말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잘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찍고, 도전은 다른 곳에 가서 해야지.(웃음) 그래서 시작하기 전에 감독에게도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역할을 준 것인지 물어보고, 리듬을 살릴 수 있는 연출을 보여줄 수 있는지 확인했던 거다. 그 때마다 이해준 감독이 확신을 줬고 그 확신이 이어져 개봉을 앞둔 지금까지 이어진 거다. 정말 이렇게 감독, 스태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작품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지금 허진호 감독 영화 때문에 중국에 나가있는 김병서 촬영감독 같은 경우 ‘형 보고 싶어요, 요즘 분위기 어때요’라며 연락하고 나도 ‘걱정 말고 빨리 오세요’라고 답장한다. 좋은 의미로서의 아마추어적 장점을 가진 작업이었다. 영화 파이널 믹싱이 언제인지 기억했던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말을 평생 들을 순 없다”

그렇게 작업 자체를 즐기는 건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인가.
정재영:
과정의 중요함을 아는 거지. 가령 내가 배우를 하면서 ‘연기 잘하는 배우 정재영’이라는 칭호를 평생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백 년 동안 연기 잘하는 배우가 어디 있겠나. 딱 그 시대에서 몇 년, 길어야 20년 정도 인정받는 거다. 버스 정거장처럼 그렇게 들렀다 가는 거니까 평생 남을 유명세 같은 걸 바라기보단 이번 <김씨 표류기>처럼 과정이 좋은 영화를 계속하고 싶은 거다.

과정 이후의 결과도 중요하지 않나.
정재영:
당연히 개봉할 때가 되니까 흥행에 대한 부담감이 있다. 다른 것보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실망하면 속상하니까.

그런 면에서 흥행을 위해 홍보에 신경 쓸 필요가 있을 텐데 연기에 비해 그 분야는 좀 멀리하지 않나.
정재영:
그런 이상한 오해가 생겼다. 이게 방송, 정확히 말해 시청률 많이 나오는 방송에 잘 안 나와서 생긴 오핸데 나는 정말 영화 홍보할 때 연예 오락 프로그램 빼면 되게 성실히 다 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라디오면 라디오, 인터뷰면 인터뷰 다 한다. 그런 선입견이 있는 거 같다. 연기 좀 한다고 ‘나 연기자야’ 이럴 거 같은. 하지만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그런 오해가 딱 없어진다. (기자에게) 그쪽도 오늘 처음 보는데 그런 게 없어지지 않나?(웃음) 다만 꿔다놓은 보릿자루라도 될까 겁이 나서 오락 프로그램에 안 나갔던 것뿐이다. 사실 이번에는 과감하게 결단을 해서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려원이가 <자명고>를 찍느라 바빠서.(웃음)

홍보에 불성실한 배우라는 게 아니라 연기와 마케팅은 별개인 거라 생각했던 건 아닌지 궁금했던 거다.
정재영:
예전엔 그런 생각 가질 때도 있었다. 연기자로서 좀 올드한 생각이지. 연기자가 연기할 때 쏟는 에너지를 외적인 분야로 끌고 오는 게 좀 낯간지러운 게 있다. 연기라는 건 내가 아닌 남이 평가해주는 거니까. 그리고 사실 영화란 건 정확하겐 종합예술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연출예술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인터뷰나 홍보는 감독이 해야 한다. 촬영 진행은 어떻게 하고, 스케치부터 영화 끝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런데 이렇게 인터뷰를 하다보면 내가 영화를 만든 것 같다. 가령 ‘영화의 메시지가 뭘까요?’라고 묻는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나.(웃음) 사실 그런 면에서 모두들 대리인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기자는 대중이 궁금해 할 걸 물어보고, 난 감독이 말할 걸 대답하고.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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